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 책방에 얽힌 추억』에서 가져옵니다.
열차에 얽힌 추억
이 승 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내가 자라난 집은 오막살이는 아니었지만 기찻길 바로 옆이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집이 흔들렸다. 방바닥이 우르르 흔들려 그 진동이 엉덩이로 느껴졌고, 수저가 조금 흔들렸고, 내 어린 마음은 마구 후들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에 이사를 간 기찻길 옆의 집은 수돗물과 전깃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우리 집’이었지만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날이 지날수록 혼을 빼놓는 기차의 굉음에는 익숙해져갔으나 방바닥의 진동은 내 마음을 안주할 수 없게 했다. ‘흔들릴 때마다 한잔’이라는 제목으로 쓴 감태준 시인의 시도 있었고, 이 시의 제목이 좋아 작가 박양호는 자기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적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애가 흔들릴 때마다 술을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집이 주는 유일한 즐거움은 누이동생과 둘이서 스쳐 달려가는 열차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객차에 빽빽이 탄 수많은 사람 중 꼭 서너 명은 우리 남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누이와 나는 그게 왜 그리 즐거웠던지.
“야, 네 사람이 손 흔들었다.”
“아이라. 다섯 사람이다.”
“햐, 오늘이 최고로 많다. 그자?”
눈 깜짝할 새 꽁무니를 보이며 달아나는 특급열차는 손을 흔들어도 별 소득이 없지만 완행열차는 환영에 응해주는 상대방의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예쁘게 생긴 누나가 손을 흔들어주는 게 마냥 즐거웠으니, 누이는 잘생긴 오빠가 손을 흔들어주는 게 마냥 좋았을 것이다.
열차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미지의 어느 곳으로부터 미지의 어느 곳으로 실어 날랐다. 열차는 수많은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사연을 싣고 밤이건 낮이건 알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라고 하는데 세계는 그럼 얼마나 넓을까. 미지의 어느 지역에서 미지의 사람들은 어떤 양태로 살아가고 있을까.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고 잡지도 흔하지 않았던 당시여서 나의 이런 궁금증은 풀 길이 없었다. 충청도 말도, 전라도 말도, 제주도 말도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라는 것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부끄럽게 여겨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 경계를 넘어선 것은 딱 두 번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의 경주 수학여행과 중학교 때의 부산․충무 수학여행이었으니, 도회지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모르는 것은 산골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집에서 몇 년을 살자 기차의 굉음은 낮에는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해졌다. 그러나 한밤에는 달랐다. 고입 준비로 밤늦도록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야간열차는 수시로 내 마음을 허공에 띄워놓고 지나갔다. 열차는 수학문제를 풀던 연필을 놓게 만들었고, 방바닥에 누워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게 하는 것이었다. 열차는 내 마음을 객차 한 구석에 실어 하룻밤에도 몇 번씩 어느 곳으론가 달려갔다.
왜 나는 헤세의 소설에 나오는 크눌프처럼 미지의 땅으로 떠나지 않는가. 왜 나는 J. D. 샐린즈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처럼 썩은 기성세대에 반항하지 않는가. 왜 나는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처럼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가. 왜 나는 생텍쥐페리처럼 모험에의 길을 떠나지 않는가. 이 책 저 책을 부모님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읽다보니 시험 성적에 연연하는 나 자신이 가련해지고 석차를 중시하는 주변의 어른들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시험에 의한 학급․학년에서의 우등, 시험에 의한 일류고교․일류대학으로의 입학, 졸업장이 보장하는 출세, 안락한 삶……
이 모두를 향한 갈망은 책에 몰입할수록 줄어들어 갔다.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런 잡념 때문에 성적은 꾸준히 하강했지만 시험을 몇 달 앞두고 피치를 올린 덕분에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고교에서의 억압은 중학교 때와는 또 달랐다. 일류대 입학생 수로 그 고등학교의 수준이 평가되는 탓도 있었지만 바뀐 문교부 정책의 탓이 컸다. 그 전 해부터인가 대도시 고등학교의 평준화로 김천은 비평준화 지역이 되었다. 그 바람에 내가 진학한 김천고등학교는 느닷없이 지방의 명문교가 되었고(그 전부터 꽤 명문교로 통하기는 했지만), 그래서인지 타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와 그 지방에서는 고입 재수생이 양산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강조하는 그놈의 입시는 3년이나 남았는데도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대화가 되지 않는 완고하신 부모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기찻길 옆의 집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승하야, 니 형은 서울 법대에 들어갔는데 니는 와 그 모양이고?”
