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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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용서 받고 싶은 사람에게

2022.11.07 23:08

조형숙 조회 수:47

춘식이는 사랑이 너무 힘들어 숨이 막힌다. 몇 년 동안 보냈던 편지와 선물더미를 한아름 돌려받아 가슴에 안고 돌아 나오는 길은 허망했다. 어스름한 저녁별을 헤이지도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민망해 했다. 종아리의 힘이 풀려 걸음을 옮겨 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 공원 벤치에는  밤이슬이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흐리게 비쳐오는 가로등의 형광빛은 춘식이의 마음을 아픔으로 가득 채운다. 서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아우성을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비맞은 고양이가 야웅거리며 지나가 공원안의 도서관 창문을 순식간에 넘는다. 숙이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멀어지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단발머리였던  소녀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바람 앞에 웃고 있다. 결코 놓을 수 없는 순간들이 아른거려 어쩔바를 몰라했다.

"집에 가는 길은 많이 어두웠습니다. 불 빛 찾아 공원 벤치에서 숙이가 안겨준 보따리가 무엇인지 풀었습니다. 
 하나하나 꺼낼 때 큰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은 헤어지고  버려지는 아픔에 많이많이 울며 온 밤을 그렇게 있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숙이라는 꽃이 있어 나는 나비가 되었습니다. 숙이가 아니면 나의 날개짓도 허망합니다. 숙이가 아니면 나비가 날아야 할 아무 의미도 이유도 없습니다." 
꾸러미를 전해주고 난지 보름후에 우편으로 도착한 춘식의 편지였다. 
 
교회 오빠인 춘식은 숙이를 귀여워했고 주보 만드는 일을 맡았을 때 많이 가르쳐 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을 하면서부터 책을 많이 보내주었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입시문제집을 꾸러미로  보냈다. 생일카드, 크리스마스카드와 선물도 보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 받은 금메달을 보냈다. 주산경기대회에서 받은 상장과 상품을 우편으로 보냈다. 나중에는 우등상, 개근상, 졸업장까지 보냈다.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해 한 것이니 다 너에게 준다."라고 쪽 편지도 넣었다. 
 
숙이에게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받기 싫었다. 처음에는 무엇일까 펴보기도 했으나 후에는 아예 뜯지도 않고 연탄 광에 박스를 가져다 놓고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차마 버리기는 미안했다. 너무 정성스러운 것이니 나중에 돌려주리라 생각했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릴 때 쯤 부터 춘식이는 숙이네  대문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자기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지나갔다. 내다 보라는 신호인데 나가지 않았다. 숙이네는 동네에서 드문 이층집이었다.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도 궁금했다. 이층에 올라가 커튼 사이로 빼꼼히 내려다보면 춘식이는 집 주위를 이쪽 저쪽 왔다 갔다 하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골목 멀리 쯤에 서서 이층을 올려다 보고 있다. 혹시 춘식이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웠다. 다시 집 가까이로 올 때 커튼을 얼른 닫고 불을 껐다. 그리고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밖의 사정을 언니가 이야기 했나보다. 엄마가 그 사람을 보기 원하셨다. 
"그 청년 좀 들어오라 해라" 
대문을 열고 나가니 춘식이는 환하게 웃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숙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가 좀 보자하셔요"
대문 안으로 들어와 현관 오른편에 안방으로 들여 보냈다. 두 살 위의 언니와 나는 호기심에 귀를 문에 바짝 부치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잘 들어봐요 청년!"
 "우리아이는 아직 어리고 공부도 마쳐야하니 청년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그 후에 만나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요? "
"그 때가 되면 내가 허락할께요" 
 작은 대답소리가 났다.
 "네" "네"
방을 나와 고개를 떨구고 대문을 나서는 그를 불렀다. 
 
"잠시만 기다려요. 드릴게 있어요" 
"무엇일까"기대하는 표정으로 잠시 돌아섰다. 
"이거 드릴게요. 가져 가세요" 숙이가 큰 꾸러미를 품에 안겨 주었다.
 
춘식이가  골목길로 사라진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용서받고 싶었으나 그 후로 만날 수 없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며 사는지 도무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등지고 멀리 갔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미안함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아있다.  그 매듭을 풀고 싶다.  가끔은 하늘 밑 어디엔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 사랑도 흘러가고 상처도 흘러간다. 주기만 하는 사랑은 너무 지친다. 그러나 받기만 하는 사랑도 편치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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