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표 시인(평론가)님과 함께

2011.09.12 11:58

서용덕 조회 수:493 추천:97



홍문표 시인 (문학 평론가) • 충남부여 출생 • 고려대(문학박사) . 서울기독대(신학박사) •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1977년) • 시집 『나비야 청산가자』등 . 수필집 지상의 선택』 • 평론집 『한국문학과 이데올로기』 . 『상생의 문학과 구원의 문학』 • 문학이론서 『현대시학』 . 『시창작 원리』 . 『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비평이론』 『기독교문학이론 등』 •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회장, 한국시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 계간 『창조문학』발행인 • 제9회 조연현문학상, 제3회 심연수문학상 외 다수 수상 • 오산대 총장 역임 (2011년 2월까지) • 현재는 명지대학교 교수로 시학과 비평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 사이버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 또한 한국시문학회 회장. 계간 <창조문학>편집인으로 문단과 학계에서 주도적 활동을 하고 있다. ----------------------------------- ❶ 디지털시대와 현대시의 전망 홍문표 (시인.평론가.오산대학 총장) 우물 안 개구리란 말도 있고 각구주검이란 말도 있다. 모두가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미 시효만료 된 과거의 것들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지금 세계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인 혁명이나 사상적인 혁명이 아니라 기술의 혁명이며 문화의 혁명이다. 따라서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문학의 혁명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러기에 문학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겐 이 혁명의 실상과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현대를 일러 사회학자들은 후기 산업사회, 후기 자본주의 시대, 제3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는 정보통신의 대 변혁기라들 한다. 이러한 표현들의 공통점은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기술과 자본과 물질이 예측불허의 혁명을 주도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전자언어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통신의 혁명은 원시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공업사회에서 이제는 정보통신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컴퓨터와 전자공학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을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바꾸고 있다. 우주 시대 , 정보화 시대, 전자문명 시대, 유전공학 시대, 디지털문명 시대,컴퓨터피아, 인터넷의 바다 등으로 불리어지는 오늘의 시대는 <맥루한>이 지적한 것처럼 활자문명에서 전자문명에로의 전환이며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한 마을의 일원이 되는 지구촌(global village)의 시대라는 말로 압축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통신의 혁명은 결코 과학기술만의 발달만은 의미하지 않는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과거엔 무력중심, 재력중심이었으나 , 현재는 지식과 정보가 정치.경제의 중심이고 최고의 권력이고 최고의 부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인류의 생활양식과 사고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데 이를 디지털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라고 한다. 그 동안의 전통적인 문명을 대개는 아날로그 시대의 문명이라고 한다. 모더니즘,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등이 모두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의 핵심은 질서와 합리성이다. 아날로그 시대엔 10진법이 모든 계량의 원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태엽시계는 바로 아날로그 문명을 말해주는 상징적 시스템이다. 태엽시계는 일정한 간격의 톱니들이 서로 맞물려 1분의 초침의 톱니가 1초에서 60초까지 일정한 순서로 가야하고, 1시간의 분침의 톱니가 1분에서 60분까지 가야하고, 하루는 시침이 1시에서 12시까지 두 번을 가야한다. 이러한 순서는 결코 변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다. 이러한 질서체계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가장 객관적이라고 믿고 살아온 것이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21세기라고 하는 오늘의 문명은 아날로그의 체계와는 전혀 다른 디지털의 체계가 중심을 이루는 대 변혁의 시대다. 따라서 우리들의 사고체계가 아날로그적 사고에서 디지털적 사고와 가치관과 철학이 요구된다. 디지털 체계는 0과 1이 동시에 무수히 다른 것으로 변환하는 2진법의 세계다. 전자시계가 보여주듯이 디지털시대는 1초에서 2초로 가는 시간이나 1초에서 억년으로 가는 시간이나 동시에 표시되는 동시성의 시대다. 따라서 순서적 시간이 아니라 건너뜀의 시간, 더구나 과거로도 역류할 수 있는 가면적 시간, 가역적 시간이 가능한 변화무쌍한 시간이다. 그것은 온고지신이 아니라 돌연변이, 토마스 쿤은 이러한 문명의 특징을 선형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만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공간도 건너 뛴다. 국경도 도 없고 경계도 없다. 한 지역의 사건이 지구 전체로 동시에 확산 된다. 더구나 사이버 세계, 가상공간, 하이퍼 리얼리즘, 시뮬라크르 등 전혀 인간의 상상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공간이 우리를 유혹하는 시대다. 이처럼 디지털문명은 주체를 부정한다. 영역을 부정한다. 중심도 부정한다. 이러한 변혁의 패러다임은 먼저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이 집착한 질서와 총체성의 우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해체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단아가 그런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과 언어에 의한 확실한 것, 확정적인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중심에 진리가 있다는 신념도 인정하지 않는다. 총체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난공불락의 경전이나 교리나 이데올로기도 인정하지 않는다. 계급이나 서열이나 고급이나 저급, 이성이나 감성, 선과 악,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문학에서 작가의 권위, 작품의 창조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는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모든 경계와 신조를 헐고 진리의 다양성, 상대성, 상호보완성을 인정하는 무한히 열려있는 다원성의 광장으로 판을 몲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는 문학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체계에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❷ 디지털시대의 문학의 혁명 (1) 경계의 허물어짐과 해체시의 전략 디지털시대, 즉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오늘의 문명은 인간의 사고, 생활양식의 변혁은 물론 문학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는 변화와 개혁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첫번째 작업은 기존의 모든 제도와 경계를 허물고 해체하는 작업니다. 합리주의, 과학, 이성, 모더니즘으로 설명되는 근대는 한마디로 경계를 정하는 세상이다. 