백한 번째 편지


김 영 강 







6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쯤 그는 어찌 변했을까? 하얀 멸치 같던 비리비리한 모습도 이제는 지위와 부에 이력이 붙어 중후하고 듬직하게 변했을 거야. 아마 지금쯤은 부동산 재벌이 됐겠지. S공대에서도 손꼽히는 수재였으니 분명히 여기 칼텍 정도는 나왔을 거고, 또 박사 학위도 받아 대학교수가 됐을 거야. 그 부모도 둘 다 대학교수였으니까. 물론 결혼은 했겠지. 어떤 여자를 만났을까? 아니야. 너무 용해 빠져서 여자를 사귀지도 못 했을 거야. 그 성격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는 사람이야.


  남편이 한 행동이 괘씸해서라도 생일 파티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귀다가 헤어지면서 무슨 맹세나 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편지에서 불쾌감을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도리어 김동추의 현실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남편 역시 김동추의 현재 위치에 관심이 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뭘 하는 남자일까 하고. 그 성격에 초청장에 명기된 연락처에 전화를 걸 수도 있는 남자다. 물론 시침을 뚝 따고 말이다. 이제는 할 수 없다.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위로하자. 부글부글 끓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옥희는 자신을 요리조리 거울에 비쳐보았다. 김동추가 ‘아악’하고 실망을 할 정도는 아니다. 지금 이 정도면 우수한 편이다. 나이도 다들 10년 정도는 젊게 봐주고, 아직도 40년 전 처녀 때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하는 일도 괜찮고, 아무리 그가 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대화에 궁할 것 같지도 않다.


   옥희는 컴퓨터를 켰다. 잡념을 끊고 시간을 보내는 데는 컴퓨터가 최고다. 이미 끝을 낸 번역이지만 문장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없나 하고 다시 검토를 했다. 한데 정신 집중은 안 되고 컴퓨터 화면엔 밉살스런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또 옛날보다는 훨씬 근사해진 김동추의 모습이 자꾸 그려졌다.

   옥희는 근 25년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러나 5년 전, 회사가 합병이 되어 타주로 이전되는 바람에 직장를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또 일거리가 생겼었다. 그녀는 지금 번역 일을 맡아 아주 즐기며 돈을 벌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참 부지런히도 살았다.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불행했다고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옥희는 자신이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감사함을 느끼며 산 적이 더 많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신기하게 일이 잘 풀렸다. 그중에서도 좋은 시어머니를 만난 것에 늘 감사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직장 생활을 했으나 그녀가 맘 편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시어머니는 평생을 아들 뒷바라지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훌륭하신 분이지만 불쌍한 분이셨다.


   미국에 발을 딛고 보니 물론 모든 게 낯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살아야 할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옥희는 뭔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가슴이 서늘했다. 아파트가 너무 좁았다. 옥희는 부모님 그늘 아래서 대학까지 졸업은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과한 상상을 한 것도 아닌데 첫 현실에서 그녀는 그만 절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막막한 기분을 맛보았다.

   신부가 온다고 시어머니께서 미리 아파트를 구했는데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그녀의 외모와는 정반대인 분위기였다. 혹시 바늘 끝만큼이라도 감정이 샐까 봐 옥희는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남편은 “둘이 살기는 딱 좋네.” 하고 말했다. 혼자 살 땐 얼마나 좁은 데 살았으면 저런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그가 불쌍했다. 옥희 역시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옥희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아가야, 너한테 미안하구나. 여기 살다가 애 낳으면 그때 좀 더 넓은 데로 가고, 우선은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옥희는 아니 라고 손사래를 치며 둘이 살기는 딱 좋다고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시어머니는 비행기 부속품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공장 근처의 어느 집에 방 한 칸을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상견례 때의 오고간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미국회사에 다닌다고 해, 그것이 공장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옥희다. 아들과는 따로 살고 있다고 하던 그 거주지,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한 5년 동안은 일을 더 하려고 해. 그때 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가 있어. 너는 그동안에 애 낳아서 키우고 틈틈이 영어 공부도 하고 뭐든지 하나 배워서 전문직을 갖도록 해라. 직장은 처음 들어갈 때 잘 들어가야 한단다. 우선은 내가 퇴근하고 와서 너를 도와줄게. 퇴직 한 다음에는 애도 키워주고 집안 살림도 도맡아 해줄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나는 상민이보다 너를 더 믿는다. 상민이는 참 부족한 면이 많아. 그런데 결혼하고부터는 딴 사람이 돼 가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다 네 덕택이야. 고맙다.”