“이놈아야, 그래 갖고 나중에 대학에 가겠나? 아부지 가라는 대로 육사에 가거라.”
“문방구점 이거 누구한테 물려주겠노? 니가 고등학교 나와서 바로 맡아서 할 생각 하고 있거라. 니는 붙임성이 있어서 장사를 하면 잘할 기다.”
이런 말을 사흘에 한 번꼴로 들으니 공부할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고, ‘자수성가’란 말이 크나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말, 나는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사슬을 끊을 결심을 하고 새벽열차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서울이라는 공룡을 향해 돌멩이 하나를 들고 달려든 격이었다. 무단가출이었고, 무작정 상경이었다. 구두닦이든 식당 종업원이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공부하고 사회 경험도 무궁무진 쌓으리라…… 철딱서니 없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절실한 소망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첫 가출은 떠날 때의 계획과는 달리 몇 주 못 버티고 끝났다. 차비와 1개월 치의 독서실비, 매 끼니의 식사비로 일주일 만에 돈이 떨어져 대학 다니는 형에게 구조를 요청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이미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형한테 연락을 취해두었던 터라 답삭 잡혀 내려오고 말았다. 그간에 신문에 얼굴이 나 고향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수치심 때문에 바깥에 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간혹 초등학교․중학교 때의 친구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왜 가출해 신문에까지 났느냐고 물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내 생각이나 집안 문제를 간단히 얘기할 수도 없고 해서 “학교에 다니기가 싫어져서……” 하면서 얼버무리곤 했다. 그럼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승하 넌 모범생이었잖아.”
모범생이 행한 두 번째의 가출은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아들의 귀가를 호된 꾸지람으로 맞으신 어머님과, “자퇴는 안 된다, 전학을 하자”고 하시며 학적을 대구로 옮기신 아버지의 몰이해 때문에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맹장이 나의 귀가를 종용하였다. 부산의 독서실에서 책상에 엎디어 자다 오른쪽 아랫배가 너무 아파 맹장염인 줄 알고 겁을 잔뜩 먹고 귀가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맹장염은 아니었다.
법학이 아닌 딴 학문을 하겠다는 형님 덕분에 엉망진창이 된 집이 지겨워 행한 또 한 차례의 가출. 실패한 인생에 대한 좌절감으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가족을 학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아버지, 가장인 당신이 집에다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수시로 부르짖는 데 대한 절망감 때문에 시도한 네 번째의 가출. 황금의 날들은 너무 짧아 1975년의 3월과 4월 이후의 나는 가출소년이 아니면 검정고시 준비생이었고, 대입 준비생이 아니면 휴학생이었다.
이렇듯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구겨진 노트가 되고 말았다.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5년 세월을 이 도시 저 도시 뒷골목만 골라 배회하며 보냈으니 버려진 청춘에 축복 있기를. 3년 간 교복을 입은 내 동년배의 친구들에게도 축복 있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새벽열차와 야간열차의 그 을씨년스러움을.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집과, 정든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온갖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을 뒤로 하고 떠나던 날의 서글픔을. 무엇보다 내 누이…… 어릴 때 너무나 자주 울고, 작은오빠가 달래주기 전에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던 그 누이가 잠들어 있는 집을 나는 도합 네 번 버렸다.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겠노라, 자수성가하겠노라 이를 사리물며 결심은 했지만 눈물이 어리어 옴은 난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 밖 풍경은 안개 내린 날처럼 그렇게 뿌옇게 기억되는가. 아니, 미명 때문이었을 게다.