너와 내가 다르고, 자아와 타자가 다르고, 인간과 사물이 다르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다 다르고, 천재와 바보가 다르고, 시와 소설이 다르고, 문명과 야만과 다르고, 정신과 물질이 다르고, 진실과 거짓이 다르다는 전제하에 과학이건 학문이건 모두가 이들 존재들의 차별성과 우열성을 철저히 규명하고 서열 짓는 것을 최대의 과업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경계선을 긋는 이유는 절대적인 선이나 진리나 정의나 보편성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낭만주의 문학은 개인들의 꿈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사실주의는 가난과 거짓과 모순의 등 뒤에 정의와 평등이라는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언어라는 도구를 통하여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이 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이성, 즉 로고스(logos)를 기초로 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러한 진리의 신념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이성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성적 존재이고, 언어란 진리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 하면서부터다. 사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이 꿈꾸었던 이데아라 본질의 세계는 2천년이 지났지만 증명되지 않았고 그렇ㄱ게도 많은 리얼리즘 작가들이 정의와 평화를 호소했지만 정의 평화는 아직도 이 땅에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트, 데리다, 푸코, 사이드 등은 중심과 변두리, 본질과 비본질, 고급과 저급을 구별하는 행위는 서열주의나 이성중심주의, 언어중심주의의 횡포라고 비판하면서 절대적이란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빛 환상일 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중심과 변두리, 문명과 야만, 시와 소설등 모든 차별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우리는 해체주의라고 하는데 디지털시대는 이를 가속화 시켰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국경이 없다. 작가와 작품과 독자의 경계가 없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없고,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없고,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의 장르라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사실 기존의 문학론은 우선 문학은 문학다워야 하고, 시는 시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성과 시성의 엄격한 경계를 증명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활자언어의 아날로그적 팰러다임에서나 유효한 논리였다. 지금 디지털시대, 종이책이 아니라, 멀티미디어에 의한 전자책, 독자가 마음대로 복사하고 변형하고 확대할 수 있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에는 그러한 경계들이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통적인 서정시나 모더니즘시를 해체하는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시법은 그것이 낭만주의든 모더니즘이든 화자와 연결된 언술로서 일관된 정서의 흐름과 심상의 구축으로 어떤 완결된 의미를 드러내는 미적 작업이다. 여기서 완결된 언술이란 문법적 규칙에 따라 주어와 술어가 결합하여 의미를 형성하는 어법을 말하며 읽관성이란 주제나 의미지가 인과적 논리에 따라 유기적으로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①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있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네가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들리느냐 수나 이것이 몇 만 시간만이냐 -----------------------------------------------서정주 의 「 」 ②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 -------------------------------------------정지용 의 「 」 ③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애기치 않는 순간에오고 절망을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의 「 」 ④ 남자와 여자의 애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오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김춘수 의 「 」 인용한 ①의 시는 사별한 연인을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절실한 감정이 시적 화자의 수나에 대한 분명한 진술로 되어 잇는 서정시다. 비록 종로의 모든 여인들이 너라고 생각하는 동일시의 착각이 있지만 이는 절실함에 대한 가능한 상상력이기도 하다. ②③④의 시들은 1930년대, 1950년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들의 작품이다. 모더니즘 시는 기존의 낭만주의 시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비판하고 엘리엣이 지적한 것처럼 지성과 감성의 등가적 균형을 강조한 것으로 당대에는 매우 진보적이고 전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시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한 시들을 보면 화자의 완결된 언술이 있고, 집중적인 주제가 있고, 조화로운 구조가 있다. ②의 시에서 작중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정서를 유리창의 안과 밖 두 공간을 통해 나타나는 입김,밤, 별, 새의 날개, 보석, 산새라는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중심적 주체가 되는 화자의 슬픈 심상이 잘 구축되었고 주어와 술어가 논리적로 결합하여 의미를 형성하고 있으며 인과성과 일관성이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전체와 부분들의 유기적 결합, 섬세한 언어의 사용과 정황의 제시 그리고 잘 계산된 감정의 노출 등 시적 수사와 운율이 시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질서와 논리가 있고, 다양한 상상력이 물리적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③의 시는 절망을 중심으로 모든 언어가 배치되어 있다. 절망적인 사태를 표현하기 위해 “반성하지 않는다”는 술어를 중심으로 풍경, 곰팡이, 여릅, 속도, 졸려과 수치 등 서로 연관성 이 없는 낱말들을 모아 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술어에 수렴되어 절망적인 사태를 강화하는 언어일 뿐이다. 이는 반복과 비약에서 오는 절망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며,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라는 구절이나 , “절망은 끝까지 반성하자 않는다”는 구절도 역시 절망의 수식이다. 따라서 언어 전체가 ‘절망’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하여 읽관성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④의 시는 세 장면으로 제시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 오갈피나무, 바다를 밟고 간 남자가 그것인데 세 장면의 인과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춘수는 이를 무의미시라고도 했는데 인과성을 배제하고 이미지와 의미의 견고성을 해체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세 장면 모두 ‘젖어있음’으로 수렴되어 시 전체는 잘 짜여진 구상화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선과 색체 등 여러 의미지를 배치되어 전체가 조화로운 구조를 이루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디지털리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편승하여 나타난 해체시, 패러디시, 메타시, 키치시 등은 기존의 시법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① 김종주 80 5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 3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해 21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의 「 」 ② 첫 번째는 나 2 : 자통차 3 , 4 : 잠수함 5 , 6 , 7 : 돌고래 8 : 비행기 9 ,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의 「 」 ③ ‘ ’ 란 영화의 로버트레드포드 그마지막장면속에흐르던 감미로운음악 ‘The way we were’ 그리고나서는 ‘ ‘끝장면 ‘ ‘지키는당당한스칼렛처럼그렇게 서있는거다 -------------------------------------------------------「 」 ④ 그래, 왜 아니, 그냥 -------------------------------------------------------「 」 ①의 시는 신문에서 구인광고들을 모자이크한 것이다. 