   옥희 역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임신까지 하고 보니 당장 뭘 어찌할지 몰라 막막하던 차에 시어머니께서 조언을 주니 당장 공감이 갔다.

 

   ‘그렇지. 길게 잡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자’ <계 속>

 
a_level_25.gif달샘 16.07.23. 08:46
놓친 떡이 더 커보인다는......
김동추를 놓쳤으니까 (버렸으니까?) 상상만으로 건사하게 보일지 몰라도.
결혼했더라면 또 다른 실망이 있었을지도~~~

옥희는 정상적인 결혼시작을 하고있구먼요.
사람이 살다보면 실망하기도, 진부하기도 하지않아요?
나는 내나름의 철학으로 <모든건 맘먹기에 달렸다.>이지요.
또 기다려 지네요.
연제의묘미인가요??? 하하하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4. 04:16
달샘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결혼하여 부부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할 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모릅니다. 
그 길이 탁 트인 고속도로 일수도 있고 가시덤불 길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의 끝도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둘이 같이 힘을 합해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나름대로의 철학, <모든 것이 맘먹기에 달렸다.> 이게 바로 진리 아닐까요?
 
a_level_25.gif물방울 16.07.23. 13:35
의외로 옥희씨 적응을 잘해나가시네요.
뭐 다들 남의 나라에 와 겪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요.
뭐랄까 옥희씨의 살아온 삶에 울컥 위로를 받는 것은 왜죠?
공감, 이거 무서운데가 있네요.
힘이 되는 소설입니다.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6. 12:36
결혼하여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모든 게 너무나 너무나 예상 밖일 경우, 참 난감할 것입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 왔다가 적응을 못 하고 도로 돌아가는 신부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다른 문제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이니, 옥희는 맘을 굿굿히 먹습니다.
옥희 씨의 삶에 울컥 위로를 받는다는 물방울님의 말씀에 백번 이해개 갑니다. 
"울컥"이라는 부사가 묘하게 어울립니다.
 
a_level_40.gif여선 백복현 16.07.24. 10:28
김동추가 뭐하는 남자일까? 
베일에 가린 그 분의 현재가 궁금해지는군요. 마치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호화 파티를 여는 게츠비 같은 인물은 아닐까...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갑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곳은 무더위가 계속되는군요.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6. 12:48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독자기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게는 격려가 됩니다.
그리고 7회부터는 독자들에게 소설을 써 내려가게 하면 어떤 스토리들이 나올까 하는 궁금증도 일어요. 
더 재미있는 소설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옥희와 김동추의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도 있겠지요. 소설이 어찌되나 한 번 따라가 봅시다.

7회



   첫 애를 낳을 즈음에 어머니가 오셨다. 시어머니께서 휴가를 받아 산후조리를 시키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오신 것이다. 그땐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옮겼었다. 그냥 그대로 살 수도 있었으니 어머니가 오시기 때문에 옮긴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붙들고 서럽게 우셨다. 그 당시, 옥희는 너무나 말라 있었다. 보이는 건 부른 배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이나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또 배를 어루만지며 울고 또 울었다.


   “그 예쁜 얼굴이 도대체 이게 뭐냐?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 꼴이 됐냐?”


   사실 그때 옥희는 자신의 생활이 힘이 드는지 어떤 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말랐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자꾸 눈물이 났었다.


