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문장론

2010.08.03 11:25

서용덕 조회 수:603 추천:66

쇼펜하우어의 문장론 ( 문학 자료실) <철학> 사색하고 독서하며 글쓰는 일생은 남다르다 훌륭한 글쓰기 전재로 이른바 삼다를 역설한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생각하고多思, 많이 써보라多作,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다독은 인간 정신의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自害이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사색이 되는 것 다사多思는 아니며, 쓰기 위해 쓰는 것과 허황된 글쓰기 다작多作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자 조잡한 연극과 같다.”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 누군가. 바로 아르루트 쇼펜하우어이다. 그리고 힘주어 말한다.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경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없다.” 우연이랄까. 고전의 미덕이랄까. 어쩌면 요즘 상황과 딱 들어 맞는지. 모두가 절감하는 삼다에 대한 간결. 면쾌함이 대 철학자의 사상속에 므르녹아 시공을 초월하여 문명한 메세지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되묻는 것이었다. 제1장 사색_깊이 생각하기 <사색과 습득을 통해 얻는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이다>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는, 사상은 주관적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과 같다고 했다. 물론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달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독서로 길들여진 정신은 외부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독서라는 정신활동 자체가 외부에서 비롯된 자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사색라는 정신은 외부나 어떤 환경적인 변화에 의해 구속을 받을 수 있어도 독서에 길들여진 정신과 반대로 내연의 충동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스스로 발견한 사상을 통해 개별적인 진리는 고유한 생명을 흭득한다.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사상뿐이다. 하지만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활로 충분하다. 실제로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이와 같은 독서의효용을 만끽한다. 반면에 일반인들과 짜집기에 능숙한 삼류 학자들은 책을 읽고 싶다는 목적에 눈이 멀어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사색의 충동을 억누르는 데 여념이 없다. 이것은 성스러운 정신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스스로 사색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수족으로 노동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며 사상이다.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는 여기에서 구별된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이 문제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과연 어껗게 풀어야 할지 그 해답을 얻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심은 의지의 역활이기에 누구나 가능하지만, 이 같은 결심을 인도하는 사색은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색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자연스레 심오한 사색으로 발전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제2장 글쓰기와 문체_자신의 사색을 녹여서 쓰기 “말과 글은 바로 그 사람 자체이다.” 라는 말은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정신의 표상이고 인격의 개성이다.”라는 의미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것은 곧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규정한 마르텐 하이데거의 말과도 상통하리라. 철학자는 물론이고 평론가와 소설가, 하다못해 매일 발행되는 신문조차 엉터리 문법과 생경한 언어로 독일어를 겁탈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몇몇 소수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언어가 시대의 유행처럼 활보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던 쇼펜하우어의 심점은, 급속한 인터넷의 상용화로 야기된 언어 파괴를 지켜봐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때 쇼펜하우어의 무의식적 의지는 분출하여 표상한다. “저술가에겐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사물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과 무언가를 쓰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첫 번째 타입의 저술가는 고유릐 사상과 경험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이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글쓰기의 가치를 둔다. 두 번째 타입의 저술가는 돈을 목적으로, 즉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 따라서 그들은 쓰기 위해 사고한다. 이런 저술가들ㄹ에게 발견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엉켜진 사상의 실타래를 붙들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사실의 진위가 불분명하가나 왜곡된 것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항상 형태가 모호한 사상을 즐겨 애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문장은 명확함과 명료함이 결여되어 있다. 독일과 그밖의 나라에서 현재 문학이 비참한 사회적 대우에 직면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저술을 통해 돈이 생성되는 구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한 자는 누구든지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그리고 민중은 어리석게도 이렇게 써진 책을 구입한다. 이런 현상 때문에 언어는 또 다시 추락을 경험한다. 우리 시대의 저술가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다. 다시 말해 잔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거나, 타인 의 저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저술가중 대부분이 첫 번째 그룹에 속한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쓰면서 생각한다. 즉 무언가 쓰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또한 많은 수를 헤아리고 있다.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상에 앉기 전에 필요한 사색을 끝마친다. 그들이 남긴 저작은 오래 전에 자신의 머릿속에 결론을 내린 확고한 신념의 결과이다. 그러면 올바른 글쓰기를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쇼펜하우어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책의 제목은 편지의 수신인에 해당된다. 책의 제목이 필요한 이유는 책의 내뇽에 관심을 보일 만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제목은 독자적인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또 짧은 제목이 독자들의 뇌리에 더욱 오래 간직될 수 있으므로 가능한한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내용에 대한 모노그램 역확까지 수행할 수 있는 구절을 제목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상의 진정한 가치를 좌우하는 조건은 소재, 즉 저자가 시도한 사색과 대상과, 소재를 파악하는 데 사용한 형식 및 소재에 대한 가공이다. 