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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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

2023.04.14 23:51

양상훈 조회 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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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

                                                                                                                                   양상훈

  일제강점기 1903113102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 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한인이민자들은 악착같이 적응하여 초대교회를 건립하는데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조국독립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여 상해임시정부에도 독립자금지원을 하는 등 민족정체성에 모범이 되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 낮 설고 물 설은 이국땅 미국에서 시작된 이민의 삶이 올해 12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한인들이 이곳에서 120년 동안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주한인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여 한인이민자들을 배려해준 미국정부와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31,13<이민종가 집> 하와이를 중심으로 미주전지역에 기념식이 성황리에 거행,

그 어느 때보다 기념일이 뜻 깊고 한민족의 위상이 업그레이드된 시점이다.

특히 Califonia LA에서 미주한인역사를 빛낸 사람16인 전발간기념 및 축제를 통해 선조 한인들의 역경과 도전을 회고하였다. 그들이 일구어온 업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렸다.

 민족의 선구자 도산 안창호를 비롯,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제필 김구 김좌진 박용만 독립운동가 등 훌륭한 지도자들의 이름이 등제되었다.

국내외에 어려운 현실에서 21세기 민족지도자로 도산 안창호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주독립을 넘어 인류애를 실천한 세계적인 지도자로 세계한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확립,

안창호 리더쉽으로 설립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한인사회 독립운동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 보훈처가 독립운동의 유산 보존명분으로 LA 홍사단본부를 매입해 대한민국의 독립영웅 도산 안창호 미국 도산기념관 설립은 한국정부와 미주한인사회의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마틴루터킹과 같이 후대가 존경하고 닦아가야 할 지도자상으로 미주도산기념관을 결정한 것은 민족의 영광이다.

 리버사이드에 도산기념관이 종합적 교육기관으로 예술센터의 기점으로 활동하며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확립, 권리와 의무를 행사-한미관계 돈독한 역할로 인재양성을 도모하는데 역점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자 교육자였던 도산 안창호. 그분의 화려한 일대기를 돌아볼 필연성을 이 시대에 엄습해온다. 세계로 정치활동을 하였던 그는 1878년 평남 강서군 도롱섬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탄생. 8살까지 집에서 글을 익혔고, 가사를 도우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어릴 적 옛날 이야기책을 좋아해 동네어른들이 사랑방에 그를 불러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하였다고한다 1895년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경신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접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을 뜨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점진학교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한다.

1902년 안창호는 교육활동을 접하고 약혼녀와 결혼 후 부부동반 미국유학길로,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하와이 섬의 우뚝 솟은 웅장한 모습에 감격, 자신의 호를 직접 島山이라 정하였다.

도산은 망망대해의 우뚝 솟은 섬과 같이 조국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이루리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리버사이드에서 각 종일을 공부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1905년 미국최초 한인 민족단체공립협회를 창립한다. 이후 공립신문을 발간하여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1907년 그가 귀국해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한다고 역설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민회와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하였다.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독립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다. 훗날 조만식 여운영도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가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창호에게 청년내각을 제안하자 단번에 거절하였다. 또 대성학교 학생들은 융희황제(순종)가 서도 지방을 순행할 때 이토히로부미가 통감을 위해 일장기를 들고 나오라는 요구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아 일제 감시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안중근이 만주 하일빈에서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이 발생. 그런데 안창호가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다.

 1912년 그는 세계한인회 네트워크역할을 하는대한민국회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19135월 그는 센프란시스코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 신민회 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위해 홍사단을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안창호는 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1910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에서 민족지도자로서 청도회의를 열었고, 1919년에 그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취임한지 2년 동안 임시정부 세력통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자 사임하였다. 이에 실패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났고 안창호는 좌절하지 않고 또 대독립당 창립과 이상촌 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이후 홍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또한 안창호는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한인사회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0년 안창호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24.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일본천황 일행)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 소식을 미리알고 있던 김구는 윤봉길 의거 하루 전 상하이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창호에게는 알리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다.

 안창호는 소년동맹 단에 기부금을 전하려갔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국내로 압송되어 4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과 대전형무소에 26개월의 복역 중 가출옥하였다. 그는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짖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때 안창호는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지만 국내홍사단 조직인(농우회)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76.28일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또 수감되었다. 그리고 윤치호의 탄원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심한 고문과 감옥살이로 인해 패렴 간경화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그래서 출소 후 경성제국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심한 간경화 등으로 19383.10일 향년 59 세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미국에 있던 가족들이 돌아와 그를 만나려했으나 무산 되었다.그는 가족들에게 현재 상황이 위험하니 오지 말라고 편지을 보냈다. 결국 안창호는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안창호 사망이 귀찮은 파급효과를 우려하여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않고 장례식 수관 및 참석자 등 이들 이외에는 들어올 수 없다며 통보했다. 일반인 조문이 금지되었고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되었다고 한다.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명과 형사들을 배치하고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안창호의 묘는 그의 유언에 따라 망우리에 제자 유상규와 안장되었다가 1973녀 서울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과 도산공원에 합장. 1962년 안창호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20189.14일 해군 장보고3.1번 함이 도산 안창호함으로 명명하였다.

  우리의 선각자 도산은 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갈파하면서 젊은이들이 옳게 자라고 있는가. 바로 키우고 있는가, 늘 강조했었다  .

이 혼란한 시대에 애국자 안창호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