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거부하는 예술 / 진중권

2004.09.01 13:42

강학희 조회 수:204 추천:4





        소통을 거부하는 예술[진중권]






예술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20세기에 들어와 예술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대상성을 잃고, 음악은 불협화로 가득 차고, 시에서는 의
미가 파괴되고,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예로부터 예술은 어차피 '소수의 것'이었만,
현대 예술이 처한 상황은 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제법 경제적, 문화적
여유가 있는사람들, 그리하여 CD로 바흐를 듣고, 고호의 브로마이드를 사는 사람
들에게도 현대예술만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베토벤의 음악도 제대로 이해되
는 데에 100년이 걸렸다'며, 이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
다. 하지만 현대예술이 탄생한지 어언 백 년, 지금까지도 이 상황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단지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가장 큰 이유는 현대예술의 원리 자체에 있다.
과거에는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에 공유되는 '코드'(code)가 있었다. 예술가는 이
코드를 이용해 '메시지'(message)를 만들어 냈고, 관람자는 예술가와 공유한 이
코드를 바탕으로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해독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과거에도 자디잔 혁신은 늘 있었겠지만,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 '코드'가
등장하는 것은 수백 년에 한 번 일어나는 큰 사건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술은
'새로운 것'의 창조로 여겨지나, 과거의예술은 외려 '낡은 것'을 추구했다.
예컨대 유럽의 예술사를 지배하는 대(大)이론인 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방'을 목표
로 삼았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다르다. 현대예술은 '메시지'가 아니라 '코드'를 창조하려 한다.
가령
분석적 입체주의 시절의 피카소와 브라크를 생각해 보라. 파편화한 이들의 캔버스는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새로운 '코드'를 구현한다. 하지만 당시 이런 류의 작품을
하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이들 외에 수많은 화가들이 비슷한 작업을 했다. 근데
왜 그들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간단하다. 한 걸음 늦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코드'
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단지 피카소와 브라크의 '코드'를 이용해 '메시지'를 만들
었을 뿐이다. 이렇게 남이 창조한 코드로 메시지나 만드는 작가들을, 미술사는 오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뒤샹의 경우는 더 극단적이다. 그는 아예 메시지(=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변기는 그가 만든 게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것이다. 그가 만든 게 있다면
오직 '코드' 뿐이다. 말하자면 그 기행으로써 그는 범상한 사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코드', 즉 예술의 새로운 정의를 창조한 것이다. 만약 내가 또 하나
의 변기를 들고 미술관을 찾는다면, 그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 설사 그 변기가 뒤샹
의 것보다 비싸고 세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내 변기는 미술관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다. 왜? 그 변기로써 내가 창조할 '코드'가 이미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는
두 개의 변기는 너무 많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칸트는 "천재란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법칙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천재는 예술의 입법자로서, 남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 모방
하게 한다. 현대예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진정한 예술가는 남의 언어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며,남의 코드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남
으로 하여금 제 코드를 따르게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천재 혹은 예술가가 만들어
내는 그 코드 혹은 언어가 너무 새로워 미처 대중과 공유될 틈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과거에 예술의 본질은 '소통'(communication)에 있었다.
칸트는 '공감'(sensus communis)을 예기한다.
한 마디로 미적 판단 혹은 예술체험은 우리 모두가 나눠 갖고 있는 어떤 공통적

심리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어 보편성을 띠며, 따라서 타인에게 전달하여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예술체험은 이렇게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것이었다.
예술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미적 취향을 세련되게 만들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레
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었다. 이게 근대예술의 목표
이자 근대 미학의 과제였다.


그런데 현대예술은 이 '소통'을 거부한다.
한 작품이 곧바로 대중에게 이해가 된다면, 그것은 그가 새 '코드'를 창조하는 데
에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대중을 도발하지 못하는 작품은 이미 대중에게 익숙
한 낡은 코드에 따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진정으로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냈다면, 내 작품은 대중에게 이해될 수 없고,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어야 한다.

제로 19세기 프랑스의 초기모더니스트들은 제 작품이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들의 작품을 읽고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 작
품에 대한 중대한 모독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시 문학계를 지배하던 부르주아적인 고전주의 문인과 프롤레타리아적 사실주의
문인들을, 이들은 싸잡아 '대중'이라 불렀다.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작업복을
입은 부르주아"이며, 어느 계급이든 어차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똑
같이 '대중'일 뿐이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현대 사회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
리아 같은 경제적 계급이 아니라, 문화를 이해하는 '엘리트'와 그것을 이해하지
못는 '대중'으로 이루진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 예술이 가진 이 엘리트주의적 특
성 역시 예술과 대중의 소통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의 소통 불가능성을 외려 미적 축복으로 여긴다.
그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사물의 개별적 고유성들을 지우고,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동질화하는 폭력적인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생산마저도 동일한 '코드'
에 따른 대량생산이 된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속에서 저항을 하기 위해
현대예술은 사회와 '코드'를 공유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난해해지기로 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의 획일성에 저항하기 위해 현대예술은 "이를 악 물고" 난해
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엘리트주의자가 대중예술을 저속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예술의 소통적 성격을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에 일각에서는 현대 예술이 다시 소통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얘기도 흘러나
오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오늘날 예술이 아방가르드를 포기하고 코드
의 동일성에 입각한 대중예술로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처럼 적당히
아방가르드적 성격에 대중성을 섞어 넣는 절충주의가 해답이 될 수도 없다. 대중
에게 익숙한 코드에 대중이 견딜 만한 분량의 새로움을 섞는 것 자체가 이미 대중
예술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화산업은 대중이 견딜 만큼의 도발을
요구한다.


예술운동으로서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종언을 고했을지 모르나, 예술의 정신으
로서의 아방가르드는 아직 살아 있다. 오늘날 예술의 과제가 우리에게 익숙한 시
각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데에 있는 한, 소통의 노력을 기울
여야 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언어가 본
질적으로 타자의 언어, 개별자의 언어라면, 예술에 우리가 구사하는 동일자의 언
어, 보편자의 언어를 따르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가 그의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이다.


현대예술이 어렵다 하나, 다른 한편 우리는 벌써 피카소를 이해하고, 클레를 이해
하고, 칸딘스키를 이해한다. 한때 기이했던 그들의 언어는 이미 우리의 언어가 되
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예술의 난해함
을 결성태로 볼 게 아니라, 그 불편함 속에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찾아야
할 게다.

현대예술의 위험은 그것이 난해하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그 난해함을 틈타서
스며드는 '사소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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