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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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7월에 만난 인디언 어린이                   (중앙일보 수필 2023.7.14.)  

                                                                                                                                             이희숙

 뜨락에 핀 장미 향내로 마음이 들뜨는 계절이다. 벗어 던진 마스크가 하늘길을 여니 반가운 얼굴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단절되었던 만남이 이루어진다. . 한국에서 친구 내외, 캐나다에서 옛 교우 부부가 우리 집을 다녀갔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인디언 보호지역 선교사 가족이 찾아왔다. 우린 서로 두 팔 벌려 부둥켜안았다. 몇 년 만인지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했다. 아늑한 추억이 된 듯하다. 앨범 속의 사진과 함께 떠오르는 뜻깊은 날이 있다.  

미국에 웬 선교사?”

10년 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올 때 들은 질문이라고 했다. 미국 땅이지만 미국이 아닌 곳, 바로 호피 인디언 보호지역(Hopi Native Indian Reservation)이다. ‘미국 연방법이나 주 법보다 호피 법이 위에 존재하고 그 위에 마을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아직도 영어가 아닌 자기네 부족 언어인 호피어를 사용한다.  

1,000년을 이어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어 딸이 없으면 유산을 받을 수 없고 대가 끊긴다고 하니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만큼 무 개방, 무 문명을 고수하고 있단다. 자연 계발이나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사진을 찍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가장 보수적인 종족이다. 수시로 부족의 신을 위한 축제를 열기에 선교가 어려운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에 한국 장두훈 선교사의 순교로 인해 선교가 시작됐다.  

원주민은 스페인 사람에게 땅을 빼앗기고 총과 무력을 피해 풀 한 포기 없는 돌산 매사(Mesa)로 숨어들었다. 가파른 절벽 위 테이블처럼 편편한 땅이다. 화씨 110도 뜨거운 기후에서 해발 6,500 feet 고지대에 생활 터전을 이루고 있다. 언덕 위에 세워져 이젠 폐허가 된 옛 성당을 통해 백인들에게 착취되었던 원주민의 아픔을 보았다. 오히려 한국 선교사의 노고와 헌신이 이 지역 주민에게 사랑으로 닿았다. 2대 이상혁 선교사에게 감화받은 원주민이 자기 집을 기증함으로써 Soongopavi Halayki 교회가 설립되었고 5대 박영진 선교사에 이르렀다. 선교는 열정(passion)만이 아닌 연민(compassion)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연휴에 그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사 가족에게 작은 격려로 힘을 보태고자 했다. 더불어 그 지역 어린이를 위한 여름성경학교(V.B.S)를 개최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하여 I-40 East freewayArizona Flagstaff, Winslow를 지나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달렸다. 선인장밭을 지나 황야로 접어들어 총 열 시간 반을 달려갔다. Grand Canyon의 동쪽 Navajo Indian 지역보다 더 깊숙하고 외진 거주지에 다다랐다.

첫날 정해진 시간, 교회엔 우리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린 찬양을 시작했다. 어린이가 한두 명씩 오기 시작했다. 나이별로 두 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지만 나중엔 네 그룹으로 55명이 참석하였다. 아이를 따라온 10대 엄마도 있었다. 그들과 청소년을 따로 그룹을 만들었다. 마약을 접한 젊은 엄마의 고백과 재활 결심도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미술, 게임, 미니 올림픽 등 신나는 프로그램으로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았다. 푸짐한 간식, 점심, 상품을 나누며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었다. 사흘 동안 더 많은 어린이가 모여들었다. 감동적인 체험을 통해 힘 있는 역사는 진행되었다.  

문명을 외면하는 열악한 이 지역에서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이들에게 달렸음을 안다. 잠시 머물고 가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왔다. 한국 친구가 좋다며 서운해하는 선교사의 두 아들을 꼬옥 안아 주고 헤어졌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의 눈길은 두 아이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두 아들은 낯선 곳, 타 문화 속에서 인디언 아이들과 친구로 지내야 했다. 몇 년 만인가. 인디언 보호지역을 벗어나 한국 친구를 만나러 왔다. 선교사 자녀가 겪는 어려움이 고스란히 몰려와 콧등이 시큰해지고 뭉클해지는 이 마음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