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의 보람과 기쁨
2012.03.05 14:23
전원생활의 보람과 기쁨
자연은 인간의 요람이다. 자연 속에서 한여름을 무성하게 살던 나뭇잎들이 서릿밭을 받으면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 귀근의 철리를 알려주듯, 인간들도 종래는 모토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로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의 영향에서인지, 우리들이 젊음을 누리던 시절엔 너도나도 서울로 모여들어서, 농촌은 가난하고 텅 비인 집에 노인들만 겨우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 유행병과 같은 삶의 모습들이었다. 인간의 가장 복된 삶이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조화가 이룩된 천·지·인의 아름다운 화합 속에 있는데, 자신이 서 있는 엄연한 현실은 외면한 채 삶을 살아왔다. 현대인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맨발로 땅을 수시로 밟고, 나무들이 떨군 부엽토로 자란 무공해의 천연식품을 먹고, 오존이 풍부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신의 육신의 건강은 물론 정신의 여유와 안정을 누리게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사계의 변화 속에 봄에는 매화의 우아한 용모 속에서, 여름에는 난의 청아한 자태에 매료되어, 가을에는 국화의 향기에 취하여, 겨울에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면서 매용, 난자, 국향, 죽성의 사군자의 미를 탐닉하던 우리 선조들의 고매한 품성을 이을 수 있어야 한민족의 후예다운 여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늦게나마 터득한 듯 조국에서도 요즈음 일산과 양수리·곤지암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자연 속으로 문인·예술가들이 자리를 옮겨 생활의 터전을 잡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 이주한 동포들도 경제의 어려움에서 해방되어, 내 집과 땅을 마련하여 뜰에는 과목을 심고 창가에는 난을 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늙음을 잊고 소일하고 계심을 볼 때 기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태어난 곳도 산수가 배어난 남한강변의 여주지만, 다행히 미국에 이주해 와서 장미꽃을 키우는 직업을 택한 고로 새들이 우짖는 소리에 새벽 잠을 털고, 닭 우는 소리에 점심 시간을 가늠하며, 청산에 붉게 토하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생활하고 있음을 보람과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20에이커 터전에 6만여 주의 장미들을 가족으로 거느리고 봄에는 사과꽃이, 가을에는 5백여 주의 단감들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자연의 미를 만끽하고 있다.
어느 해엔 교회의 노인들을 초청하였더니 잃어버린 고향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불러줘서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님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어른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작은 공간, 조그마한 공터에라도 손에 호미와 삽을 들고 채소를 순수 가꾸고 꽃과 과목을 심는 마음은 인간 본심의 고귀한 발로이다.
조부모나 부모들의 정신과 육체가 강건해야 그의 후예들인 손자·손녀들의 영육이 튼튼하게 자라게 되며,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마스카니가 아니더라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에 나오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고, 우리 모두는 자연 속에서 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자연은 인간의 요람이다. 자연 속에서 한여름을 무성하게 살던 나뭇잎들이 서릿밭을 받으면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 귀근의 철리를 알려주듯, 인간들도 종래는 모토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로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의 영향에서인지, 우리들이 젊음을 누리던 시절엔 너도나도 서울로 모여들어서, 농촌은 가난하고 텅 비인 집에 노인들만 겨우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 유행병과 같은 삶의 모습들이었다. 인간의 가장 복된 삶이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조화가 이룩된 천·지·인의 아름다운 화합 속에 있는데, 자신이 서 있는 엄연한 현실은 외면한 채 삶을 살아왔다. 현대인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맨발로 땅을 수시로 밟고, 나무들이 떨군 부엽토로 자란 무공해의 천연식품을 먹고, 오존이 풍부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신의 육신의 건강은 물론 정신의 여유와 안정을 누리게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사계의 변화 속에 봄에는 매화의 우아한 용모 속에서, 여름에는 난의 청아한 자태에 매료되어, 가을에는 국화의 향기에 취하여, 겨울에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면서 매용, 난자, 국향, 죽성의 사군자의 미를 탐닉하던 우리 선조들의 고매한 품성을 이을 수 있어야 한민족의 후예다운 여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늦게나마 터득한 듯 조국에서도 요즈음 일산과 양수리·곤지암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자연 속으로 문인·예술가들이 자리를 옮겨 생활의 터전을 잡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 이주한 동포들도 경제의 어려움에서 해방되어, 내 집과 땅을 마련하여 뜰에는 과목을 심고 창가에는 난을 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늙음을 잊고 소일하고 계심을 볼 때 기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태어난 곳도 산수가 배어난 남한강변의 여주지만, 다행히 미국에 이주해 와서 장미꽃을 키우는 직업을 택한 고로 새들이 우짖는 소리에 새벽 잠을 털고, 닭 우는 소리에 점심 시간을 가늠하며, 청산에 붉게 토하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생활하고 있음을 보람과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20에이커 터전에 6만여 주의 장미들을 가족으로 거느리고 봄에는 사과꽃이, 가을에는 5백여 주의 단감들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자연의 미를 만끽하고 있다.
어느 해엔 교회의 노인들을 초청하였더니 잃어버린 고향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불러줘서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님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어른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작은 공간, 조그마한 공터에라도 손에 호미와 삽을 들고 채소를 순수 가꾸고 꽃과 과목을 심는 마음은 인간 본심의 고귀한 발로이다.
조부모나 부모들의 정신과 육체가 강건해야 그의 후예들인 손자·손녀들의 영육이 튼튼하게 자라게 되며,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마스카니가 아니더라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에 나오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고, 우리 모두는 자연 속에서 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