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2 18:02
애국지사 최제학(崔濟學) 기념비 앞에서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신팔복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목동마을 삼우당엔 습재(習齋) 최제학(崔濟學) 선생의 애국지사 기념비가 있다. 선생의 공적이 담긴 비문(碑文)을 살펴 봤다.
선생의 본관은 탐진으로 아버지 최성호(崔成鎬)와 어머니 흥덕 장(張)씨의 차남으로 고종 19년(1882년 3월)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에게 배우고, 간재(艮齋) 전우(田愚),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당대 여러 유학자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과 백성의 계도에 나섰던 올곧은 성격의 대학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지역 강회에 참석하면서 알게 되어 정읍 무성서원으로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고 가르침을 받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침탈 야욕이 본격화 되자 이에 통분한 습재는 이듬해 정월에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과 함께 스승인 면암의 의병계획에 동참하고 의견도 진언했다. 마침내 면암의 서신을 정읍 산내에 은거 중인 전 낙안군수 돈헌 임병찬을 찾아가 전달하고 승낙을 받았다. 2월 말, 돈헌은 태인에서 의병 활동 주도 세력을 규합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다. 습재는 곧 면암을 이곳 삼우당으로 모시고 와서 약 한 달 동안 구국을 열망하는 선비들에게 연락했다. 이곳 주서(注書) 이호용과 장수태수 정휴탁, 임실태수 조규하, 운봉주서 박봉양, 영남면우 곽종석, 화개 강두령 등과 뜻을 모았다.
습재는 다시 면암을 모시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윤4월 8일에는 면암과 동행하여 담양 용추사로 가서 송사 기우만을 비롯한 남도 유림 50여 명과 만나 의병 계획을 세웠다. 동맹록을 작성하여 서명하고 호남의 각 고을에 보내 동참을 호소했다. 드디어 1906년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지사(志士)들이 집결하여 봉기하니 호남 최초의 창의구국결의였다. 이때 일광(一狂) 정시해는 중군장으로 지휘에 가담했고, 25세인 습재 최제학은 소모장 직을 맡아 병장기와 군수물자를 수집하고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의병은 거침없이 태인과 정읍을 거쳐 내장산에서 쉬고 순창으로 진군했다. 관아를 점령하니 무기와 병력이 증강되었다. 500여 명이 넘는 의병들이 모였다. 다시 곡성으로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하였고 소총과 화약 등을 보강하여 전력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고종의 선유 조칙을 면암에게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순창으로 돌아왔다. 신예 무기로 무장한 왜병에 맞서 싸우다 중군장 정시해가 순국했고 많은 의병이 죽었다. 결국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 전주·남원의 진위대와 왜병 연합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때 면암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습재 선생을 포함한 12명이었다. 이들 의사는 왕명으로 체포되어 다음 날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헌병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김기술 · 문달환 등은 석방되었고, 면암 최익현은 3년, 돈헌 임병찬은 2년, 습재 최제학과 수남 고석진은 4개월의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습재는 10월 25일 석방되었고 면암과 돈헌이 8월부터 대마도에 끌려가 유배되었음을 알았다. 먼저 풀려난 돈헌으로부터 면암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은 습재는 무주를 거쳐 영동까지 걸어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고석진과 면암의 큰아들 영조를 만나 대마도로 가서 면암을 극진히 병간호를 했고 차도가 있어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 면암은 왕에게 유소(遺疏)를 남기고 12월 말일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다시 부산으로 가서 정성껏 초상을 치렀다.
습재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고 활동은 제한되었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 윤자신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국을 한탄하며 방황하다가 일본 순사의 감시를 피하려고 1915년 가을에 하동군 청암면 학동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중국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고 다니다가 하동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어 20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 소식을 듣고 광주로 가다 또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고 50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습재는 64세의 나이로 해방을 맞았다. 만년에는 면암의 사적을 수집하고 보완하여「일성록」이라 이름 지었으며, 또 성묘도(聖廟圖)라는 책을 편술하였다. 1959년 가을 병을 얻어 9월 10일 하동의 사동(寺洞) 집에서 향년 78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한 많은 세월을 살고 가신 습재 최제학(1882~1961) 선생에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습재 선생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을 사셨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의 개화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조정은 당쟁에 휘말려 어지럽고 나약해지기만 했다. 수구파와 개혁파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말았다. 탐관오리가 많아지고 충신들은 낙향했다. 관리들은 부패했고 백성은 암울한 생활에 빠져들어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이웃한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갈팡질팡하는 조선의 틈새를 노려 끼어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일본의 야욕은 점점 커졌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키더니, 동학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해준 대가로 왕권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청나라 군대와 시비를 걸어 결국 청일전쟁을 벌여 승전하니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노골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틈타 명성황후를 시혜한 을미사변을 일으켜서 고종을 더욱더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국내 정세는 점점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학문을 익힌 선비라면 반드시 나랏일을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고 핍박받는 생활이 될 것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 선뜻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선생께서는 구국운동에 의연히 궐기하셨다. 숭고한 정신에 감동하며 고개를 숙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2020. 3. 11.)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인터넷 백과사전.
습재실기(習齋實記) 유고집(1989년 진안향토사연구회 황안웅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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