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8 11:05
<봄나들이>
“활짝 핀 벚꽃이 분분히 날리는
화계장터 쌍계사 주변을
고뿔로 시원찮은 몸으로 어슬렁대다
지리산 산신녀의 딴죽에 걸려
도처에 널려있는 차 밭으로 그만
나둥그러져 버리고 말았지...중략”
선배님의 “봄나들이” 시를 읽다가 산신녀가 선배님께 딴죽 걸었던 그
날이 머릿속에 떠 올랐습니다. 신영철 작가가 자신의 수상기념으로
문학기행을 마련해서, 미주에서 글쓰는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청했지요.
구례의 쌍계사 가까운 곳에 사는 여성 산악인 작가 남난희씨 집에 하루를 묵었는데,
그 집은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있었어요.
밤이 되자 대청마루에서는 장구를 메고 온 소리꾼이 남도 민요를 열창하고,
앞마당은 장작 타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차 있었어요.
저를 비롯해 시차를 못이기는 몇 사람은, 불가에서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수런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른 잠이 들었어요. 아마 선배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장작불은 재가 되어있었고, 집주인은 가마솥에 불을 지펴서 찻잎을 덖고 있었지요.
마당에 깔려있는 옅은 안개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가보니, 선배님이 차밭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걷고 계시더군요.
는 난생처음 보는 차밭이었어요. 밭에 풀이 더부룩이 자라서 길인지 밭인지 구별이 잘 안된 탓에
저도 조심하며 걸었어요.
아이쿠! 소리를 제가 들었을 때는 선배님이 이미 차 밭으로 굴러 넘어지신 거지요.
밭에서 돌아오니 남난희씨가 막 우려낸 차를 사발에 담아주며, 이렇게 마시는 차가
의외로 제맛이에요, 하길래 선배님이랑 한그릇씩 받았지요. 찻잎이 그대로 담겨있는
막사발을 입에 대자 풀냄새가 확 올라왔어요. 저는 그 차를 못마시겠더라고요.
선배님은 굴러 넘어져 다친 사람 같지 않게 멀쩡히 차 그릇을 받아들고는 차맛이 이상해,
하면서도 그 차를 다 마셨어요. 새삼스럽게 웃음이 나네요.
선배님은 그때 집주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참고 드신 거지요?
“고뿔이 몸살로 번져 가슴, 다리, 무릎 동통에
도저히 불가한 봄나들이었지만
그깟 산신녀 농간에 내가 굽힐소냐...중략”
고뿔에 몸살에 통증에 그렇게 아프셨다면서 ... 참을만 하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네요.
다음날에도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니 뭐...아직 좀 아파, 하고 마시더군요.
선배님과 저의 고향인 오산은 참으로 심심한 동네였지요?
먼저 돌아가신 소설가 박요한 목사님은 장지리가 고향이시고 선배님은 청계리,
저는 오산5리 남촌이었어요.
제가 막 돌 지난 아기였을 때 선배님은 초등학교 1학년이셨겠어요.
큰 강도 없고 깊은 산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고향... 저는
그나마 오산천에 피라미, 모래무지 녀석들이 요란스럽게 헤엄치며
다닌 덕분에 걔네들 쫓아다니다가 저절로 자란 거 같아요.
오산천의 상류였던 청계리 계곡도 그랬다면서요?
<천렵하는 날>
“유리 같은 맑은 물이
은하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그 속엔 금쪽, 은쪽 , 무지개 같은
피라미, 모래무지, 불거지떼가
마구 뛰어 놀았다 그런 이유로인지
마을은 청계리로 불리었다...중략”
선배님의 호, 청계가 이 고향 마을 청계리에서 비롯되신 거지요?
그런 마을에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사라졌지요.
그게 산척리 저수지가 생기면서 생긴 일이었을 거예요.
“어느 날 미군들이 불도저를 가지고 왔다
자갈을 다 퍼내고 시멘트를 날라다 쌓았다
물은 마르기 시작했고, 물고기들은 자취를 감추었다...중략”
그 미군부대는 행정구역이 전혀 다른 송탄읍에 있었지만, 비행기 활주로가
오산에 있다는 이유로 오산 공군기지가 되었다고 하던가요... 암튼 우리 집이
있던 읍내 서쪽에는 경부선 철도가 읍내를 세로로 가르며 지나가고, 선배님의
동네, 청계리가 있는 동쪽에는 경부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지요.
“그 후 고속도로가 훤칠하게 뚫렸지만
그곳에선 차량들의 검푸른 매연
신음소리만 질펀한 강을 이루었다”
이런 고향을 저도 떠나왔네요. 나이 드신 부모님을 그곳에 두고요.
언젠가 5살에 치명적인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선배님 어머니 이야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어요.