무관심한 시대상의 단면을 기준의 시법을 파괴하여 자족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적 화자의 연결된 언술이 아니라 신문광고의 기표가 되어 제시되는 시 아닌 시다. 해체시는 시인의 세계관이 유보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존의 시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절하고 습득하고 인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전통 시형식 파괴라는 해체의 전략을 실험하게 된 것이다. ②의 시는 구성의 필연성을 해체한다. 1,2,3의 순서는 기존의 질서를 보여주는 아날로그적 기호다. 그러나 나, 자동차, 늑대, 잠수함등의 개별적인 나열은 어떤 필연성이 없는 낱말의 흩어짐이다. 그리하여 필연성과 우연성, 구성과 반구성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이다. ③의 시는 영화를 소재로 한 것으로 소위 패러디(parody)와 패스티쉬(pastiche)를 활용한 시다. 원래 패러디란 원작을 모방 개작하여 풍자하는 것이고, 패스티쉬는 단순히 혼성 모방하는 것으로 그 배경에는 상호텍스트성이 있다. 그동안 문학에서 가장 존중한 것이 개성이나 창조성이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이후 언어는 혼합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바흐친은 상호대화성, 크리스테바와 바르트는 상호텍스트성을 내세워 문학의 창조성을 부정하게 되었고, 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리즘의 새로운 신조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시에서는 현실이 영화로 대치된다. 현실은 이제 인간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마저 소외되고 영화,비디오, TV, 만화 같은 영상매체가 조작하는 의미지, 즉 가상현실인 시뮬라크르만 존재하며 인간들은 그러한 가상현실, 즉 메타현실을 현실로 믿고 사는 것이다 여기에 메타시의 논거가 있다. 따라서 지식이나 정보, 또는 인간성마저도 상품이라는 하부구조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의미의 대립이 해체되고 욕망을 표상하는 소리, 즉 시니피앙의 잔재만 남는다. 따라서 예술과 현실의 경계도 해체된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이나 전통시가 추구하던 통일성이나 전체성의 논리들은 먼 전설이 된다. .④의 시를 보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시 가운데 ‘키치시’가 생각난다. 키치(kitsch)는 권태나 비아냥거림을 느끼게 하는 치졸함의 시다. 이 시의 단편적인 일상의 대화가 둥둥 떠 있는 파편적 기로가 되어 있다. (2) 디지털시대의 작가. 작품.독자 ① 지식서사와 티렉터인 작가 디지털 시대 작가란 무엇인가. 과거에는 특별한 신통력을 가진 자만이 앉아서 천리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신통력을 가진 천재로 보았고, 시인은 신의 소리를 듣는 존재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우스 하나로 누구나 천리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활자로 된 종이책도 읽지 않는다. 인쇄문화의 혁명으로 요즘은 누구나 쉽게 책을 만들고 하루에도 수십 권의 시집이 쏟아지지만 종이책은 별로 팔리지 않는다. 몇 년 전만해도 수백만 또는 수십만 권의 베스트셀러가 있었지만 요즘은 과장광고를 아무리해도 그렇게 책이 팔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로 입체화된 전자책을 보거나 아니면 그보다 훨씬 쇼킹한 게임과 채팅과 포르노와 기상ㅊㄴ외한 세계들이 음악과 색채와 영상으로 동시에 어우러지는 멀티미디어의 마력에 함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창작이란 말이 무의미한 시대가 되었다. 주제와 의도만 입력시키면 컴퓨터가 알아서 시를 만들어 주고 소설을 만들어 주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독창적이란 말도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인쇄된 활자책은 작가가 창작한 것으로 확정되고 그 내용의 변경이 불가능하지만 전자책의 경우는 독자가 마음대로 내용을 변경해서 읽을 수 있고 제작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해서 공동창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작가의 존재는 이미 후기 구조주의에서부터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작가의 죽음인가. 바르트 는 작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본다. 지식서사와 작가가 그것이다. 지식서사란 대서소에서 일하는 사법서사처럼 누구를 위하여, 또 무엇에 대하여 타동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 즉 베끼는 사람을 말한다. 진정한 작가란 적어도 언어 자체만을 목적으로 창조적으로 글을 쓰는 자동사적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남의 사상과 문장과 언어를 베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작각가 사용하는 언어가 작가가 창조한 언어가 아니라 이미 언중에 사용하는 기성품언어이며 사상과 문장역시 기성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미 주어진 기존의 사상, 언어, 감정 등을 인용하고 반복하는 앵무새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기에 작가는 지식서사라는 것이다. 그동안 문학은 작가 개인의 독창적인 작업이었고, 또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한닥고 믿어왔지만 특히 디지털시대 , 기술형 문학은 작가와 기술자와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으므로 텍스트에 대한 작가의 존재성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과정을 총괄 지휘하는 디렉터역활이다. 디렉터는 텍스트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음악과 동영상, 나아가 다른 텍스트와 링크화까지를 포괄하는 일련의 과정의 책임자이며, 이때 작가는 한 파트를 담당할 뿐이다. 최근 일부 젊은 작가들이 신 작가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문자시대의 작가가 글과 말을 수단으로 표현했다면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컴퓨터 영상으로생각을 표현한다. 즉 디지털 영상이 그들의 새로운 언어다. 새로운 언어는 미술,음악, 인문학, 미학, 컴퓨터공학들이 함께 녹아있는 얼티미디어다. 따라서 이에 걸맞는 컴퓨터 기술자와, 새로운 문법, 새로운 글쓰기의 작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② 상호텍스트와 시뮬라크르 작품 두 번째로 작품의 존재성도 달라지고 있다. 작품은 객관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일종의 형식이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정하고 있는 하나의 실제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품이란 작가가 문자를 통해 문학적인 제도와 규칙에 따라 제작한 창조적 존재다. 과거에는 작품보다 작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모방론에 연유한 역사주의나 사회주의 입장은 모든 인식의 원칙을 인과법칙에서 파악하고자 했고 작가는 바로 그 원인의 실체이기 때문에 작가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형식주의에서는 작가와 독자에 대한 의도의 오류 (intentionl fallacy) 와 감정의 오류 (affective fallacy)를 지적하면서 작품 중심, 즉 텍스트 중심의 문학관이 강세를 보이게 된 것이다. 