여기서 가공이란, 저자가 소재에 대한 사색의 결과로 형태화하는 작업을 뜻한다. 어떤 작가가 읽을 만한 가치가 담긴 저서를 발간했을 경우, 재료에 의존하는 정도가 적을 수록 작가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 대상이 누구나 알고 있는 진부한 소재일수록 작가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대상으로 위대한 가공을 행한 셈이다. 따라서 어떤 책이 유명해졌을 때 소재 때문인지, 아니면 형식 때문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재와 형식을 구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은 저술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대화를 결정짓는 요소로는 첫째, 지성과 판단력 및 활발한 기지이다. 이것이 대화의 형식을 구성한다. 두 번째 요소인 소재, 즉 상대방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화재는 일종의 지식으로 만일 상대방의 지식이 부족한 경우, 소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세속적인 이야기에 한정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대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화제가 아니라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형식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풍자란, 말하자면 대수처럼 일정치 않는 가치에 대한 조작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인간을 풍자하는 행위는 살아 있는 인간을 해부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형벌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인 생명에까지 그 손길이 미쳐서는 안된다. “쇼펜하우어는 글쓰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서 ‘문체’를 특히 강조한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문체는 정신의 표정이고 인격의 개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 의 문체를 모방한다는 것은 얼굴에 맞지 않은 가면을 쓰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면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결국 진짜 얼굴이 될 수 없으며, 언잰가 사람들에게 그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추악하게 생겼더라도 생기가 넘치는 인간의 얼굴이 아름다운 가면보다 훨씬 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고유한 문체는 소박한 정신과 순수한 신념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하나의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이밖에도 쇼펜하우어의 글쓰기와 문장에 대한 절학적인 정신과 비판적 날카로움이 도처에서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다. 타인의 사상을 조금씩 끄집어내 짜집기한 글, 문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잠언투의 짧은 문장과 역설적인 반어법을 남발한 글, 홍수처럼 엄청나게 단어만을 쏟아낸 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와 복잡한 부호 따위를 활용해 지성인처럼 행세하려는 글, 표현이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는 글과 문장, 사족蛇足이 많은 글 중언부언 重言復言 장광설만 늘어놓다 만 한마디로 정신적 빈곤의 변종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단언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슬며시 말한다. 간결한 문체와 정확한 표현으로 누구나 쉽게 이래할 수 있는 훌륭한 글이 아닌, 낙후된 글쓰기도 정상적인 문체처럼 문법과 논리, 수사라는 세 가지 기본 형태만은 꼭 지키라고. 제 3장 독서_생각하며 읽기 시쳇말로 가방 크고 가방 끈 길다고 공부 잘하고 인생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거의 하루 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근면한 사람일수록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항상 탈 것에 의존하면 마침 내 걸어다니는 힘을 잃어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학자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지나친 다독의 결과 바보가 된 인간들이다. 틈만 있으면 책을 손에 드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정신 불구가 되었고, 고유한 사색은 폐기처분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사정이 이러하면 책께나 읽은 사람 모두 바보이고 정신적 불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읽던 책마저 내던질 수밖에.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정색을 하며 자신이 본뜻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고전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을. 그 이유에 대한 그이 대답을 이렇다. “책을 구입하는 행위는 좋은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구입하는 행위와 그 내용을 파악하는 행위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읽은 내용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먹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위장의 활동과 동일하다. 먹는 음식이 소화되어 에너지를 만들어야만 인간이 살 수 있듯이 독서를 통해 내용을 기억해야만 정신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입에 맞는 음식이 구미를 자극하고 많이 먹히는 것처럼 ‘흥미를 끄는’ 소재, 바꿔 말하면 자신의 사상체계 및 목적에 부합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선택하는 안목도 중요하다. 목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상의체계는 튼튼한 위장을 타고난 사람이 적은 것처럼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런 사람들은 책의 내용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작품’에는 저자의 정신적인 ‘본질’이 담겨 있다. 따라서 작품은 저자의 일상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사건과 상관없이 진행되므로 아무리 추악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지라도 그가 남긴 작품의 세계만큼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룰 수 있다. 간혹 일반인이 쓴 책에서 가치와 재미, 유익한 정보를 발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은 이처럼 결과이자, 연구의 성과로 맺힌 열매이다. 따라서 정신을 위한 청량제로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다. 예를 들어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고전의 대개들이 남긴 작품을 읽는다면 얼마 안 가 정신의 진보를 느끼게 될 것이다. 반시간이나마 그들이 남긴 예술을 접하게 되면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지며, 생활에 지친 감정도 날카롭게 일어선다. 나그네가 차거운 샘물로 목을 축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첫 번째 조건은 우선 고전어가 완전무결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낼 만큼 완벽한 사상을 만들어낸 작가의 위대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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