미지의 땅은 두렵게 마련이다. 두 번째로 뛰쳐나갔던 날은 부산 바닥을 헤매었다. 가출의 목적지가 서울 아니면 부산이었던 것은 몇 년을 살아도 나를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 안 나타날 정도의 대도시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걷다 보니 잘못 들어왔는지, 야밤에 ‘내국인 출입 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는 술집 골목을 취한 흑인들 사이에서 헤매었을 때는 영화 속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자정 넘은 시각의 역 대합실, 독서실에서의 새우잠, 50원짜리 크림빵으로 때우던 허기, 차마 고개 들고 쳐다볼 수 없었던 등교 길의 교복 입은 여학생들. 흑인 교사가 미국식 똥통 학교에 부임해 와서 불량학생들을 교화해나가는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을 대낮에 3류 극장에 앉아서 보다 그놈의 학교가 왠지 그리워 울고 만 일도 기억에 새롭다.
다소 불량하고 순탄치 못했던 청소년기를 보낸 결과 시인이라는 관을 쓰게 되었다면 이것이 내게는 영광의 월계관일까 저주의 가시관일까. 어떻든 나는 시집 『사랑의 탐구』에서 유년 시절의 어느 밤을 한 편의 시로 노래함으로써 열차에 얽힌 을씨년스런 추억을 조금은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자라면, 우리가 훗날 부모가 되면
우리를 낳아주신 두 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누이야, 그런 날이 올까
어려운 시절이구나 너나 나나 아직 어려 이 시절이 왜 어려운지 모르고
눈뜨고 있을 때 내 눈은 늘 겁에 질려 있지 잠이 들면 나쁜 꿈
늘 누군가에게 발길질 당하고 있지 퍽퍽 두들겨 맞고 있지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말아요 다시는 울지 않을게요
너처럼 용서도 빌지 않고 다만 이 악문 채 맞고 있지 눈물 철철 흘리며
몸을 한껏 움츠려 얼굴을 두 팔로 감싸라 그래야 흉터가 안 생겨
네가 잘못한 것은 울고 싶을 때 운 것뿐 그러니 빌지 말아
어려운 시절이구나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면
무릎걸음으로 오빠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얘기해주지 않으련 누이야
기다려야 한다 그날도 다름없이 어머니는 오래 통곡하시고
엎어진 밥상 흩어진 밥알들이 깔깔 웃었지
깨어진 거울 조각을 둘이서 치우고 나면 밤이 깊어 옆집 기웅이도 잠들고
쓰르람 쓰르람 쓰르라미 소리
쓰러져 쓰라린 가슴 쓸어내리는 어머니를 잠재우자
몇 알의 신경안정제로 우리, 어머니를 잠재우자
온갖 저주가 퍼붓기 전 얼른 기찻길 옆으로 손잡고 가
치면 튈 것 같은 달을 바라보자
철로변 풀섶에 앉아 발그레한 공을 바라보자
동화 속에서만 나는 자유롭고 조금도 안 무섭고
우리 어서 어른이 되면 좋겠다 그자? 누이는 그제야 환히 웃고
저 달이 떡이라면 오빠 먹고 나도 먹고
저 달을 따오면 온 뜨락 대낮 같겠네
왜 하늘에 달이 있을까 왜 사람들은 살아야 할까
기차를 타고 이 밤에 다 어디로들 갈까
우리도 어디론들 떠났으면 좋겠다 그자? 누이야, 기다려야 한다
더 어려운 시절이 와도 나는 참을 수 있을 거야 일어설 수 있을 거야
꼬박꼬박 조는 누이를 등에 업고 일어서면
눈앞에는 마침내 긴 강이 흐르고, 가자
……나는 아버지가 더 불쌍해……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마
영아, 어서 집으로 가자.