   나중에는 사는 꼴이 이게 뭐내면서 울었다. 어머니 생각에는 딸이 완전히 속아서 결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너는 실패다. 실패야.” 라는 말까지 했다. 실패라는 말에 옥희는 화가 났다. 엄마라는 사람이 딸한테 실패라니? 딸이 울어도 엄마는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더구나 사윗감으로 점찍어 결혼을 시킨 사람은 엄마이다. 친정엄마의 입장에서는 너무 실망이 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이라고 하니 영화에서 본 넓고 화려한 아파트를 상상하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실패라는 말은 어머니의 실수다.


   “실패라니? 내가 뭐 다 살았어? 앞날이 창창한데 엄만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은 그리했지만 옥희의 눈은 울고 있었다.


   딸 셋을 낳았다. 사실 옥희는 애를 하나만 낳고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계획대로 안 되었다. 둘 낳고는 반드시 끝내려고 계획했는데 예기치 않게 셋째가 생겼다. 시어머니 말씀대로 우선 틈틈이 영어 공부부터 했다. 다행히 한국서부터 영어는 웬만큼 했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직업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열심히 배웠다. 바로 그때가 산업화 바람이 불어 컴퓨터 시대가 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셋째를 낳는 바람에 직장 생활은 미루어졌으나 전문직을 향한 그녀의 실력은 늘어갔다. 나중엔 직업센터에서 보조 선생 역할을 하며 월급까지 받았다.


   회사가 합병을 해 타주로 이전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당장 굶어죽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색이 심했다.


   “아이구 어떡하지, 아이구 어떡하지”를 연발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워낙 든든한 회사였기에 그녀가 받은 혜택이 아주 후해,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도 처음 산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두 딸은 이미 출가를 한 후였고 막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옥희는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의 한계를 느껴 가끔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계산을 이미 다 해본 옥희다.


   딸들도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회사가 계속 그대로 있었더라면 본인의 의지로는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엄마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기네들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해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그런데 남편은 밉살스런 소리를 하며 옥희 속을 긁었다.


   “왜 애들보고 생활비 얘기하고 그래?”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무슨 때에 아이들이 비싼 선물이라도 하면 그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다음엔 이렇게 비싼 것 하지 말라고 아주 정색을 하고 말한다. 카드에 금일봉이라도 들어있으면 카드만으로도 족하니 돈은 도로 돌려주려 한다. 옥희는 남편에게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애들 힘든 것만 가슴 아프고 와이프는 평생 힘들어도 돈만 벌어오면 된다 그거야? 내가 돈 잘 벌어 오니까 그동안 나하고 살았어? 이제 직장 떨어졌으니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 당장 생활의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그딴 식으로 안달을 해? 왜, 나는 집에서 놀면 안 돼?”


   말을 한껏 불려 과장을 해 쏟아내면서 옥희는 남편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돈만 벌어오면 좋겠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니 그건 잘 참아냈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가 번역 일을 맡게 됐다고 하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옥희는 또 한 번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금세 일거리가 생겨 어떡하지? 좀 쉬었다가 일을 맡지 그래.


   이렇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번역 일을 안 맡을 옥희는 아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교육을 시켰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옥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큰딸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할머니이--” 하고 좋아 날뛰는 손자들을 품속에 안으니,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큰딸은 옥희에게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냐면서 아빠 들어오실 시간 다 됐다고 뜻밖의 말을 했다. 남편은 사위랑 같이 골프를 치러 간 것이었다. <계 속>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a_level_40.gif여선 백복현 16.07.26. 19:08
딸네 식구까지 한자리에 모인 데서 옥희 부부 사이에 한바탕 폭로전이 오가는 건가요? 
서로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면서 딸과 사위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경제를 최우선으로 하며 계산에 밝은 남편의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졌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곳도 폭염이 계속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더위와 가뭄이 계속되는 중, 선생님의 소설은 단비 같네요. 비가 좀 펑펑 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7. 02:24
7회에서 말씀드린 바 같이 독자들에게 그 다음의 줄거리를 이어가게 하면 정말 아주 다른 색깔의 소설이 나옹 것 같습니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아주 다른 소설이 탄생할 수도 있고, 또 같은 소설을 읽고도 아주 다른 해설을 할 수 있는 것이 소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단비 같다는 좋은 말씀에 고마움을····.
 
