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43,545

이달의 작가

뿌리

2014.02.04 05:01

최영숙 조회 수:495 추천:126

                               뿌 리
                       

  앤 여왕의 도시, 애나폴리스는 메릴랜드 주의 수도이며 항구이다.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진주 목걸이와 같이 작고 아름다운 이 도시의 메인 스트리트 끝, 부두 안쪽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바다의 수면은 비늘처럼 반짝이고, 그 위에 떠있는 세일링 보트들은 먼 바다를 향한 유혹을 가득 담은 채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다.


  1767년 9월 29일, 세계를 향해 한껏 열려있던 이 항구에 선박 한 척이 도착했다. 데이비스 선장이 끌고 온 로드 리고니어 호, 바로 노예 선이었다. 그 배에는 아프리카 감비아, 주푸레 마을에서 잡혀 온 쿤타 킨테가 타고 있었다.
그는 당시 열일곱 살, 만딩카 종족의 전사였다. 처음에는 백 칠십여 명의 아프리칸 들이 잡혀 왔지만 98명만이 생존해서 애나폴리스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메릴랜드 관보에 광고가 실렸다. 10월 7일에 노예를 경매한다는 소식이었다. 노예를 태우고 온 배는 그 자리에 담배를 싣고 다시 영국으로 향하고, 쿤타킨테는 애나폴리스 부두 광장의 경매장으로 끌려 나갔다. 마침내 버지니아의 동북부에 있는 스포트실배니어 지역으로 팔려가게 되고, 주푸레 마을의 전사였던 그는 그곳에서 노예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지난 가을에 나는, 쿤타킨테가 노예로 살았던 버지니아의 스포트실배니어 카운티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가 살았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파트로우 부근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작은 집 마당에서 흑인 부자가 야외 테이블로 음식을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사로운 장면이었는데도 그 모습이 내게는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만일에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면 그곳에는 지금 누가 서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그들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집 마당은 잔디로 덮여있고 그 뒤로는 숲이 이어져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사는 동네 주변과 별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자, 드디어 농장 건물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몇 개는 개조한 상태여서 그런대로 운영되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번창했던 시대를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스러지고 게다가 볼품없이 작아보였다. 아니다. 어쩌면 쿤타킨테가 살았던 농장은 이미 저기쯤, 누군가의 집 마당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농장 주변은 숲이었다. 쿤타킨테가 발가락이 잘리면서도 끊임없이 탈출해 숨었을 지도 모를 그 숲에서 나는 빽빽하게 들어찬 키 큰 나무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내 상상 속에서, 발목에 쇠사슬을 찬 노예들이 어둠을 타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바람이 스스스, 소리를 내며 나무숲을 훑고 지나갔다.

쿤타킨테는 버지니아의 농장주인 쟌 월러에게 팔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노예 이름인 토비로 불리게 되지만, 결코 그의 아프리카 이름인 쿤타 킨테를 잊지 않았다.  
무슬림이었던 쿤타 킨테가 크리스챤인 벨 월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는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게 된다. 드라마에서 결혼식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결혼 서약을 하고 마당에 놓인 빗자루를 넘어 가는 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성혼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두 사람이 함께 빗자루를 넘으면서, 이제는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파트로우를 빠져 나오는 길목에서 나는 오래 된 묘지를 만났다. 작은 교회 주변에 제법 많이 서있는 묘비들은 이끼가 덮였거나, 옆으로 쓰러진 채로 옛사람을 찾아 나선 이국인을 맞아주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 누구에게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당신들 덕분에 태평양을 건너 온 우리가 이곳에서 백인들과 이웃해 살고, 같은 공원을 거닐고, 대통령을 뽑는 투표까지 하고 있다고.

나는 무의식중에 묘비를 눈으로 더듬으며 쿤타킨테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어쩌다   K 로 시작된 이름만 보아도 내 가슴이 쿵 소리를 냈다.    

'뿌리' 드라마에서  쿤타 킨테의 딸인 키지가, 아버지의 묘비에 적혀있는 토비라는 이름을 그어버리고 그 아래에  쿤타 킨테라고 또렷이 새겨 놓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던 자유인, 아프리카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노예로 살았던 저들이 미스터 헤일리의 말대로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자유인이었다."는 긍지만으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죽지 못해 그냥 살아낸 것이었을까....단지 검다는 이유 하나로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숨죽여 살아야만 했던 그들이었다.

