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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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이름 유감

2014.04.30 05:09

최영숙 조회 수:248 추천:66

              이름 유감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는 영숙이가 셋이나 있었다. 하나는 성이 김씨였고 나와 다른 친구는 같은 최씨여서,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나는 작은 최영숙, 그 애는 큰 최영숙이라고 불렸다.

우리 셋은 이름이 같았어도 취미나 성격은 아주 달랐다.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재능이 없었다. 반면에 큰 최영숙은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 피아노 반주를 했고, 김영숙은 유행가를 잘 불러서 소풍가는 날에는 학급 대표 가수로 나가곤 했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좀 잘난 체하며 까칠한 데 비해, 큰 영숙이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었고, 김영숙은 활발하고 거침이 없어서 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꽃부리 영에 맑을 숙이란 아름다운 뜻을 가졌어도 나는 내 이름을 늘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 교실에 같은 이름이 세 명이나 되고 보니 영숙이란 이름이 더욱 싫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친구들이 영숙아, 라고 부르면 세 명이 같이 돌아보는 일이 번번이 일어나서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곤 했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영숙이가 뭐람....할머니 이름은 순임이, 엄마 이름은 진희, 얼마나 예뻐...거기다 아버지 이름도 꼭 소설 주인공 같으면서 어째 내 이름은 그렇게 지었을까....”

어느 날에는 내 이름이 얼마나 흔한 가 궁금해서 전화번호부를 들쳐보기도 했다. 엄머, 세상에 최영숙이가 이렇게 많아?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수많은 내 이름을 들여다보노라니 흔해 빠진 내 이름에 대해 원망이 일어나기 까지 했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내 이름에서 끝 자 하나만 떼어버려도 좋겠구만, 그러면 최영. 아주 스마트 한 이름인데....

90 년대에 소설로 문예지에 데뷔 했을 때 나는 내 이름이 소설가 이름으로는 너무 평범하다 싶어서 아버지에게 이 일을 정식으로 항의한 적이 있었다.

“소설 잘 쓰면 저절로 이름이 나는 거지, 너는 이름 가지고 유명해지려고 하냐?”  
아버지는 대뜸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나도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암튼 이름 못 바꿔 주면 필명이라도 지어 줘요.”
거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던 아버지가 며칠이 지난 뒤에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내가 필명을 지어 봤는데, 이건  어떠냐? 흠흠...소영이, 최소영”
소영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아버지, 소영이가 뭐야? 그 이름이 나랑 어울려요? 이름이 너무 얌전해서 난 숨도 못 쉬고 살겠네. 아, 몰라, 그냥 영숙이로 할래요.”

지난달에 한국에 갔을 때, 나는 내 이름에 대한 불만을 오래간만에 다시 꺼내들었다.
“아부지 이름이 유명한 배우 이름인 거 아셔? 원빈!”
“그래애? 하긴 내 이름이 멋있다고들 하더라.”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엄마 이름도 좋잖아, 진희...글쎄 아부지, 내가 옛날에 우리 강아지 이름을 지니라고 지었잖아. 근데 하루는 엄마가 듣더니 엄마 이름을 강아지한테 붙였다고 안 좋아하대. 그게 엄마 이름인 거 난 생각도 못했다니까. 후훗! 그래도 그 강아지가 비싼 진돗개였잖우.”
팔순 넘은 엄마가 옆에서 어린애처럼 깔깔 웃었다.

“근데, 아부지, 내 이름은 왜 그렇게 지셨어? 촌스럽게. 요새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이름이 또 영숙이데. 그냥 아무데서 만나는 여자가 영숙이라니까요.”
방심하고 있던 아버지는 슬그머니 당신의 숱 없는 머리를 쓰다듬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공격에 대해 배수진을 치는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그 영숙이란 이름이 말야... 사실은 내가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 영숙이란 여학생이 있었어. 얼마나 야무지고 똑똑하고 빈틈이 없는지.... 그 여학생 노트를 빌려서 시험공부를 하곤 했는데, 아, 노트 정리한 걸 보면 보통이 아녔어. 그래서 널 낳았을 때 그 여학생처럼 되었으면 해서 영숙이라고 진거야.”

“네에?....내 이름을 그래서 그렇게 지으셨어? 아이고, 사연치고 완전 드라마네. 암만해도 아부지가 그 여자 짝사랑 하신 거 아녀? 눈치 보니까 아부진 명함도 못 내미신 것 같은데?”      
아버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셨다.  

“얘는 무슨 말이야, 그게 아녀....하도 똑똑해서 니가 그렇게 되길 바래서 그랬다니까...근데 말야, 허긴 내가 청첩장을 주니까 그 담부터 나한테 말을 안 하더라.”
“맞네! 뭔 일 있던 거네.”
증조할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대학 2학년 시절에 결혼한 아버지는 내 앞에서 소년처럼 웃었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를 때 마다 그 여자를 생각했을까? 그렇담 내게 필명으로 준 소영이는 또 누구람?  미처 아버지께 소영이에 대해 묻기도 전에 기억이 들락거리는 엄마가 정색하며 내게 말했다.
“왜 그래? 영숙이란 이름이 얼마나 좋은 건데, 깨끗하잖아!”
엄마가 내 이름에 대한 사연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적어도 큰 딸 영숙이가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인 나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필명이든 개명이든 이제 다 잊어버리고 나는 오갈 데 없는 최영숙이가 되어서 내 나름대로의 세계를 열고 닫으며 사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누구는 나를 까칠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누구는 정 많고 명랑한 사람으로, 누구는 성격이 급해서 중매도 못하는 사람으로, 누구는 밥 잘해 주는 따스한 사람으로, 누군가는 잘 웃고 말실수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최영숙이란 이름에는 내가 생각해봐도 참으로 여러 모습이 함께 들어있다. 나 자신도 최영숙은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아버지 바람대로 이름값을 하고 살았는가.... 곰곰 생각해 보기도 한다. 최영숙을 기억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름의 뜻대로 맑고 깨끗한 꽃과 같은 이미지를 남기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보니 이렇게 과한 이름을 내게 지어준 아버지에게 또 한 번 투정을 부리고 싶다.    


<후기>
제 이름의 원조가 되는 그 분을 정말 기적처럼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아쉽게도 57년 전에 찍은 졸업 사진을 친구 분의
블로그에 남기고 4년 전에 돌아가셨더군요.

사진을 보니 아버지가 절 키우면서 혀를 많이 차셨을 것 같아요.
이름 값 못한다고요. ^*^
한 눈에 빈틈없고 정리 잘하고 야무진 분으로 보이더군요.  
  
근데, 까칠하고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은 어쩐지 저랑
닮은 것 같았어요.
짧은 머리의 영숙씨가 고개를 딱 세우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서 계시더라고요....마치 여군 장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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