ㅡ졸시 「동화」 전문
(28세, 10월)
열차에 얽힌 추억
이 승 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내가 자라난 집은 오막살이는 아니었지만 기찻길 바로 옆이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집이 흔들렸다. 방바닥이 우르르 흔들려 그 진동이 엉덩이로 느껴졌고, 수저가 조금 흔들렸고, 내 어린 마음은 마구 후들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에 이사를 간 기찻길 옆의 집은 수돗물과 전깃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우리 집’이었지만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날이 지날수록 혼을 빼놓는 기차의 굉음에는 익숙해져갔으나 방바닥의 진동은 내 마음을 안주할 수 없게 했다. ‘흔들릴 때마다 한잔’이라는 제목으로 쓴 감태준 시인의 시도 있었고, 이 시의 제목이 좋아 작가 박양호는 자기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적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애가 흔들릴 때마다 술을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집이 주는 유일한 즐거움은 누이동생과 둘이서 스쳐 달려가는 열차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객차에 빽빽이 탄 수많은 사람 중 꼭 서너 명은 우리 남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누이와 나는 그게 왜 그리 즐거웠던지.
“야, 네 사람이 손 흔들었다.”
“아이라. 다섯 사람이다.”
“햐, 오늘이 최고로 많다. 그자?”
눈 깜짝할 새 꽁무니를 보이며 달아나는 특급열차는 손을 흔들어도 별 소득이 없지만 완행열차는 환영에 응해주는 상대방의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 나는 예쁘게 생긴 누나가 손을 흔들어주는 게 마냥 즐거웠으니, 누이는 잘생긴 오빠가 손을 흔들어주는 게 마냥 좋았을 것이다.
열차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미지의 어느 곳으로부터 미지의 어느 곳으로 실어 날랐다. 열차는 수많은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사연을 싣고 밤이건 낮이건 알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라고 하는데 세계는 그럼 얼마나 넓을까. 미지의 어느 지역에서 미지의 사람들은 어떤 양태로 살아가고 있을까.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고 잡지도 흔하지 않았던 당시여서 나의 이런 궁금증은 풀 길이 없었다. 충청도 말도, 전라도 말도, 제주도 말도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라는 것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부끄럽게 여겨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 경계를 넘어선 것은 딱 두 번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의 경주 수학여행과 중학교 때의 부산․충무 수학여행이었으니, 도회지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모르는 것은 산골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집에서 몇 년을 살자 기차의 굉음은 낮에는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해졌다. 그러나 한밤에는 달랐다. 고입 준비로 밤늦도록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야간열차는 수시로 내 마음을 허공에 띄워놓고 지나갔다. 열차는 수학문제를 풀던 연필을 놓게 만들었고, 방바닥에 누워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게 하는 것이었다. 열차는 내 마음을 객차 한 구석에 실어 하룻밤에도 몇 번씩 어느 곳으론가 달려갔다.
왜 나는 헤세의 소설에 나오는 크눌프처럼 미지의 땅으로 떠나지 않는가. 왜 나는 J. D. 샐린즈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처럼 썩은 기성세대에 반항하지 않는가. 왜 나는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처럼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가. 왜 나는 생텍쥐페리처럼 모험에의 길을 떠나지 않는가. 이 책 저 책을 부모님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읽다보니 시험 성적에 연연하는 나 자신이 가련해지고 석차를 중시하는 주변의 어른들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시험에 의한 학급․학년에서의 우등, 시험에 의한 일류고교․일류대학으로의 입학, 졸업장이 보장하는 출세, 안락한 삶……
이 모두를 향한 갈망은 책에 몰입할수록 줄어들어 갔다.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런 잡념 때문에 성적은 꾸준히 하강했지만 시험을 몇 달 앞두고 피치를 올린 덕분에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고교에서의 억압은 중학교 때와는 또 달랐다. 일류대 입학생 수로 그 고등학교의 수준이 평가되는 탓도 있었지만 바뀐 문교부 정책의 탓이 컸다. 그 전 해부터인가 대도시 고등학교의 평준화로 김천은 비평준화 지역이 되었다. 그 바람에 내가 진학한 김천고등학교는 느닷없이 지방의 명문교가 되었고(그 전부터 꽤 명문교로 통하기는 했지만), 그래서인지 타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와 그 지방에서는 고입 재수생이 양산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강조하는 그놈의 입시는 3년이나 남았는데도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대화가 되지 않는 완고하신 부모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기찻길 옆의 집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승하야, 니 형은 서울 법대에 들어갔는데 니는 와 그 모양이고?”