<기억 남기기>
“아랫목에 누워 있던 그녀는
내가 방에만 들면 벌떡 일어나
추운 밖으로 몰아내려고
꾸짖고 때리고 협박했다
쫓겨난 나는 추위에 떨며
문고리에 매달려 울었다...중략”
“선배님, 아마 어머님이 어린 아들에게 자신의 병이 옮길까봐 그렇게 무섭게 야단치셨을 거예요.
엄마 마음이 더 아프셨을 것 같은데요...”
“글쎄... 그랬을 지도 모르지”
우리 대화는 거기에서 멈추었지요.
나머지 말들은 조용히 앞을 응시하던 선배님의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있었겠지요.
분명 어머니는 어린 아들과 정을 떼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자식에게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었을 거라는 것을 선배님이 모른게 아니었어요.
시가 너무 정직해져서,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던 거지요?
제가 시인을 몰라보고 주제넘은 말을 했었네요...
2009년, 김종회 교수님을 모시고 산호세에서 문학 캠프가 있었지요.
캠프가 끝나고 임문자 회장님의 안내로 산 호세 바닷가를 가게 되었어요.
그때 고래를 잡아올리던 point lobos 부두에서 선배님의 박식함이 빛을 발했지요.
임 회장님과 제가 폭소를 터뜨린 것은 킬러 고래 녀석, 즉 범고래 때문이었어요.
살점을 뚜욱 잘라 먹는 킬러 고래한테 당해도, 향유고래 암컷들은 반항도 못하고
그냥 피를 흘리다가 죽는다네요.
칼럼을 쓰시는 임문자 회장님이 말하기를,
"어쩔 수 없잖아, 기왕 뜯긴 거, 어디가서 찾아..."
킬러 고래 이야기를 꺼냈던 선배님은,
"향유 고래, 그 녀석은 평화주의자야, 그냥 가만히 죽어가거든"
그런데 저는 발끈 화를 냈어요.
"그런 바보가 어딨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지...사실은 우리 세 사람 닮은 이야기 같아서 웃은 거였어요.
사실 저는 선배님을 20여 년 전, 하와이 이민 백 주년 기념 문학 세미나에서 만났을 때,
시인이신 줄은 잘 몰랐어요.
그때 한국 소설가 협회에서 발간한 대표 이민 소설 선집에 “승자 게임”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셨는데, 선배님의 그 소설 제목이 책 표제로 채택되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와이에서 전해 받은 그 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선배님은, 이제 난 소원이 없다고
환하게 웃으셨지요.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어요.
문학 행사도 행사였지만, 나중에 소협 회원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선배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은대구 조림을 맛있게 먹었던 거 생각나시나요?
삼대 째 이어 내려온 장으로 간을 했다던 은대구 무 조림.
아마 선배님과 제가 제일 맛있게 먹었을 거예요.
지금도 저는 하와이라고 하면 쪽빛 바다와 맨발로 걷던 해안선,
바람 따라 들려오는 우쿨렐레 음악소리... 이런 것들보다 은대구 조림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당한 새>
"중략....
나는 이제 다른 나무를 심어야 한다
과목의 생명의 비밀을 진정 아는 건
새의 영혼일지도 모르므로
나무를 심고 나도 한 세상
생명의 비밀을 아는 새가 되어 살자
손님처럼 늘 쭈뼛쭈뼛 주눅 들지 말고
저렇게 의연하고 대범하게 살아
탐스럽고 기찬 열매를 따자"
선배님,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비밀스런 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프고 힘들고 주눅 들고 기가막힐 때, 숨어들어갈 수 있는 방.
저는 그런 마음의 방을 지성소라 말해요. 하나님과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혼의 방이지요.
선배님도 당당한 새가 되기 위하여 그곳에 나무를 다시 심고, 또 의연하고
대범하게 살기 위해, 탐스럽고 기찬 열매를 기대하며 그렇게 그곳에 조용히 머물다 가신 거지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선배님은 사모님의 허리에 간신히 손을 두르고 힘들게 말씀하셨다면서요.
“...사랑해... 고마워...”
그리고 힘없이 손을 떨구셨다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사모님께 전해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건강하실 때에도 못하셨던 말, 마지막 힘을 다해 사모님의 헌신과 인내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를 하셨잖아요. 그때 사모님은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했노라고 목이 메어 우시더군요.
선배님의 온유하고 착한 마음 그리워하며 선배님의 부인으로 살아왔음을 감사하며 살겠다고
적은 글을 보여주시는 사모님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어요.
이제 나들이 마치고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시는 날, 아내분 앞에서 고운 얼굴로 웃으며 찍은
선배님의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았어요. 푸른 셔츠에 짙푸른 재킷을 걸치고 말끔히 이발한 얼굴이셨지요.
“이젠 안 아파.”
선배님은 사진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어요.
엘에이 로즈힐의 날씨는 산너머 산불이 무색하게, 그렇게 봄날처럼 화창하고,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왔어요.
언제나처럼 한마디 하고 조용히 계시는 선배님을 뒤에 남겨두고 돌아서는 그제야... 저는 눈물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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