작가가 자기의 의도를 작품에 온전히 반영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둑자는 작품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가, 작품을 대하는 사람마다, 시대, 민족마다 그 해석이 다른 것은 역으로 독자에 대한 불신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장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남는 것은 작품이라고 하였다. 작품만이 유일하게 문학을 대변할 수 있고,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근대 모더니즘과 형식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형식주의자들은 언어는 인간이 가장 확실학 잡을 수 있는 수단이고, 작품은 언어로 쓰여진 것이기에 작품만이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디지털시대에 와서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바르트는 문학 텍스트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로부터 모방되어진 것으로 하나도 창조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상호 텍스트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텍스트가 모두가 다른 것을 보고 베낀 잡탕이라는 말이 된다. 더구나 작품에 기술된 언어마저 정확한 전달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보면 작품의 독자성을 말할 명분이 없다. 또한 디지털시대 멀티미디어 문학은 초감각적인 가상의 세계를 이미지로 제시하고 작가와 독자 그리고 컴퓨터 기술자가 함께 제작하는 탈주체, 탈영역, 탈중심, 복수주체라고 하는 특성을 갖기 때문에 기존의 종이책 작품과는 전혀 다른 멀티미디어 작품이 된다. ③ 작가이면서 독자 마지막으로 독자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과거의 독자는 대단히 수동적인 존재였다. 유식한 작가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작가들에 의한 실험대상에 존재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이 그동안 작가의 상징적 조작물인 작품에 의해 조종되어 왔다. 독자가 주체적으로 탄생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에서부터다. 최고의 비평은 자기 혼의 기록이라는 창조비평의 선언에서 보듯이 정말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든지 문학을 향유하는 것은 독자의 영혼 속에 깃들이는 감정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본격적으로 독자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현대에 와서다. 그 이유를 드러내는 가장 결정적인 말은 문학은 문장 즉 센텐스가 아니고 디스커스(discourse) 즉 담화라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문학은 일방적인 진술이나 전달이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남의 말을 듣는 커뮤니케이션 즉 상호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없으면 문학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문학은 대화이고 그 대화를 감지하는 독자의 존재가 있다는 전재 하에 성립한다. 따라서 작가나 작품보다는 독자가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래서 이제는 텍스트와 작품을 나누어, 전자는 작가가 생산해 낸 체계이고, 후자는 독자가 텍스트 를 읽고 이해하며, 거기다가 재생산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작가는 불와전한 생산자이고 둑자는 그것을 완성품으로 만드는 제2의 생산자가 된다. 그래서 독자는 단순히 작가가 서술한 내용을 따라가는 수동적 감상가가 아니라 작가가 서술한 내용들에 자신의 기대와 꿈을 메꾸면서 새롭게 글을 쓰는 새로운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독자는 작가가 기술한 텍스트 빈자리를 채워 가는 마지막 작가이며, 독서란 독자에 의해서 완결되어 가는 글쓰기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이버문학은 사이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양 방향적 소통행위이며 실시간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기존의 작가에서 독자로 이동하는 수직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교를 통한 대등한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디지털문학에서는 독자는 독자이면서 작가가 된다. (3) 멀티미디어 문학과 하이퍼 리얼리즘 그동안 시의 경우 최대의 강점을 정서적 환기력에 두고 있었다. 시에 있어서 정서적 환기력이야말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경직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식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농업시대에는 잡단적으로 읊조리는 노래가 되었고, 청각적 리듬을 중시하는 서정시가 발달하였고, 산업화시대가 되면서 음악적인 시가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회화적인 의미지 시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모더니즘 시학의 원리는 언어의 감각적 표현이란 말로 정의 된다. 그러데 언어의 음악적 표현이든 회화작 표현이든 그것은 모두가 감각적 표현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언어의 표현양식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정서적 환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연민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핵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 소위 영상문화가 주도하는 전자문명시대에 잇어서는 정서적 환기력, 그 카타르시스 의 역활까지도 영상 예술이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환기력도 월등히 우수하다. 그동안 모더니즘 시에서 장점으로 내세운 이미지의 마술, 의미를 시각화하거나 감정을 구체화하는 시적 창조의 비장한 기술은 시인의 유일한 무기로 자부했지만, 오늘의 영상예술은 시각과 청각의 요소를 총 망라한 멀티미디어 이미지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글쓰기 즉 펜 대신 키보드나 마우스를 터치하여 글을 쓰는 행위는 종이책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나타난다. 종이책의 작품은 이야기든 상상이든 감정이든 모두가 문자에 의해서만 표현되지만 컴퓨터에서는 문자뿐만 아니라 음성,음악,풍경, 영상의 장면들이 동시에 구성하여 입체감을 더해줄 뿐만 아니라 과학이 조작하는 가상의 의미지까지 만들어 느낌을 더해준다. 가령 종이책에서는 “주인공이 하늘을 날았다”라는 문자로밖에 기록할 수 없지만, 컴퓨터에서는 실제로 하늘을 나르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총알이 심장을 뚫어도 죽지 않고, 사람이 새가 되거나, 뱀이 되거나, 괴물이 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모두 불가능한 것이지만 사이버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처럼 컴퓨터가 조작한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를 과실재, 시뮬라크르, 하이퍼 리얼리티 (hyper relity)라고 한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지금까지 인류가 구사해온 상상력의 기능을 완전히 벗어나는 가상의 세계다. 인간은 늘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상상이라는 정신적 메카니즘을 통하여 해결해 온 것이다. 고대인들의 상상력은 신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현실을 극복하였다. 신비로운 신화적 공간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의 상상력은 영웅이나 천재, 또는 이상적인 인물, 이상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일에 봉사하엿다. 최근에는 무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초현실(surreality)의 공간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컴퓨터를 통한 사이버의 세계는 신화적인 공간이나 이상적인 공간이나 초현실의 공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이책의 공간들은 모두가 상상력에 의해서 구축된 공간이다. 