“이놈아야, 그래 갖고 나중에 대학에 가겠나? 아부지 가라는 대로 육사에 가거라.”
“문방구점 이거 누구한테 물려주겠노? 니가 고등학교 나와서 바로 맡아서 할 생각 하고 있거라. 니는 붙임성이 있어서 장사를 하면 잘할 기다.”
이런 말을 사흘에 한 번꼴로 들으니 공부할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고, ‘자수성가’란 말이 크나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말, 나는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사슬을 끊을 결심을 하고 새벽열차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서울이라는 공룡을 향해 돌멩이 하나를 들고 달려든 격이었다. 무단가출이었고, 무작정 상경이었다. 구두닦이든 식당 종업원이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공부하고 사회 경험도 무궁무진 쌓으리라…… 철딱서니 없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절실한 소망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첫 가출은 떠날 때의 계획과는 달리 몇 주 못 버티고 끝났다. 차비와 1개월 치의 독서실비, 매 끼니의 식사비로 일주일 만에 돈이 떨어져 대학 다니는 형에게 구조를 요청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이미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형한테 연락을 취해두었던 터라 답삭 잡혀 내려오고 말았다. 그간에 신문에 얼굴이 나 고향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수치심 때문에 바깥에 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간혹 초등학교․중학교 때의 친구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왜 가출해 신문에까지 났느냐고 물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내 생각이나 집안 문제를 간단히 얘기할 수도 없고 해서 “학교에 다니기가 싫어져서……” 하면서 얼버무리곤 했다. 그럼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승하 넌 모범생이었잖아.”
모범생이 행한 두 번째의 가출은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아들의 귀가를 호된 꾸지람으로 맞으신 어머님과, “자퇴는 안 된다, 전학을 하자”고 하시며 학적을 대구로 옮기신 아버지의 몰이해 때문에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맹장이 나의 귀가를 종용하였다. 부산의 독서실에서 책상에 엎디어 자다 오른쪽 아랫배가 너무 아파 맹장염인 줄 알고 겁을 잔뜩 먹고 귀가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맹장염은 아니었다.
법학이 아닌 딴 학문을 하겠다는 형님 덕분에 엉망진창이 된 집이 지겨워 행한 또 한 차례의 가출. 실패한 인생에 대한 좌절감으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가족을 학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아버지, 가장인 당신이 집에다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수시로 부르짖는 데 대한 절망감 때문에 시도한 네 번째의 가출. 황금의 날들은 너무 짧아 1975년의 3월과 4월 이후의 나는 가출소년이 아니면 검정고시 준비생이었고, 대입 준비생이 아니면 휴학생이었다.
이렇듯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구겨진 노트가 되고 말았다.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5년 세월을 이 도시 저 도시 뒷골목만 골라 배회하며 보냈으니 버려진 청춘에 축복 있기를. 3년 간 교복을 입은 내 동년배의 친구들에게도 축복 있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새벽열차와 야간열차의 그 을씨년스러움을.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집과, 정든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온갖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을 뒤로 하고 떠나던 날의 서글픔을. 무엇보다 내 누이…… 어릴 때 너무나 자주 울고, 작은오빠가 달래주기 전에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던 그 누이가 잠들어 있는 집을 나는 도합 네 번 버렸다.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겠노라, 자수성가하겠노라 이를 사리물며 결심은 했지만 눈물이 어리어 옴은 난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 밖 풍경은 안개 내린 날처럼 그렇게 뿌옇게 기억되는가. 아니, 미명 때문이었을 게다.