a_level_28.gif강기영 16.07.26. 20:30
저는 같은 남자이면서도 둘레 남자들에게 자주 볼멘소리를 합니다. 
밥 좀 하고, 김치 담그고, 그릇 좀 씻고, 세수 하는 김에 양말, 속옷 빨아 너는 것쯤은 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게 자존심인데, 씨도 안 먹힐 큰소리나 치며 도매금으로 '남자들은...'의 빌미를 주게 만든다고.
한편으로는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평생 껀수 한 번 건지기 힘든 남자들의 신세가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상민 씨의 투정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요? 
동추 씨의 주접은 쨔잔, 하고 글쟁이 연습을 하던 반전으로 뒤집힐 것도 같은데, 아무튼 다음을 기다려봐야 겠네요.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7. 22:56
요즘은 전문직 남편들도 집안일을 도와주어야지, 안 그러면 ?? 당한다고 합니다. 물론 아기 기저귀도 다 갈아줘야 하고요. 
주위의 어느 분 아들이 변호사인데, 그분 왈, 아들이 머슴이래요 머슴. 머슴 중에도 막머슴이랍니다.
지금 우리 나이의 남편들도 권위권위 하지 말고 아내를 열심히 도와줘야 합니다. 먼저 자기 밥은 자기가 차려 먹어야 하고요. 이 소설의 상민 씨, 쪼다이긴 하지만 그런 건 잘하는 남편 같습니다. 아내가 돈을 잘 벌어서?
아하!!! 반전, 동추 씨가 글쟁이로 변신을 ??? 충분히 가능한 말씀입니다. 
위에서도 언급을 했으나, 두 분께서 소설의 바통을 이어받으면 정말, 더 재밌는 줄거리가 나올 것 같아요.
 
a_level_25.gif물방울 16.07.27. 21:11
일을 놓지는 않겠지만,
좀 마음을 알아주면 참 좋겠는데.
이래 저래 섭섭한 마음 쏟을 곳을 찾아나서 보는데
남편 역시

┗ a_level_25.gif김영강 16.07.28. 03:16
여자가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발전도 되고, 가정의 발전도 되고 사회에 기여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편으로부터는 힘들지? 하는 한 마디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내의 마음입니다. 
물방물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금 마음이 짠---해집니다.

8회



   “아까 낮에 이 서방이 아빠랑 통화했거든요.”


   옥희가 집구석에 앉아 혼자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에 남편은 탁 트인 푸른 초원을 훨훨 날아다녔다. 이런저런 망상을 하며 속을 끓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아이쿠, 다행이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야 정리가 되었다. 사위의 전화를 받고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골프채를 차에 싣고 막 떠나려는 차에 집배원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들을 갖고 들어와 겉봉을 훑어보는 중에 옥희가 들어온 것일 게다.


   드디어 차가 멎으며 남편과 사위의 모습이 거실 창밖을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멀찌감치서 보니 장인과 사위가 같은 또래의 친구 같다. 사위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남편의 큰 키도 오늘 따라 왠지 멀대같아 보여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버님이 싱글 쳤어요. 싱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사위가 한 첫마디였다. 싱글이란 남편이 아직 한 번도 못 쳐본 점수 아닌가? 옥희의 출현이 뜻밖이라는 듯 남편은 잠깐 주춤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게 김동추 머리통이다아--- 하고, 때리니까 딱 딱 하고 어찌나 공이 잘 맞던지····.어허어 쏙 씨언해.”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고는,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그는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큰딸과 사위는 김동추가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 있다아아--” 하고 노래를 부르듯 뒷말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두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계속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진짜 김동추의 머리통을 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영선이 생각을 안 했을 리 만무다. 옛날 추억과 더불어 아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같이. 그런데도 싱글을 쳤다니 대단하다. 아니다. 남편은 두 가지를 생각을 한꺼번에 못하는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오직 골프에만 몰두했을 테니 그렇다.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옥희가 무슨 말을 하려 하면 “가만있어. 가만있어.” 하고 인상까지 쓰고 손사래를 친다. 아주 강력하게 말을 막는다.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아 옥희가 자존심이 상할 정도다. 한 가지에 열중하면 그 외의 것은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안 들어오는 것이다. 열중을 해야 할 특별한 일도 아닌 맨날 보는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다.