인간이 체험한 이미지들을 재구성하여 구축한 창조적 공간이다. 또한 문자에 의해서만 이러한 공간들은 표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충분히 ㄱ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멀티미디어에 의해서 조작된 과학적인 공간은 인간의 상상(imagination)이 아니라 과학이 조작한 환상(fantasy)의 공간이다. 환상은 인간의 경험과 무관한 가공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이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구체적인 실재처럼 경험할 수 있다는데서 정서적 환기력의 강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가상의 실재에서 이루어지는 멀티미디어 시를 하이퍼 포엠, 이야기 양식을 하이퍼 픽션이라고 하고 이러한 작품을 하이퍼 텍스트라고 하게 된다. 이러한 텍스트들의 스토리 전개 방식은 대개가 비선형적이다. 작가의 창작의도에 따라 전개되는 전통적 스토리텔링의 방식과는 달리, 전개과정에서 독자가 개입하여 다양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쌍방 소통이 빚어내는 새로운 현상인 것이다. 한편 가상공간을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라고 했다. 기호학에서는 기호를 기표(signifiant)와 기의 (signifie)로 나누는데, 여기서 기표와 기의는 음성적 실체의 형식과 내용을 가르킨다. 예를 들면 의자라는 기호는 현실공간에 실물인 의자를 지시물로 갖는다. 그런데 가상공간에 나타난 비트로 표시되는 기호는 자체의 공간에 구체적인 지시물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기호라는 용어 대신에 시뮬라크르(simulacra) 로 부르기를 제안했다. 이 시뮬라크르는 가상공간에서 현실공간의 기호가 하는 역활과 동일한 역활을 하지만, 그것은 가상공간 내에 현현한 그 자체 외는 어떤 다른 지시물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가상 공간상의 시뮬라크르는 현실공간에서 기호가 수행하는 의미작용을 하지 못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언어 기호는 의미와 실제 사물이 함께 존재했지만 가상공간에서의 기호의 실물은 없고 가공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만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현실에서 실제처럼 작용한다. 이것이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풍속이다. ❸ 디지털시대 문학의 빛과 그림자 (1) 디지털 문학의 특성 이러한 디지털 문학의 특성은 첫째 탈주체성이다. 일차적으로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쓰는 이는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며서도 다시 그것을 쉽ㄱ게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있다. 더구나 글을 쓰는 과정에 독자가 자유분방하게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어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확대 축소 삭제하기도 한다. 한 작가의 전자언어로 쓰여 진 작품울 자기 하드에 저장해 놓고, 스토리 플롯을 자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고 많은 독자가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할 때, 이제 작가와 독자의 구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같이 글쓰기의 타자화와 작가의 주체성 훼손은 비주체성을 자연스럽게 발현시킨다. 둘째 탈영역화다. 실제공간에서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나 학교, 가족 같은 영역들은 일단 한번 주어진 이상에는 임의적인 가입, 탈퇴가 불가능하며 그 영역 안에서 맺어진 인간관계 또한 자신의 이지와 무관하게 지속되어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상공간아 잦는 탈 영역화의 성격은 뚜렸해진다. 따라서 기존의 권위는 통용되지 않으며, 어떠한 소속감이나 책임감도 불필요한 자유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직적인 모든 관계망들, 예를 들어 선생님과 제자라는 관계도,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도, 연장자와 연소자라는 관계도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탈영역화 권위가 부정된다는 점 말고도,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역활도 동시에 수행한다. 현실의 관계망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숨기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상공간 안에서는 자신이 치는 대로 매번 새로운 ‘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제도화된 영역이 주는 도덕관념이나 책임감, 의무감 또한 희박해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게시판 문화의 새디즘적 성향으로 표면화된다. 가상공간은 현실공간과는 달리 물리적인 제재를 가랗 수도 없고, 법적인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셋째 탈 중심화다. 현실공간에서 주변부 장르의 문학적 상상력은 발표 지면도 협소할 뿐만 아니라 통속문학이라는 편견 탓에 활발하게 창작되어지지 못한다. 현실공간 문학의 중심화도니 정체성이 상상력의 일부분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공간은 오히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같은 주변부 문학의 상상력이 전략적으로 이용된다. 상상력의 탈 중심성은 주변부 장르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장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넷째 복수주체화다. 현실공간에서는 타자의 시선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와 흔적에 주체를 가둬둘 수 있지만, 가상공간은 수없이 많은 타자들을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 궁극적으로는 언재나 혼자다. 현실공간에서는 ‘나’가 쳐다보기 전에 ‘그’가 쳐다 보지만, 가상공간에서는 ‘나’가 쳐다 보기 전에는 절대로 ‘그’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가상공간 안에서의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대화할 따름이다. 이제 주체는 어떤 내적인 연속적 자아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강한 휘발성을 띈 무수히 쪼개진 형태로 현존한다. (2) 디지털문학의 문제점 이제 컴퓨터가 모든 개인들의 필수품이 되고 모든 생활이 전자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한 세상이 된다면 지금의 활자문학의 수명은 조만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과거 음성언어만 있을 때는 구전문학이 있었다. 문자언어가 개발되면서 구전문학은 문자문학으로 정착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이 온통 전자언어로 바뀌는 실정에서 활자문학은 전자언어문학으로 탈바꿈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디지털문학은 그에 따르는 컨텐츠와 인프라가 구축되어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어떻게 보면 종이책만도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컨텐츠에 해당하는 정의적인 텍스트가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도 그 통신망인 인프라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기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엔 보다 많은 기술개발과 엄청난 자본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전자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개개인의 기술교육도 필수적이다. 그러기에 디지털문학은 젊은 세대, 신세대의 몫이며 이들에 의한 새로운 권력이 된다. 또한 디지털문학은 가상공간에서 상호 동시 소통, 다중매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수평화 되고 텍스트의 반응이 즉각적이며 독자의 간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적인 형태의 문학이어서 문학의 분위기는 늘 대중적이고, 오락적이고, 즉흥적이고, 환각적이다. 