애나폴리스 부두에는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에서 따온 문구가 열 개의 동판에 새겨져 있다.

“아프리카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오래 전에 있던 사람이었다.”

“들으시오! 비록 우리가 종족과 말이 다를지라도, 기억하시오, 우리는 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오.”  

“우리는 모두 다 고통을 받는단다...그리고 사람의 지혜란 그것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을 말하지.”

“네가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아무도 네 손에 무언가를 집어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너도 네 손으로 아무것도 집을 수 없게 되는 거란다.”

동판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아름답게 승화된 쿤타 킨테 자손의 피눈물이 보인다. 동판에서 발견한 그들의 고통과 함께, 뿌리를 내리기까지 거기에 뒤따라야만 했던 용서와 자유, 긍지, 지혜, 인내의 덕목이 나를 스포트실배니아, 바로 쿤타킨테가 노예로 살았던 땅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미스터 헤일리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10여년을 투자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7대 조상인 쿤타킨테가 태어난 주푸레 마을을 찾아냈고, 그곳에 있는 자신의 핏줄과 해후를 했다. 서아프리카에 있는 세네갈에 마치 충수돌기처럼 끼어있는 나라, 감비아의 주푸레 마을은 해안가 모래사장에 있었다. 사진을 보니 해안에서는 당시 노예선이 정박했던 제임스 섬이 마주 보이는데, 맨발의 아이들은 모래 마당에서 배를 깔고 뒹굴고, 지금도 자연 속에서 여전히 가난하다.

나는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나의 뿌리를 뽑아 이곳 미국으로 이식했다. 말 그대로 미국 물을 먹고 사는 바람에 이제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사람도 아닌 중간자로서 살고 있다.

우선 사고방식이 그렇다. 언어도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한다. 문화도 그렇다. 세계관도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 다르다. 하지만 나는 엄연한 한국인이다. 나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을 뿐, 원뿌리는 변함없는 한국인인 것이다.

부모님이 그곳에 계시고,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친구들도 그곳에 있다. 이곳에 폭설이 내리거나 홍수가 나도, 미국 어디선가 사고 소식이 들려도 제일 먼저 한국에서 연락이 온다.
“괜찮니?”
그 따스한 말 한마디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뿌리는 찾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리기 위해서도 있는 것이다. 뿌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삶을 위해 터전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척박해도, 외로워도, 고통스러워도 우리 뒤에서 이 자리를 지켜 갈 후손들을 위해 그들처럼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일이다.

“너의 사랑하는 할머니와 그 분들 모두가 저곳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Cousin Georgia. from Roots

가족을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와 전통은 우리 조상의 몸부림과 애통, 고통, 희망과 꿈을 통하여 치열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 애나폴리스 부두의 다섯 번째 동판에서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5 내 인생의 리허설 최영숙 2023.02.06 37
54 스스로 속이지 말라 최영숙 2023.01.24 24
53 자식도 마음 아파요. [2] 최영숙 2023.01.08 33
52 당신을 증명하세요. 최영숙 2022.12.30 23
51 열흘, 그리고 하루 (단편 소설) 최영숙 2022.01.02 130
50 댄스 패밀리 최영숙 2019.09.16 115
49 마른 떡 한 조각 [3] 최영숙 2015.10.30 249
48 크리스마스와 추억 최영숙 2014.11.28 203
47 고양이 발톱 file 최영숙 2014.11.04 229
46 크리스토 레이 마을 최영숙 2014.10.06 234
45 안전 불감증 최영숙 2014.04.30 281
44 이름 유감 최영숙 2014.04.30 248
43 분노 최영숙 2014.03.11 367
» 뿌리 최영숙 2014.02.04 495
41 푸른 색 접시 최영숙 2014.01.21 698
40 요십이 아저씨 최영숙 2013.05.30 510
39 오징어 찌개 최영숙 2013.04.17 629
38 크루즈 패밀리 최영숙 2013.04.07 433
37 바랭이 풀 최영숙 2013.02.23 828
36 착한 아이 서약서 최영숙 2013.02.07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