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씨 한 알
2009.04.03 08:29
호박씨 한 알
김 학
민들레 씨는 바람을 타고 떠돌다 자리를 잡게 되면 아무 곳에서나 싹을 피운다. 잡초가 우거진 곳이든, 보도불럭 틈새든 가리지 않는다. 떨어진 그곳에서 싹이 트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매단다. 그렇게 눈물겹도록 종족의 번식을 도모한다. 그러나 호박씨는 민들레처럼 치열한 자생능력이 없다.
나는 지난 봄 아파트 단지에 몇 알의 호박씨를 심었다. 울타리 가에도 심었고, 화단에도 심었다. 아침마다 오르내리던 건지산에도 호박씨를 묻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내가 땅에 묻은 호박씨를 생각했다. 어쩌다 봄비라도 내리면 심은 호박씨를 찾아 씨앗이 싹을 틔웠는지 날마다 둘러보았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조바심이 일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아파트 앞 화단의 버려진 화분에 심었던 호박씨 한 알이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가 심었던 십여 알의 씨앗 가운데서 유일하게 싹을 틔운 호박씨였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아이가 태어난 기쁨 같았다고나 할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그 호박모종을 화단의 촉촉한 땅에 옮겨 심었다. 이 호박이 잘 자라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게 되면 이웃과도 나눠 먹으려고 했다. 호박전도 부쳐 먹고, 애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어서 된장찌개도 끓이면 좋으려니 했었다. 한겨울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쑤어 친구들과 나눠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의 기대와 꿈을 눈치 챘는지 그 호박은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고 꽃도 피웠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호박덩굴 주위를 맴돌며 싱그러운 미소를 뿌렸다. 농부가 다 된 양 으스대기도 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호박꽃은 피었다가 며칠이 지나면 슬그머니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호박은 단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영양부족인가 싶어 생선뼈를 뿌리 근처에 자주 묻어주기도 했으나 변화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 여러 날 궁리를 해보았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 호박꽃에는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중매쟁이인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벌 나비를 만날 수 없었다. 일주일마다 연막소독을 하니 어느 벌 나비가 목숨을 걸고 호박꽃을 찾아오겠는가?
나의 큰 이모는 꽃다운 열아홉 살에 중매로 노 씨 집안의 큰며느리가 되셨다. 결혼을 하자마자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학교를 다닌다, 사업을 한다 하며 도시로 떠돌던 큰 이모부는 마침내 작은 부인을 얻어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말았다. 어쩌다 노부모를 뵈러 본가를 찾아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났다. 잠을 자고 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심한 세월은 마구 흘렀다. 시부모가 세상을 뜨신 뒤에도 큰 이모는 시골에서 홀로 사셨다. 그렇지만 큰 이모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다.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는데 큰 이모는 운명이거니 체념하며 사셨다. 그러다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교회와 목사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셨다. 엄격한 유교집안에서 잔뼈가 굵으신 큰 이모가 교회에 나가기까지 얼마나 고뇌하셨을 것인가? 작은 부인에게서 낳은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큰 이모를 찾아와 며칠씩 놀다가곤 했다. 큰 이모는 그래도 남편의 핏줄이기에 정성을 다해 친아들처럼 그들을 보살폈다.
작은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형제는 큰 이모부가 세상을 뜨신 다음, 시골의 논밭과 집을 팔고 큰 이모의 거처를 도시로 옮겨드렸다. 도시에서도 역시 교회에 나가시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한 때는 시동생이 찾아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큰 이모는 그 이혼요청을 결연히 거절하셨다.
큰 이모는 평생 남을 미워하거나 남과 싸워본 적이 없는 분이다.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욕 한마디 하신 적이 없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천사였다. 아들이나 딸을 잉태해보지 못한 큰 이모는 그렇게 사시다 고희를 넘긴 뒤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느 해 가을 J선배 댁을 찾은 적이 있었다. 누런 늙은 호박이 몇 개 거실에 쌓여 있었다. 보기도 좋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내가 그 호박에 눈독을 들이자 그 선배는 호박씨 한 주먹을 내게 건네주었다. 스스로 호박씨를 심고 가꿔서 늙은 호박을 만들어보라는 의미였다. 그 호박씨를 겨우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심었다. 그 호박씨도 애호박 하나 매달아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호박씨는 나를 잘못 만나서 슬프게 생을 마친 것이다.
그 호박씨를 가지고 귀가할 때 나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J선배 댁에서 보았던 늙은 호박이 눈에 아른거렸었다. 호박이 민들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더라면 좋았으련만….
나는 요즘에도 호박을 보면 내가 심었던 그 불행한 호박씨가 생각나고, 그 호박씨를 떠올리면 천사처럼 살다 가신 큰 이모가 마냥 그리워진다.
