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6 15:59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250515/1564598
하나의 밀알이 되어
이희숙
올해는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지 140주년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태어난 손주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우리 고유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민속촌과 박물관 등을 방문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선교사 145명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 묘지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분들의 자취를 둘러보며 일일 성지 순례길에 오른 것이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그들이 뿌린 씨앗으로 인해 놀라운 복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는가. 그들은 낯선 얼굴로 조선의 밀알이 되어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 후 캐나다 한카 문화예술원 <조선에 등불을 밝혀라!> 공연을 위한 대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선교사님들이 뿌린 헌신으로 나 역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흔쾌히 응했고, 보도자료와 기록을 찾아보았다.
19세기 일제 강점기, 조선 땅은 어둠과 가난에 묶여 희망이 없었다. 민비 시해 사건 후,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는 고종을 일본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서양 의술을 도입해 의사와 선교사로서 조선 독립을 도왔다. 또한 언더우드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에비슨 박사를 조선 의료 선교사로 초청하여 제중원 원장으로 추천했다.
에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의료 선교에 관해 강연하며 조선에 서양식 병원과 의사 양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결과 1902년 스탠다드 오일의 대주주였던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가 기부한 1만 5천 달러가 밑거름이 되어 한국 최초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황제만을 위한 제중원을 옮겨 백성에까지 닿는 병원 설립이라고 하니 의미가 크다. 더불어 의전을 설립하여 1회 졸업생 일곱 한인 의사를 배출했다. 그 중 에비슨에게 장티푸스 치료받은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의전에 입학하여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한인 첫 의사로서 북간도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 주역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은 약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서 어려운 이웃에게 박애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보여줬던 신앙심은 몸과 마음을 바쳐 낮은 곳으로 향하는 행동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였으며 복음 전도의 도구가 되었다.
에비슨의 제자 스코필드 박사는 3.1 만세 운동을 돕고 취재했다. 또한 독립선언문에 참가하여 빼앗긴 조선의 주권을 세계에 알리었다. 그 당시 산모 메리 테일러의 침대에 감추었던 독립선언서가 AP 통신원 남편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발견되었고, 1919년 3월 뉴욕타임스에 ‘한국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올해 뉴브론스윅 신학교 후원으로 ‘언더우드 콘서트’가 미국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열렸다는 기사를 접했다. 우리 후세들의 세계를 향한 선교 열정을 지켜볼 수 있다. 며칠 전 딸이 파나마 선교를 다녀왔다. 찍어온 영상을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불모지 정글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강물에 연결한 파이프에 정수기를 설치해 식수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난날 조선이 받았던 사랑의 자취와 같을 터. 지구촌 곳곳에서 어려운 자를 살피고 섬김으로써 기적을 이루어 가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수필) 하나의 밀알이 되어
이희숙
올해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지 140주년이다. 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 이후 내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어둠에 갇혀있던 우리 민족은 비로소 밝은 빛의 세계로 나왔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태어난 손주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우리 고유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민속촌과 박물관 등을 방문해 체험케 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곳, 마포 한강 변을 따라 가면 절두산 순교 성지가 있다. 어둠 가운데 있던 민족의 횃불이 되어준 선교사 145명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 묘지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분들의 자취를 둘러보며 일일 성지 순례길에 오른 것이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그들이 뿌린 씨앗으로 인해 놀라운 복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는가. 그들은 낯선 얼굴로 조선의 밀알이 되어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 후 캐나다 한카 문화예술원 <조선에 등불을 밝혀라!> 공연을 위한 대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선교사님들이 뿌린 헌신으로 나 역시 기독인으로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흔쾌히 응했고, 보도자료와 기록을 찾아보았다.