   일단 골프가 끝났으니 이제 그의 머리에는 김동추뿐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던 여자, 박영선이라는 이름이 아내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에는 손톱만치의 변화도 없었다. 입은 닫고 있어도 눈으로 말할 수 있잖은가? 남편에 비해 옥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눈으로 하는 말도 다 감지를 할 수 있다.


   골프 치는 시늉을 하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고 옥희의 눈에 시선을 꽂고는 마디마디를 꼭꼭 누르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가고 싶으면 가라구. 얼마든지 가라구. 7월 30일이면 아직 3주 남았으니 그 안에 만나 봐도 되겠네.”


   그 전에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여운이 맴도는 끝말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웬만큼 잔잔해진 옥희의 감정에 다시금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집이라면 한 판 붙어버릴 텐데 사위 앞이라 어쩔 수 없어 꾹 참았다. 남편을 잠깐 꼬나보고는 맘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덩치 값도 못하는 양반아. 당신 나한테 열등의식 있어? 아니면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이 옛날에 박영선이 이하 여러 여자들하고 놀아난 결과, 얻은 결론이 겨우 그거야?


   큰딸과 사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이서 눈빛으로만 표정을 주고받았다. 옥희는 사위를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 서방 배고프지? 저녁 다 됐으니 어서 씻고 와.”


   부엌을 향하면서 옥희는 한 번 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그래. 갈 거야. 왜 못 가. 꼭 간다고. 당신이 간다면 같이 갈 수도 있어. 가서 멋지게 연극 한 번 하자구.


   만일 입장이 바뀌어 박영선이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아니 남편 눈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옥희는 저렇게 채신머리없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편안한 감정으로 여유 있게 대할 자신이 있다.

   

   식탁에 앉자마자 둘째 녀석이 “와, 함머니 팬케이--익” 하고 목청을 돋우며 눈을 반짝거린다. 두 아이가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다 잘 먹는다. 그중에서도 할머니 팬케이크인 해물전을 제일 좋아한다. <계 속>



 
a_level_40.gif 여선 백복현 16.07.30. 12:36저 나이쯤 되면, 즉 손주도 보고 그런 연배면 배우자의 첫사랑쯤은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청춘인 모양입니다. 남편의 말과 행동거지가 딱 철부지 이십 대 같네요.
반대 경우라면 옥희를 비롯한 여자들은 좀더 의연하고 너그러웠을 것 같은데...

┗ a_level_25.gif김영강 16.08.01. 04:16
맞습니다. 그 나이에 4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왜 그리 야단입니까? 그까짓 편지 한장이 뭐 그리 대숩니가? 
아마도 옥희 남편이 아내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자신만만한 남편들은 생선 망신 뭐가 시킨다고 저런 "쪼다---" 하겠지요. 
저역시 우리 여자들이 훨씬 더 너그럽고 의연하다는 여선님 의견에 백 번 동의합니다.
 