문학의 주제가 반드시 고상하고 엄숙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문학을 혁명이란 이유로 무조건 인정한다는 데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독자의 지나친 참여와 간섭은 오히려 작품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해칠 수 있으며, 작가의 정체성이나 책임감이 약화된다. 실시간성이나 양방향성으로 가능해진 작가와 독자의 상호소통은 민주적이라는 명분도 있지만 작가에게 심적부담으로 작용하여 결국 작품의 통일성을 해치고 작가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로 디지털문학의 독자추수주의적 성격은 무거운 주제 탐색을 이렇게 한다. 독자들이 지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성의 내면이나 사상, 철학 등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대신에 과학소설이나 드라마틱한 소재로 독자 흥미위주의 상업성을 선호하고 지나치게 원색적ㅇ이고 엽기적인 작품을 생산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셋째로 무차별인 베끼기나 복제성, 흉내내기, 형상화되지 못한 감상과 외설적 선정성의 범람은 문학의 저급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선정적 노출증과 관음증적 소재에 치중 할 경우 인간미는 결여되고 편협성, 경박성, 즉흥적, 절연성적인 작품이 생산될 것이다. 넷째로 심각한 문제는 인간존재의 정체성이다. 작품은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만들어주고 모든 생산 활동이나 일상생활은 로버트가 대신해준다. 수명도 연장되어 2백년을 살지도 모른다. 의식주가 문제지만 이것도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일까. 더욱 끔찍한 것은 유전공학의 발달이다. 슈퍼땅콩, 슈퍼옥수수, 돼지토마토, 거기다가 동물의 복제는 물론 인간의 복제까지 가능하다고 하는데 복제된 수백명의 홍길동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면 진짜 홍길동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의 것들로 바꾸었을 때 짜집기한 인간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복제된 인간, 짜집기된 인간, 인간과 동물이 결합한 변종, 여기에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다. ❹ 디지털시대 시학의 길 (1) 상생주의와 생태문학 타락한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가 마침내 지구를 파괴하고 권력화, 서열화,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휘두르면서 인간의 역사를 황폐화시켰다. 따라서 극단적인 이성중심주의나 인간중심주의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철저히 거부하는 반이성주의, 탈이데올로기,해체주의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탈이데올로기나 해체주의의 반란은 단지 모더니즘의 부정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디지털문명이 갖는 속성과 사고체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글쓰기의 핵심은 과거에는 작가가 중심이 되어 독자에게 작품을 하사하는 수직적이고 하향적인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글쓰기는 작가와 독자가 함께 창작하는 공동창작이며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경우도 작가의 창조적 소산이 아니라 기존의 정보들을 재구성한 상호텍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모든 존재나 가치는 상호보완적이고, 상생(相生)적이라는 철학이기도 하다. 전쟁과 정치적 식민주의, 경제적 신식민주의로 얼룩진 20세게까지는 먼저 공격하고, 먼저 점령하는 공격 메카니즘이 지구촌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질서는 전혀 예기치 못하던 방향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탈이데올로기, 탈민족주의, 탈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최근 세계적 첨단 기업들은 새로운 기업정신을 부르짓고 있다. 20세기 말까지는 ‘승리-패배이론 (win-lose theory)에 근거해서 “이기려면 상대를 쓰려뜨려라!” 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 발상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 가고 있다. ‘승리-승리이론(win-win theory)’ 즉 상생(相生)이론이 그것이다. 21세기에는 어디에도 패자는 없으며 또 있어ㅓ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모두가 이길 수 있는 생존윤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보완적 상생의 철학은 바로 과학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현대물리학의 핵심은 아톰이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아톰은 모든 물질의 기본이 되는데 이는 철저히 개별적이었다. 현대 삶의 방식에서 극단의 개인주의와 핵가족이 그러한 원리에 연유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신물리학에서 아톰을 쿼크(quark)로 쪼갰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쿼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관계주의 철학에서는 주관주의적 자아개념을 극복하기 위해서 유기체적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리좀 (rhizom)이론이 주목을 받는다. 현대문명은 마치 상수리나무와 같다고 비판한다. 상수리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할수록 열매가 그 밑에 떨어졌을 때 자기 자신의 그늘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키워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자를 돌봄 없이 자기 자신의 성장만을 지향하는 욕심 사나운 주어 중심의 지배주의 문명구조로는 더 이상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대안 구조는 대나무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나무는 리좀 식물로서 땅 밑에서 옆으로 뿌리가 퍼지면서 펼쳐 나가기 때문에 이른바 지평 확대의 공생구조를 나태내는 것이다. 이처럼 위기에 직면한 현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학이나 자연과학, 철학 등이 제시하는 마지막 대안은 화해와 공존, 상호보완적이며 유기적인 세계인식과 행동만이 무두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이고 보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실천으로 일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생의 논리가 남녀 성의 평등과 상호보완을 강조하는 페미니즘문학을 탄생하게 하였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생태의 상생을 강조하는 생태문학을 탄생시켰다. 생태학의 핵심은 생태계는 곧 개체와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질서와 균형을 깨트리지 않아야 한다는 공생의 원리다. 개체와 공동체, 자연과 만물 사이에 새로운 균형과 조화를 모색하는 생물 평등주의 그 핵심은 상쟁(相爭)이 아니고 상생(相生)을 하자는 이론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평등, 전체와 개체의 유기적인 관계는 바로 서정시가 추구하는 동일성의 시학이고, 기독교의 사랑이고, 불교의 자비,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심층생태학의 논리에는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없다. 우열이 없고 계급이 없다. 모두가 인정하고 모두가 더불어 공존 공영하는 낙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서정시가 추구해온 조화와 평등의 시정신을 재확인한다. 