거슬러 올라가 1866년 25세 영국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 무장된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선교지에서 임신한 아내와 기다리던 태아를 잃었고, 그 슬픔은 복음을 전하게 하는 준비와 훈련 과정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 백기를 들고 한문 성경책을 전했다. 베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칼을 잡은 사람에게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라고 사랑을 전했고, 그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 생겨났다. 그를 찔러 죽였던 박춘권은 나중에 회개하고 평양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일제 강점기, 조선 땅은 어둠과 가난에 묶여 희망이 없었다. 민비 시해 사건 후,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는 고종을 일본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서양 의술을 도입해 의사와 선교사로서 조선 독립을 도왔다. 그를 통해 한국 초기 기독교를 보급하고 교육과 사회에 많은 개혁과 변화를 불러왔다. 그분뿐만 아니라 아내, 아들, 며느리, 손자,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위해 생명을 바쳤고,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묘지가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에비슨 박사를 조선 의료 선교사로 초청하여 제중원 원장으로 추천했다.
에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의료 선교에 관해 강연하며 병원이 없는 조선에 서양식 병원과 의사 양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결과 5천 명 관중이 감동의 박수를 보냈고, 1902년 스탠다드 오일의 대주주였던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가 기부한 1만 5천 달러가 밑거름되어 한국 최초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황제만을 위한 제중원을 옮겨 백성에까지 닿을 수 있는 병원 설립이라고 하니 의미가 크다. 더불어 의전을 설립하여 1회 졸업생 일곱 한인 의사를 배출했다. 그 중 에비슨에게 장티푸스 치료받은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은혜를 갚고 사람답게 살겠다며 의전에 입학하여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한인 첫 의사로서 북간도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 주역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은 약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서 어려운 이웃에게 박애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보여줬던 신앙심은 몸과 마음을 바쳐 낮은 곳으로 향하는 행동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였으며 복음 전도의 도구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돌 때 ‘청결’을 계몽하며 몸소 사랑의 손길을 폈다. 언제나 소외된 자들이 신앙과 배움을 통해 사회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었고, 많은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다.
에비슨의 제자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 세균학과 교수로서, 서울 탑골 공원에서 일어난 3.1 만세 운동을 돕고 취재했다. 또한 독립선언문에 참가하여 역사의 목격자로서 빼앗긴 조선의 주권을 세계에 알리었다. 그 당시 산모 메리 테일러의 침대에 감추었던 독립선언서가 AP 통신원 남편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발견되었고, 1919년 3월 뉴욕타임스에 ‘한국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더불어 일본이 수원 제암리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어 총과 칼로 목숨을 빼앗고 마을을 불태운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방에 있던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 등을 만났고, 고문으로 말하기조차 어렵고,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매켄지는 3·1 운동을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으로 출판하여 온 세상에 알게 했다.
3.1운동에 대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태도가 달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일제와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 지배에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사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도왔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외국인 선교사가 8명이었는데 그중 4명이 캐나다 선교사였다. 게다다 고향인 노바스코샤와 기후가 비슷하여 배정받은 함경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최초 여선교사로서 여성을 위한 이화 학교와 병원을 세워 여자 지도사를 양성했던 메리 스크랜튼이 있고, 평생 독신으로 여성을 위해 살다 간 푸른 눈을 가진 한국교회의 어머니 서서평이 있었다. 그녀는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병든 이웃, 한센 병자들을 섬기며 과로와 영양실조로 숨졌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한국 개신교 역사를 되돌아보며 세계 흐름에 무지했던 조선이 안과 밖으로 위험을 겪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교육과 계몽을 통해 근대화와 사회개혁의 촉매가 되었다. 순교하기까지 오직 차별 없는 사랑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며 뜨거운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자기 생명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안다.
올해 뉴브론스윅 신학교 후원으로 ‘언더우드 콘서트’가 미국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언더우드 4세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는 기사를 접했다. 요사이 우리 후세들의 세계를 향한 선교 열정을 지켜볼 수 있다. 부활절 방학 동안 둘째 딸이 학생들과 파나마 선교를 다녀왔다. 찍어온 영상을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불모지 정글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강물에 연결된 파이프에 정수기를 설치해 식수를 해결해 주는 모습을 보았다. 지난날 조선이 받았던 사랑의 자취와 같을 터. 지구촌 곳곳에 사랑의 빛을 밝히고 있다.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고 어려운 자를 살피고 섬김으로써 작은 예수의 기적을 이루어 가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