a_level_25.gif달샘 16.08.01. 01:31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유치해 질때가 있어요.
나도 그런경우가 몇번 있었는데 걍 냅둬 버리니까 지가 제풀에 주저앉더라구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우유부단한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을까? ㅎㅎㅎ
┗ a_level_25.gif김영강 16.08.01. 04:25
네?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요? 바깥 선생님께서 워낙에 미남이어서 그랬었나요? 젊었을 때? 나이 들어서?
어쨌든 달샘 선생님께서는 "걍 냅둬" 하고 냅둬 버릴 수 있는 성격이라는 거 잘 압니다. 
자존심 때문이 더 강했을 것입니다. 다행입니다. 제 풀에 주저않아서요. "냅둬"가 참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a_level_25.gif물방울 16.08.01. 14:03
옥희씨 참!
잘도 참아내고 있네요.
뭐랄까? 분명 목까지 차오르는 무엇이 있지만,
절대로 밖으로 자존심을 유지합니다.
반면 남편은 이렇게 함부로 하다가 코가 다칠듯.
여튼 딸네집에서 돌아와 볼 일입니다.
┗ a_level_25.gif김영강 16.08.02. 12:03
그렇지요. 목까지 차오르는 무엇이 있지만, 그것을 다 뱉어내면 안 돼죠.
할말 안 할말 잘 가려서 처신을 해야 합니다. 촌수가 없다는 부부사이라도 예의는 있습니다.
더구나 자식들 앞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여튼 간에 딸네에서 돌아와서 어찌될까요? 갈등의 연속? 아니면 화해?

9회, 10 회



   남편은 싱글 친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위도 맞장구를 쳐가며 장인의 기분을 한껏 맞춰 주었다. 거기다가 손자 녀석까지 합세를 하여 싱글이 뭐야? 하고 끼어들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네 살짜리 아이가 어찌 알겠냐마는 남편은 녀석한테도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둘째도 눈을 말똥거리며 듣고 있었다. 이제는 두 녀석들이 말을 잘해 의견 소통이 잘 된다. 그리고 어찌나 재잘재잘 말이 많은지,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하기에 더 바쁘다.


   낮에 일어난 일을 몽땅 잊어버렸는지, 옥희도 남편도 아이들 재롱에 빠져 마냥 즐겁기만 하다.

남편의 얼굴에 김동추의 하얀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또 다른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도 이렇게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김동추에게는 옥희가 편지를 쓰는 대상에 불과했고, 끄덕도 안 하는 옥희에게 백 통의 편지를 보낸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닌 집념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옥희를 진정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감정에 불과하다. 지금 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쌀쌀하기 그지없고 도도하고 교만한 옥희에게 차인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옥희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떡할 뻔했지? 아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만날 아내 눈치만 보다가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졌겠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옥희는 김동추와의 만남에 기대를 걸고, 옷장 문을 열고 한참 서 있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거울 앞에 서서 표정까지 관리하고 요리조리 몸매를 비추어 보던 생각을 하니 푸우우 하고 웃음이 터졌다.


   다음 날 아침, 한판 붙어보리라 하고 단단히 벼르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옥희는 침묵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든 김동추와 박영선, 그들의 등장이 결과적으로는 피장파장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박영선 일은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서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성격에 안 물어보면 이상하지.


   옥희는 남 말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시는 참으로 씁쓸한 느낌이었으나, 이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동안 아무 내색도 안 했지?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남편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다 지난 일인데 뭐 하러 물어요? 그리고 결혼 전 일인데, 무슨 상관있어요? 남자가 결혼 전에 연애도 한 번 못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부글부글 끓던 속이 하룻밤 만에 어찌 이리 가라앉았는지 옥희도 이상했다. 남편 역시 하룻밤 사이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박영선과의 과거 때문일까?


   “그래. 맞아.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 같은 건 들먹일 필요가 없지.”


   “과거 같은 건” 이란 말에 옥희와 김동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뭐야 또? 당신은 내가 김동추하고 정말 연애를 했다고 생각해?’ 하고 따지지도 않았고, 어제처럼 화도 안 났다.

   

   박영선과의 연애담을 털어 놓을 수도 있건만 남편은 암말 안 했다. 잠깐 주춤하더니 그는 한 가지 물어봐도 되냐고 아내한테 되물었다. 말투가 아주 부드러웠다.


   “뭔데요? 얼마든지 물어봐요.”


