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항아리/유봉희

2014.05.10 13:55

오연희 조회 수:1040 추천:27

저, 항아리

목 깊은 백색 큰 항아리
꽃도 물도 담아보지 못한
서재 한구석에 무거운 몸, 들여다보지 않았어도
품고 있는 것은 묵은 어두움뿐일 터
이제 어둠도 굳어서 나무 등걸처럼 되어있으려나
저 항아리, 때때로 목숨을 던져서라도
속어둠을 확 깨 버리고 싶은 적이 있을까
속울음 터트리고 싶은 적 있을까
그 것도 아니라면 물이 넘치면 흘러서 샛길을 내듯
항아리 속 어둠도 길을 트는가
밤마다 어둠을 타고 흘러나와
책장을 슬슬 넘겨보다가 그것도 덤덤해지면
창가에서 울어대는 밤새의 날개에 업혀
물비린내 자옥한 강가를 몇 번이고 돌아보고
마을 어귀의 묘지, 오래된 어둠도 만나보는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불빛 사그라지는 어떤 창가 고뇌에 찬 이마에
살포시 손을 내렸다가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속 캄캄 어둠품고 있는 저 무거운 몸이
청청 푸른 이마로 깊은 사유의 시간을
뿌리내리고 있는지,




유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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