미지의 땅은 두렵게 마련이다. 두 번째로 뛰쳐나갔던 날은 부산 바닥을 헤매었다. 가출의 목적지가 서울 아니면 부산이었던 것은 몇 년을 살아도 나를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 안 나타날 정도의 대도시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걷다 보니 잘못 들어왔는지, 야밤에 ‘내국인 출입 금지’란 팻말이 붙어 있는 술집 골목을 취한 흑인들 사이에서 헤매었을 때는 영화 속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자정 넘은 시각의 역 대합실, 독서실에서의 새우잠, 50원짜리 크림빵으로 때우던 허기, 차마 고개 들고 쳐다볼 수 없었던 등교 길의 교복 입은 여학생들. 흑인 교사가 미국식 똥통 학교에 부임해 와서 불량학생들을 교화해나가는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을 대낮에 3류 극장에 앉아서 보다 그놈의 학교가 왠지 그리워 울고 만 일도 기억에 새롭다.
다소 불량하고 순탄치 못했던 청소년기를 보낸 결과 시인이라는 관을 쓰게 되었다면 이것이 내게는 영광의 월계관일까 저주의 가시관일까. 어떻든 나는 시집 『사랑의 탐구』에서 유년 시절의 어느 밤을 한 편의 시로 노래함으로써 열차에 얽힌 을씨년스런 추억을 조금은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자라면, 우리가 훗날 부모가 되면
우리를 낳아주신 두 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누이야, 그런 날이 올까
어려운 시절이구나 너나 나나 아직 어려 이 시절이 왜 어려운지 모르고
눈뜨고 있을 때 내 눈은 늘 겁에 질려 있지 잠이 들면 나쁜 꿈
늘 누군가에게 발길질 당하고 있지 퍽퍽 두들겨 맞고 있지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말아요 다시는 울지 않을게요
너처럼 용서도 빌지 않고 다만 이 악문 채 맞고 있지 눈물 철철 흘리며
몸을 한껏 움츠려 얼굴을 두 팔로 감싸라 그래야 흉터가 안 생겨
네가 잘못한 것은 울고 싶을 때 운 것뿐 그러니 빌지 말아
어려운 시절이구나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면
무릎걸음으로 오빠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얘기해주지 않으련 누이야
기다려야 한다 그날도 다름없이 어머니는 오래 통곡하시고
엎어진 밥상 흩어진 밥알들이 깔깔 웃었지
깨어진 거울 조각을 둘이서 치우고 나면 밤이 깊어 옆집 기웅이도 잠들고
쓰르람 쓰르람 쓰르라미 소리
쓰러져 쓰라린 가슴 쓸어내리는 어머니를 잠재우자
몇 알의 신경안정제로 우리, 어머니를 잠재우자
온갖 저주가 퍼붓기 전 얼른 기찻길 옆으로 손잡고 가
치면 튈 것 같은 달을 바라보자
철로변 풀섶에 앉아 발그레한 공을 바라보자
동화 속에서만 나는 자유롭고 조금도 안 무섭고
우리 어서 어른이 되면 좋겠다 그자? 누이는 그제야 환히 웃고
저 달이 떡이라면 오빠 먹고 나도 먹고
저 달을 따오면 온 뜨락 대낮 같겠네
왜 하늘에 달이 있을까 왜 사람들은 살아야 할까
기차를 타고 이 밤에 다 어디로들 갈까
우리도 어디론들 떠났으면 좋겠다 그자? 누이야, 기다려야 한다
더 어려운 시절이 와도 나는 참을 수 있을 거야 일어설 수 있을 거야
꼬박꼬박 조는 누이를 등에 업고 일어서면
눈앞에는 마침내 긴 강이 흐르고, 가자
……나는 아버지가 더 불쌍해……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마
영아, 어서 집으로 가자.
ㅡ졸시 「동화」 전문
(28세,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