김 학
민들레 씨는 바람을 타고 떠돌다 자리를 잡게 되면 아무 곳에서나 싹을 피운다. 잡초가 우거진 곳이든, 보도불럭 틈새든 가리지 않는다. 떨어진 그곳에서 싹이 트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매단다. 그렇게 눈물겹도록 종족의 번식을 도모한다. 그러나 호박씨는 민들레처럼 치열한 자생능력이 없다.
나는 지난 봄 아파트 단지에 몇 알의 호박씨를 심었다. 울타리 가에도 심었고, 화단에도 심었다. 아침마다 오르내리던 건지산에도 호박씨를 묻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내가 땅에 묻은 호박씨를 생각했다. 어쩌다 봄비라도 내리면 심은 호박씨를 찾아 씨앗이 싹을 틔웠는지 날마다 둘러보았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조바심이 일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아파트 앞 화단의 버려진 화분에 심었던 호박씨 한 알이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가 심었던 십여 알의 씨앗 가운데서 유일하게 싹을 틔운 호박씨였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아이가 태어난 기쁨 같았다고나 할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그 호박모종을 화단의 촉촉한 땅에 옮겨 심었다. 이 호박이 잘 자라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게 되면 이웃과도 나눠 먹으려고 했다. 호박전도 부쳐 먹고, 애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어서 된장찌개도 끓이면 좋으려니 했었다. 한겨울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쑤어 친구들과 나눠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의 기대와 꿈을 눈치 챘는지 그 호박은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고 꽃도 피웠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호박덩굴 주위를 맴돌며 싱그러운 미소를 뿌렸다. 농부가 다 된 양 으스대기도 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호박꽃은 피었다가 며칠이 지나면 슬그머니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호박은 단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영양부족인가 싶어 생선뼈를 뿌리 근처에 자주 묻어주기도 했으나 변화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 여러 날 궁리를 해보았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 호박꽃에는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중매쟁이인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벌 나비를 만날 수 없었다. 일주일마다 연막소독을 하니 어느 벌 나비가 목숨을 걸고 호박꽃을 찾아오겠는가?
나의 큰 이모는 꽃다운 열아홉 살에 중매로 노 씨 집안의 큰며느리가 되셨다. 결혼을 하자마자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학교를 다닌다, 사업을 한다 하며 도시로 떠돌던 큰 이모부는 마침내 작은 부인을 얻어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말았다. 어쩌다 노부모를 뵈러 본가를 찾아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났다. 잠을 자고 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심한 세월은 마구 흘렀다. 시부모가 세상을 뜨신 뒤에도 큰 이모는 시골에서 홀로 사셨다. 그렇지만 큰 이모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다.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는데 큰 이모는 운명이거니 체념하며 사셨다. 그러다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교회와 목사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셨다. 엄격한 유교집안에서 잔뼈가 굵으신 큰 이모가 교회에 나가기까지 얼마나 고뇌하셨을 것인가? 작은 부인에게서 낳은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큰 이모를 찾아와 며칠씩 놀다가곤 했다. 큰 이모는 그래도 남편의 핏줄이기에 정성을 다해 친아들처럼 그들을 보살폈다.
작은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형제는 큰 이모부가 세상을 뜨신 다음, 시골의 논밭과 집을 팔고 큰 이모의 거처를 도시로 옮겨드렸다. 도시에서도 역시 교회에 나가시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한 때는 시동생이 찾아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큰 이모는 그 이혼요청을 결연히 거절하셨다.
큰 이모는 평생 남을 미워하거나 남과 싸워본 적이 없는 분이다.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욕 한마디 하신 적이 없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천사였다. 아들이나 딸을 잉태해보지 못한 큰 이모는 그렇게 사시다 고희를 넘긴 뒤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느 해 가을 J선배 댁을 찾은 적이 있었다. 누런 늙은 호박이 몇 개 거실에 쌓여 있었다. 보기도 좋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내가 그 호박에 눈독을 들이자 그 선배는 호박씨 한 주먹을 내게 건네주었다. 스스로 호박씨를 심고 가꿔서 늙은 호박을 만들어보라는 의미였다. 그 호박씨를 겨우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심었다. 그 호박씨도 애호박 하나 매달아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호박씨는 나를 잘못 만나서 슬프게 생을 마친 것이다.
그 호박씨를 가지고 귀가할 때 나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J선배 댁에서 보았던 늙은 호박이 눈에 아른거렸었다. 호박이 민들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더라면 좋았으련만….
나는 요즘에도 호박을 보면 내가 심었던 그 불행한 호박씨가 생각나고, 그 호박씨를 떠올리면 천사처럼 살다 가신 큰 이모가 마냥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