똥보면 베 먹고 싶어 새벽 샘물 샘 뒤 언덕 위 산죽닢 스쳐 오는 바람을 마셔 동트는 분홍 산봉우리 힌 안개구름 마셔 똥만 보면 못 견디게 베 먹고 싶어 내 몸이 곧 흙이어설 게야 흙이 똥을 마다 안함 오곡이 장차 가득가득히 익어 끝내는 열매 열리게 될 터이어설 게야 똥 속에 배시시 애린이 웃어설 게야 꼭 그럴 게야. --------------------------------------------김지하 의「 」 김지하의 시는 순환질서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죽으면 썩고 썩은 시체는 흙을 기름지게 하는 거름이 된다. 그렇다면 밥과, 몸과, 똥은 서로 뗄 수 없을 만큼 깊은 연관되어 있ㄷ다고 할 수 있다. 똥은 곧 창조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창조의 씨앗이다. “똥 속에 배시시 / 애린이 웃어설 게야” 라는 구절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가장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배설ㄹ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자연관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상생의 정신 상생의 철학 그것은 바로 디지털 정신이며 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2) 다원주의와 글로벌시대 한국문학 인터넷 주소의 체계를 보면 가장 대표적인 주소가 WWW (World Wide Web)로 되어 있다. 인간들의 주소는 모두 국가가 중심인데 인터넷에서 국가는 단지 WWW의 하위개념일 뿐이다. 개인이란 정치적으로는 국가에 속한 존재이지만 인터넷 즉 디지털 세계에서는 세계적인 인간의 일원임을 확인하게 된다. 디지털문학의 특성에는 탈영역화와 복수주체가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연결된 유선무선의 네트워크를 통한 모든 통신망은 기존의 국가나 단체나 문화의 경계와 장벽을 헐고 ㄷ동일한 속도로 상호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문학에서는 주인공은 하나여야 하고, 주제도 하나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문학에서는 주인공도 여럿이고, 주제도 여럿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없고 주인공이나 주제도 하나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원주의적이다. 다국적 경제, 무역장벽의 철폐는 정치적으로 세계화를 지행할 수 없고 거기다가 인터넷의 확산으로 문화교류가 촉진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현재와 과거, 지구의 어느 곳이나 앉아서 확인할 수는 다문화시대, 세계문화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들이 서로 뒤섞이거나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복합체가 되거나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종속시키는 ‘문화제국주의’ 같은 것들도 생겨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후기 산업주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대두되면서 문화 상품과 문화전쟁이라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도 생성 되엇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은 문화에 관한 한, 국경을 완전히 와해시켰고, 그 결과 문화의 정체성 보존과, 세계문화에의 동참은 소위 후진 개발도상국들의 첨예한 관심사가 되었다. 사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중국문화에 압도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문화의 식민지로 왜곡되었다. 분단이후에는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와 외래 문화에 늘 피해를 입넜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에 권력자나 지식인이나 문학인들은 민족주의, 민족문화, 민족문학이란는 정치적 용어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입지를 강화했던 역사이기도 했다. 솔직히 우리의 현대문학은 세계화를 표방한 개화기 이후 계급이냐 민족이냐 순수냐 참여냐 민중이냐 통일이냐 하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내부의 문제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분열하고 대립해온 편협한 지역주의 문학이었다. 그러나 글로벌시대 자문화주의가 현실인 이상 한국문학은 이러한 대세를 직시학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 다문화주의는 우선 문화를 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로 겹치고 섞이지만, 다양성 가운데 공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평화와 조화를 지향하는 사고락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문화주의의 대전재는 모든 문화들의 동등한 공존이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우열이 아니라 특성을 구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문화인식은 서구문화는 우월하고 아프리카 문화는 미개하다는 서구 우월주의가 있었고, 자국의 국가문화나 민족문화는 우월하고 타국의 문화는 미개하다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문화인식도 있었다. 최근 우리학계 일부에서는 다원주의문화를 샐러드문화와 비빔밥문화를 말하는데 비빔밥문화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적 발상이다. 비빔밥과 샐러드는 그 맛이 다르다. 다원주의문화는 비빔밥처럼 잡탕이 되어 본래의 맛을 잃은 문화가 아니라 샐러드처럼 각각의 맛을 가지면서 전체와 어울리는, 혼합이 아니라 공존공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다문화주의에서 경계할 것은 타문화에 종속되거나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명에 동참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문화에 대한 부단한 검증과 가치발견과 자부심을 축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무지개 빛깔처럼 각각의 문화가 드러나면서 함께 빛나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또한 다문화주의란 국제간의 다국가, 다민족문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남성문화, 여성문화, 도시문화, 농촌문화, 활자문화와 영상문화 등 모든 문화양식의 존재성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의 문화다. 이를 시학에서 말하면 치환이 아니라 병치의 원리다. 따라서 다원주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공존하는 문화다. 더구나 현대는 대중문화산업이 오히려 고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K팝, TV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며 오히려 국부와 국격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학에서도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등은 세계적인 명성과 경제성을 높이고 있다. 이제 글로벌 시대 세계속에 노출되어 경쟁해야하는 한국문학은 문화의 다양성,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한국문학도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산업으로 문화산업 콘텐츠로 한류의 바람을 이르켜야 한다. (3) 디지털시대 시의 선택조건 최근에는 수십만 권의 베스트셀러를 찾아볼 수 없다. 기성세대 중에 문학하는 인구는 늘었는데 인기 작가나 문제 작가도 없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사태는 종이책을 읽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가볍고 얇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소설은 물론 시도 읽혀지지 않을 뿐만아니라, 그 많던 독자는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일까. 그들은 모두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인터넷의 바다로 멀티미디어의 황홀한 시큘라크르로 새로운 감각의 디지털문명에 함몰되어버린 것이다. 기성 세대는 그래도 기존의 문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들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명에 살고 있다. 