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2011.04.16 07:59

서용덕 조회 수:936 추천:68



▲김병연(金炳淵)이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된 내력 조선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에 홍경래(1780-1812)는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 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 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炳夏)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炳湖)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에 김성수(金聖秀)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滅族)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출처: 집문당 발행 <방랑시인 김삿갓 시집> 참조 =================================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농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노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부남 부반악비 골리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가을날 강가에서 슬픈노래부른다.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 김삿갓 계곡은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계곡. 지날 때마다 나무로 참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고 느꼈던 삿갓할아버지가 입구에 서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른편엔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가 있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옛날 이마을에서 태어난 아기장수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해 집채만한 이 바위를 들어서 작은바위 위에다 올려놓았다 해서 '든돌'이라 하고 마을을 '든돌마을'이라 부른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평생을 떠돌아다닌 방랑시인 김삿갓! 그의 일가가 살던 집터와 묘소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1992년이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인 김병연이 다섯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선천부사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영월군 와석리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되었다. 김병연이 20세 되던 해인 1827년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그는 김익순의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게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듣게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탄 자신을 용서할 수 가 없었다.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는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가슴아픈 눈물로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채 세상을 비웃고 인간사를 꼬집으며 정처없이 방랑하던 그는 57세 때 전남 화순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이 이곳 와석리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漂浪一生嘆 (표랑일생탄)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我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아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건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해보니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 먼데 김삿갓이 여러 고을을 방랑하던 중 한 서당에 도착하게 되어 물이나 한모금 얻어마실까 하였는데 훈장이 김삿갓의 용모를 보고 대꾸도 안하자 그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보면 얼마나 한문을 자유로이 다루었는지 짐작이 간다.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學童諸未十 학동제미십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 서당에 당도했으나 (내가 온것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하였구나. 배우는 아이들이 모두 열이 채 안되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존귀하구나. 훈장이 나와서 (나를) 내다보지도 아니하는구나 각박한 인심을 풍자하며 파격적인 한자를 쓴 그의 시는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 같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김삿갓 묘소로 들어가는 계곡 길가 구절초 꽃밭에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계곡이 크지는 않지만 절벽처럼 높이 솟은 바위산과 맑은 물로 마음을 잡았다. 我向靑山去 (내 청산을 향해가거늘) 綠水爾何來 (녹수야 너는 어디서 오느냐) 파격시(破格詩) 天長去無執 (천장거무집 ▶ 천장엔 거미집) 花老蝶不來 (화로첩불래 ▶ 화로에 곁불내) 菊樹寒沙發 (국수한사발 ▶ 국수 한 사발) 枝影半從池 (지영밤종지 ▶ 지렁이 반 종지) 江亭貧士過 (강정빈사과 ▶ 강전 빈 사과) 大醉伏松下 (대취복숭아 ▶ 대추 복숭아) 月移山影改 (월리산녕개 ▶ 워리 사냥개) 通市求利來 (통시구리래 ▶ 통시엔 구린내)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는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챙겨 오네. 뜻으로 보면 자연을 누비던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읊은 것이지만,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으면 돈이 없어 세상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가난'의 참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竹詩 죽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粥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치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 옳음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 손님 접대는 가세(家勢)대로 하고 시정(市井)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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