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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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내 인생의 리허설

2023.02.06 13:56

최영숙 조회 수:37

여러 해 전, 10월 중순에 볼티모어 교향악단의 리허설
무료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연주된다는 소식이었다.

무료 공연이라 해도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 

날이 되어서 주차장을 찾아 들어가 주차하고 난 다음에 층수를 확인해보니,
숫자 표시는 없고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펴보니 층 이름에는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하여
거쉬윈, 베토벤, 드뷔쉬도 있었다.
음악가 이름만으로도 제법 격조 있는 주차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심포니 홀에 들어서니 마치 오디션 장소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복도나 계단 아래, 아니면 카페의 빈 의자에서 연습하는 연주자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현이 만들어 내는 음률에 빠져있는 캐주얼한 복장의 연주자들과 청량한 가을 아침,
그리고 로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속살거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시네몬 향...그리고
남편이 건네준 손.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얼마만에 주어진 시간과 공간인가…

입장이 시작되었고 이곳저곳에서 연습을 하던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왔다.
단원들은 자리에 앉아 웃기도 하고 잡담을 하고, 자리를 떠나기도 하고,
또 몇 사람이 모여서 서로 가르쳐 주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티셔츠에 청바지, 질끈 동여맨 머리, 면바지, 그들의 차림새는
바로 옆집 아줌마나 아저씨들이었다.

옆문으로 지휘자가 걸어 나왔다.
약간 짙은 금발의 단발머리에 청색 셔츠를 입은 그가 등장하자 
원들이 천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휘자가 단에 올라섰는데도 단원들은 여전히 웅성거렸고,
어느 단원은 벌떡 일어나 뒷문을 열고 나가기도 했다.

제1 바이올린 부수석 매들린 애킨스가 일어나서 첫 음을 내고, 거기에 맞춰 음을 맞추고 나자
드디어 지휘자가 팔을 들었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에서 1곡인 “아침”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완벽한 화음에 놀라서 몸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만 해도 어수선하고 웅성거리던 자리에서 어떻게 저런 음악이
흘러나올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현악기의 활들이 일사불란하게 같은 각도로 움직이고,
동시에 아래위로 솟구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대 위의 프로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진정한 프로는 자기 포지션을 충분히 연습하고 훈련해서 지휘자가 원하는 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다.
또한 심포니의 하모니가 긴장과 집중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휘자가 손을 들자 급작스런 긴장과 함께 그의 손을 향한 고도의 집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집중은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모니는 반드시 리더십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훈련의 강도에서 나오는 긴장과 집중이 함께 할 때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진다.

전곡을 연주하고 나서 지휘자는 악보를 들춰가며 지적을 하고 부분 연습으로 들어갔다.
음을 다시 맞춘 다음에 지휘자의 팔이 올라갔다.
몇 마디가 지나가자 지휘자의 손이 갑자기 내려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 악보 마디의 넘버를 지적했다.
연습이 반복되고 청중들이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할 때 잠시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차이코프스키는 언제 연주하느냐고, 저렇게 연습하는데 오늘 연주가 되겠느냐고
로비에서 사람들이 서로 물었다.
그제야 나는 안내책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보니 누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지,
청색 셔츠를 입은 객원 지휘자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 참이었다.

지휘자는 노르웨이 출신의 아릴드 레메레이트, 한 때 한국의
서울 시향에 부지휘자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2009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받은 노부유키 츠지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드디어 하얀 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은
더벅머리 아시안 청년이 무대로 나오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노부유키 츠지가 부축을 받고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오던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건반 위에 손을 얹고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음을 정확히 짚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잊고 노부유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잔잔한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지휘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의 박자감은 절대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노부유키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지휘자를 바라본다.
그의 세계에서 지휘자의 손바람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가 저 무대에 오르기까지 본인은 물론, 또 희생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인고의 세월이 차이코프스키가 살았던 러시아, 그곳 자작나무
숲길의 찬바람만큼이나 혹독하게 느껴졌다.

그는 몸으로 박자를 느끼는 것 같았다.
앞뒤로 몸을 흔들고, 다리를 손가락으로 연신 두드리며 자신의 파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이 건반에 올라가고 발로 페달을 밟는 순간, 공기가 흐름을 멈추는 듯 했다.
어느 오디오로도 살려낼 수 없는 공감이 홀에 가득 찼다.

나는 부끄러웠다.
온전한 눈으로, 온전한 다리로, 온전한 손으로 전력을 다 하지 못하고
나이 만 들어버린 나의 생애가 부끄러워서, 그래서 아무 것에도 프로가
되지 못한 나의 삶이 안타까워서 목이 메었다.
제대로 해 보고 싶었는데...사십이 되면, 오십이 되면, 그 무엇이 되어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저 나이만 들었다는 자괴감이 노부유키가 두드리는 건반을 통해 나에게 몰려왔다.
나는 내 인생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는 불합격이었다.
내 파트를 연습하는 일에 게을렀다.

하지만 나에게도 리허설 할 시간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아직은 본무대에 서질 않았다.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다듬어서 보완할 시간이 충분하다.

무엇이 나의 약한 점이었나.... 여러 모양에서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연습했어야 됐는데....
내 앞으로 몰려오는 섬겨야 할 일, 용납하고 포용할 일, 말없이 순종할 일, 그리고 마땅히 할 일을
젖혀놓고 내 자존심을 챙기고, 내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고, 내 방식으로 해석하고,
내 기준으로 헤아리고....이제는 그런 것들을 다듬고 보완해야 할 시간이다.

노부유키 츠지는 여전히 건반 위에 정확히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길 바랐다.
사람 앞에 서서 갈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에서부터
아름답고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기를.

살다보면 보지 못하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그 속에야 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나는 심포니 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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