   약간은 계면적인 웃음을 띠면서 그가 물었다. “그 남자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싸움의 불씨를 자신이 던진 사실을 남편은 모를 것이다. 옥희는 더 이상 따지지 말고 그냥 끝내기로 작심했다. 타 오르려고 하는 불을 겨우 껐다. 어쨌든 사건의 발단은 편지 한 장이 불씨였으까. 그러나 음성은 커졌고 말 마다마디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 새끼가 그 남자로 불려졌다.


   “뭐하는 사람인지 나야 통 모르지. 40년 전에 공대 학생이었다는 것밖에. 그담엔 모르지이---. 어떻게 됐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려다가 옥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남편은 “아, 참 그렇구나.” 하고 순순히 받아넘겼다. 그런데 이어진 다음 질문이 걸작이었다.


   “잘생겼어?”


   옥희는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박영선이가 자신보다 더 아름다우리라는 생각이 앞서지만 아무런 감정 개입이 없다.


   “아니 쪼끄맣고 못생겼어. 너무너무 쪼끄매.”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김동추한테 미안했다. 잘생겼다 하더라도, 이제는 편지 백 통 이야기를 남편에게 솔솔 불었던 신혼 때의 그 옥희가 아니다.


   “그래? 정말?”


   “정말이지 그럼---. 근데 이 나이에 그런 걸 왜 물어요. 정말 애 같아.”


   이번에는 박영선이 한몫한 것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고개를 삐딱선에 태우고 얼굴을 맞대면서 남편이 또 술수를 쓰는 것이다.


   “이게 다 아직도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 아니겠어?”


   씽긋 웃는 표정도 말투도 옥희한테는 느끼했다.

 

   ‘유치하기는····. ’ 하는 소리가 입 안에서 뱅뱅 돌았으나 뱉지는 않았다.


   7월 30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옥희는 뮤직센터에서 열린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갔다. 남편은 클라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친구랑 동행이었다. 모처럼 정장을 한 참말로 오랜만의 나들이었다. 친구랑 둘이서 한껏 행복하게 연주회를 관람하고 우루루 몰려나오는 관중들에 섞여 주차장을 향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옥희 씨.” 하고. 남자 목소리였다.


   옥희는 돌아서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바로 뒤에서 불렀는데 모두들 와글거리며 옥희를 지나쳤다. 같이 가던 친구도 “분명히 불렀는데.” 하고 그 자리에 섰다. 그때 아주 작은 몸집의 남자가 미소를 띄우며 옥희 앞에 나타났다.

   김동추였다. 옥희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나 그는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도로 돌아간 듯했다. 하얀 테 안경도 그대로 끼고 있고 낯 색도 창백했다.


   초청장을 받은 후부터 계속해서 김동추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이 갈팡질팡했으나 그녀는 김동추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너무나 담담했다. 김동추 역시 담담하게 그녀를 대했다. 4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알아볼 수가 있느냐며 감탄하는 친구와 함께 그들은 저쪽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초청장 받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술술 잘 이어졌다. 김동추와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친구가 중간에서 거들었다.

 

  “옥희가 초청장 받고 지금, 그날만 손꼽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미리 만났네요.”


   보통 때 같으면 펄쩍 뛸 옥희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가만있었다. 그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또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입담 좋은 친구가 있어 얘기가 더 잘 풀렸다.


   김동추는 독신이었다. 60이 되도록 결혼을 한 번도 안 한 것이다. 옥희의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김동추에게 미안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그때는 참 미안했단 애길 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동추 씨. 동추 씨”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거기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가야죠.”하는 소리와 함께 웬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고 형상만 보였다. 몸집이 컸다. 모습이 눈에 익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뮤직 센터가 쩡쩡 울렸다. 옥희의 침대도 흔들거렸다. 꿈이었다.

   40년 동안에 한 번도 김동추 꿈을 꾼 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 매일 생각을 하다 보니 꿈에까지 그가 나타난 모양이다.


   꿈을 꾼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통 받았다. 발신인은 김동미였다.


   아니, 김동미가 웬일로?


