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으로 배운다

2025.03.14 23:00

조형숙 조회 수:14

산책자는 빛과 그림자를 따라 작은 순간들을 만나는 사람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언제나 새로움을 깨닫는 사람이다. 산책은 단순하게 걷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한 해를 보며 나의 한 해를 되돌아 보는 시간이다. 하루의 세계를 완성하는 시간이다. 내 삶의 여정을 걸어 가는 시간이다.
 
    산책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 마다 작은 변화에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길은 같아도 매 번 풀잎의 호흡이 다르고, 빛의 결이 다르고 바람의 이야기가 다르다. 어제의 시간은 자꾸 뒤로 가고 내일을 향해 걷는다. 겨울의 문턱에서 스산한 바람이  누런 잎을 굴려 모은다. 가을 노래 한자락 하고 싶은 길 저쪽 끝에 계절은 먼저 가 있다. 부지런한 계절을 따라 나도 익숙한 산책자가 되어 간다. 상념에 잡히고 새로운 기억들을 저장한다. 그리고 또 걸으면  바람도 돌멩이도 잎사귀도 다 친구가 된다. 문득 그리움이 가슴에 닿을 때에도 산책자는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간다. 자기를 만나고 돌아본다. 전날과 달라진 나를 눈치챈다.
 
    들쥐가 굵은 나무의 밑둥에 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고개를 쫑긋 내민다.  겨울 준비에 바쁜 들쥐의 가쁜 숨을 귀에 담는다. 담벼락에 가득한 담쟁이 넝쿨의 가득 채움이 위로를 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모은다. 끈기와 생명력의 집요함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담쟁이를 보며 열정으로 살아가는 꾸준함을 배운다. 주위에 잘 적응하여 어우러지는 화통함을 배운다. 담벼락은 경계가 아니라 산책자들에게 온기를 전하는 통로였다.   
   처음에는 그저 운동 삼아 나선 산책길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감나무를 알아차렸다. 어릴적 할머니 댁에서 하얀 감꽃을 목걸이로 만들며 놀던 기억이 났다. 자주 그 길을 걸으며 나무의 변화를 보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을 찍고 떨어진 감나무 잎과 작은열매를 집어와 책상위에 놓고 매일 바라본다.  내게는 단순한 감나무가 아니었다. 나와 대화하고 자꾸 오라고 부르며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나무였다. 담장 밖 길에 서 있는 나무는 처음 연두색의 약하고 여린 잎을 보여주었다. 팝콘 만한 작은 열매가 가지에 붙어 있다가 시간 따라 변하여 갔다. 열매는 꽃잎을 밀어내고 초록의 빛깔이 되어 아주 조금씩 몸을 부풀려 간다. 뜨거운 해를 견디고, 스치는 바람과 인사하고, 별과 달의 부드러움을 끌어 안고 위로 속에 잠들며 아주 조금씩 주홍의 색깔이 되어 갔다. 초록의 열매는 주홍이 되기까지 꾸준히 붉어져 갔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달린 감이 조용히 흔들린다. 고개 들어 위를 보면 셀수없이 많은 열매가 촘촘히도 가지에 붙어 있다. 감나무의 숨소리를 들으며 줄기를 쓰다듬으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잎사귀가 나를 보고 웃는다. 달이 덩그러니 나뭇가지에 내려 앉았다가  다시 구름속으로 숨는다.
 
    아주 작은 열매가 홍시가 될 때 까지 나무의 한해를 지켜 보는 기다림의 산책은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준다. 담장 밖에 감나무를 심어 놓은 주인의 마음도 고마웠다. 산책이 반복되는 동안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끈질김을 느끼는 발걸음은 늘 새로웠다. 새로움이 쌓여 하루, 한달, 일년이 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감나무의 성장을 관찰하며 기다림의 기쁨을 가졌다.  산책은 사람과 자연이 살아가는 과정이  닮아 있음을 알게 한다.  산책의 가치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자연이 주는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게 한다. 도시의 빠른 변화를 지켜보는 자연은 자기 성장의 절제와 흘러가는 시간을  조용히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이제 열매는 다 사라지고 잎은 황갈색으로 바뀌어 흔적만 남은 그 길을 걷는다. 겨울지나  2월이면 다시 여린잎이 나고 팝콘 만 한 열매가 조랑조랑 달리겠지.  그 땐 봄이려나.
 
2024년 12월29일 한국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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