우리의 젊은 시절에는 모두 명작을 탐독했고, 그러한 체험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오늘의 문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과 TV를 통하여 언어를 익히고 판타지소설과 만화책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를 누비고 있다. 또 이메일과 채팅의 이모콘을 통해서 채팅체 또는 즐팅체라는 문체를 즐기고 멀티포엠의 영상과 음향을 감상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와 댓글을 통해서 수정하고 완성해 가는 가변시와 실시간에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 창작시를 통해서 시를 쓸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단절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푹풍처럼 몰려오는 디지털문명 앞에서 기존의 문학은 얼마나 버칠 수 있을 것인가. 기성문학의 선택조건은 이제 양자택일의 기로에 있다. 그 하나는 기존의 문학방식을 외롭지만 고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문명과 결탁하는 방법이다. 기존문학은 고수하는 것이 전통고수라는 명분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문학사의 긴 역사로 볼 때 어떤 문학 장르가 영생하는 일은 드물다. 시대상황에 따라 문학의 표현 방식은 계속 변한 것이다. 우리 시의 경우 향가에서 고려가요, 조선조의 가사, 시조, 개화기 이후의 계몽시, 낭만주의, 모더니즘, 민중시 등 내용과 형식에서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따라서 우리가 지키고 있는 서정시나 모더니즘시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서정시나 모더니즘시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써 온 대부분의 기성문인들은 어찌할 것인가. 디지털방식은 생리에도 맞지않고, 기술적으로 익숙하지도 않은데 시를 포기하란 말인가. 그러기에 전통적 방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역사적 가치를 생각하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길밖에 없다. 디지털 천하가 되면 대부분의 전통적 시들은 폐기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시만은 역사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계속 생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김소월의 「산유화」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작품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달리는 디지털문명을 인정하고 급변하는 새로운 시학을 수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변한다는 것은 물신주의나 기술만능 사회에서 문학이라는 감성적 언어방식이 소멸된다는 뜻이 아니다. 문학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문학의 내용과 표현 형식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한 때는 신의 죽음과 더불어 문학의 죽음을 논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고 언어가 매체로 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한 문학도 함께 존재한다. 언어는 개념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기표가 있고 그 기표가 담고 있는 기의가 있다. 이를 문학에서는 내용과 형식, 또는 재료와 기법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내용이나 재료가 달라질 수 잇고 형식이나 기법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나 문학이 갖는 기표적 요소와 기의적 요소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은 아날로그적 문학의 내용과 형식 또는 재료와 기법이 디지털 내용과 형식으로 바뀔 뿐이기에 우리는 그 내용과 기법을 익히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적인 시의 내용과 기법이 무엇인가. 이는 앞서 해체시 패러디 패스티쉬 메타시 키치시를 예시하면서 기존 시법의 해체 혼성 모방 탈주체, 탈관념, 기의를 배제한 기표만의 행위 등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디지털의 특성을 고려한 종이책의 문자시이고 정말 디지털시는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소통되는 멀티미디어 시가 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시단 일부에서 디지털시대에 부응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논의와 실험이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하이퍼텍스트시를 줄인 것으로 기존 텍스트가 선형성, 인과성, 고정성, 중심성, 관념성, 단선성인 것에 대하여 디지털이 갖는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의 사이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텍스트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바로 네트워크라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참여자들의 쌍방향적 연결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복제, 확대, 축소, 변형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하이퍼시들도 네트워크상의 ㅈ작업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지면에 적는 것으로 다만 디지털적 기법을 실험하고 있는 정도다. 따릉 따릉 따르 따르 딸 딸 핸드폰 저쪽에 웅크려 앉아 있다가 큰 바다를 달려와 딸딸거리는 소리 밥그릇을 뺏어버리면 딸딸이 딸국 멍추다가 또 다시 밤새도록 딸국질을 해댔지. 벼개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소리 딸국 멈추면 조마조마하다가 딸국 하고 또 멈추다가 밤새도록 따릉따릉 해댔지. 밥을 넣어주면 --------------------------------------------------------------------김규화 의 「 」 이 시는 핸드폰 소리와 식도에서의 소리를 병치시켜 물리적 상상 이상의 가상의 소리, 큰 바다를 달려와 딸딸거리는 소리 벼개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소리, 가난의 소리 등으로 상상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아날로그적 상상에서 디지털적 상상을 결합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이퍼시가 하이퍼텍스트의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이는 모더니즘 시운동에서 아방가르드나 초현실주의 등의 퍼포먼스와 다를 바가 없다. 과거에도 기존의 시법을 거부한 무수한 아방가르드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개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시가 성공한 것은 낭만주의가 갖는 모호한 주정주의와 감상의 편협성에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이미지의 분명함과 지성을 결합한 감성과 이성의 등가에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시의 경우, 서정시나 모더니즘시에 가상적 상상, 사이버공간, 시뮬라크르를 결합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는 디지털기기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며, 결과는 멀티미디어의 괴기한 환상이거나 공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문학의 존재성이 감동인가 유희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문학사에서 배우게 된다. 전통적 서정시를 거부하고 반항아적인 모더니스트로 투쟁했던 김수영의 그 많은 작품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오히려 「풀」이라는 민중적 서정시이고 평생 무의미시에 집착했던 김춘수의 경우도 「꽃」이라는 관념적 서정시만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터시대 디지털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권위주의 서열주의 전체주의 중심주의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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