   동시에 발신처로 눈길을 주니 김동추가 보낸 편지와 같은 주소였다. 순간, 강한 의문 하나가 번개처럼 번쩍하며 뇌리를 스쳤다. 초대장을 받은 후부터 무슨 까닭인지 김동미가 김동추의 얼굴에 겹쳐져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었다.


   봉투를 뜯는 옥희의 손이 떨렸다. 회갑연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소되었다는 간단한 공문 편지와 함께 김동미가 친필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4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옥희야,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렸어.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이구나. 네가 깜짝 놀랄 소식 한 가지 전한다. 나, 동추 씨랑 결혼했어. 우리가 먼 친척간인 거, 너도 알지? 그래서 집안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할 얘기가 정말로 너무너무 많아. 옥희야, 내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너까지도 사랑했다면 너는 믿을 수 있겠니? 진심이야. 나는 동추 씨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어. 슬픔, 아픔····. 그리고 그의 지병까지도. 동추 씨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회갑연이 취소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주 좋아 의사의 허락 하에 추진한 일이었는데 말야. 지금 병원에 있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꼭 와 주리라 믿는다.


   저 만치서 스무 살 적의 김동추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김동미가 슬픈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옥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휴우하고 내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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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level_30.gif물방울(이선자) 16.08.06. 14:21
아 정말 동미씨가 좀 목에 가시처럼 걸렸었어요
그래서 동미씨에 대해 물었던 적 있잖아요
아 참 예감이란 참참참
참 잘했네요. 동미씨
두루두루 이리도 넓은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데
그래도 동추씨 아내복 있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뭐랄까?
결국에는 이렇게 백한 번째 편지가 끝이나는군요.
재밌는 마지막 회입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욤ㅎㅎ
┗ h_level_28.gif김영강 16.08.08. 23:12
동미 씨.. 참 순수하고 착하고 등등, 물방울님 말씀대로 두루두루 넓은 마음을 갖춘 좋은 여자입니다. 김동추를 진짜진짜 사랑한 여자입니다.
그가 부잣집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한 집에 살면서 너무나 몸이 약한 김동추를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 결과 그게 그만 진실한 사랑이 돼버린 거지요.
어디서, 연민이 진실한 사랑의 시초라고 한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백프로 공감합니다. 
"사링이 아니고 연민이니 착각하지 마." 이런 말도 드리마에 흔히 나오긴 하지만.... 
물방울님, 제 소설 재미있다고 해주시면서 끝까지 읽어주시고, 매회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h_level_30.gif달샘(정해정) 16.08.06. 23:09
나는 예상을 했었어, 물방울은 아직 어린애라서...ㅎㅎ

재밌게 자알 읽었네.

다음 연재 소설이 기다려 지는 아침에,
정말 수고 많이했어.
┗ h_level_28.gif김영강 16.08.08. 23:33
회장님은 가다가 뭔가 빤짝 하고 빛나는 것이 있어요. 자리 깔아도 될 만큼....
제 소설, 항상 재미있다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백한 번째 편지"를 읽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소설이 갈수록 안 읽혀지는 현실인데도 말입니다.
참,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의 말씀을 드릴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글마루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다가 제 장편소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건재하고 있어서요. 그때 달린 댓글들을 지금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디.
 
h_level_28.gif에스더 유 16.08.20. 14:04
끝. 정말 깨끗한 끝입니다.
여운이 남는것은 김동미가 김동추을 사랑하는 방법이 관대하다고 
처음에는 뭉클했지만...... 
┗ h_level_28.gif김영강 16.08.21. 08:57
김동추가 품고 있는 모든 것, 슬픔 아픔 그의 지병 그리고 그의 맘속에 자리하고 옥희까지도 사랑했다는 김동미.... 
이 세상에는 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이 천태만상입니다만, 김동미의 그런 사랑이 참 사랑이라 느껴집니다. 
에스터님 말씀대로 관대하고 뭉클한 사랑.... 
미흡한 소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깨끗한 끝" 이라 하시니 제 마음도 깔끔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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