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43,545

이달의 작가

바랭이 풀

2013.02.23 22:03

최영숙 조회 수:828 추천:138


   바랭이 풀, 이름이 곱다.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는 잡초치고는 좀 여린 이름을 가졌다. 다른 이름은 크랩그래스, 마치 게 발처럼 옆으로 퍼져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같다.

  2월인데도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그동안 벼르던 바깥일을 하려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더 늦기 전에 화단에 자리 잡은 바랭이 풀을 걷어내야만 했다. 옆으로 퍼지면서 자란 주목은 남편이 손질하고, 바랭이 풀은 내가 맡기로 했다. 화단 한 쪽에서는 벌써 히아신스 꽃 망우리가 올라오고, 튤립은 단검 모양의 잎사귀를 밀어 올리는 중이었다.

바랭이 풀은 원추리 싹이 올라오고 있는 모퉁이에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었다.
“너, 기다려.”
   작년에 맘 놓고 퍼져나갔던 누런 잎사귀를 뜯어내려고 움켜쥐자 예상했던 대로 만만치 않은 저항이 팔목에 느껴졌다.
“그래, 너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호미를 동원하고 삽을 들이대면서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어찌된 셈인지 아무리 파고 내려가도 뿌리가 보이질 않았다. 뿌리인가 보면 또 옆으로 퍼진 뿌리가 나타나고 거기에서 또 다른 뿌리가 뻗어나가서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랭이 뿌리를 들추다보니 애꿎은 원추리 뿌리가 엎어지고, 막 나오기 시작하던 새싹들이 뭉개진데다가, 나중에는 옆에 있던 국화마저도 들어 엎게 되었다. 작년에 어쩐지 꽃이 시원치 않다 했더니 그 밑에도 온통 바랭이가 그물을 치고 있었다.
  
그래도 뿌리 몇 개는 뽑을 수 있었다. 완강하게 버티던 원뿌리가 밑동을 드러내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뽑혀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자 어깨에 불이 나듯 통증이 오고 목은 자꾸 타들어갔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보니 그 쪽 사정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키는 작아도 나이 많은 주목이라 톱질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쯧쯧, 전기 톱 좀 사라니까.
“톱질은 인내! 인생도 인내, 언젠가는 끝나요!”

  내가 소리치자 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남편이 피식 웃었다. 어느 새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기진맥진 되어 있는데 바랭이 풀은 반도 잡아내지 못했다. 후회막심이었다. 지난여름에 대충이라도 뽑아냈으면 이렇게 고생 안 할 텐데.... 사실 워싱턴에 몇 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지난여름은 말 그대로 펄펄 끓었다. 밖에 나가면 숨을 쉴 수도 없었는데 풀을 뽑다니...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

  결국 바랭이 풀의 뿌리는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저만큼 땅속에서 잘라 버리고는 원추리를 다듬다듬 심어놓고 국화를 꾹꾹 밟아주었다.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어쩌나... 저 속에서 또 힘차게 올라와 화단을 뒤덮어 버리겠지.

  그 때 남편이 나를 불렀다.
“인내 끝!”
  지하실 창문을 반 쯤 가리고 있던  주목 네 그루가 더벅머리를 말끔하게 자르고 새 모습으로 서있었다.
“이건 완전 명품 분재네, 분재!”

  정말이었다. 몰골이 시원찮은데다가 집안을 어둡게 만드는 주범이어서 잘라버리려고 마음먹었던 나무였다. 다듬고 나서 시원찮으면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수형으로 변신해서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아래 늘어진 가지를 쳐 내고 위쪽을 동그랗게 만든 것뿐인데, 아주 달라 보이네.”

남편은 내 탄성에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한숨을 돌리고 오후의 긴 햇살이 쏟아지는 집 앞 계단에 앉아서 민트 차를 마셨다.
“다듬어야 돼. 필요 없는 가지는 아낌없이 잘라내야지. 그래야 바람도 통하고 숨을 쉬잖아. 우리도 저렇게 다듬어야 된다, 그치?”
“맞아! 저 크랩그래스도 그래요. 어쩌면 뿌리가 그렇게 깊어? 꼭 우리 모습 같애....”
진심이었다. 바랭이 풀의 뿌리를 뽑으면서 마치 나의 죄성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뽑아도 원뿌리가 남아서 은밀하게 뻗어가는 죄성. 뿌리가 깊어서 나 자신도 원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것. 그것이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자기 사랑 아닐까 싶어.”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일들 중에 대부분은 내 기분, 내 입장, 내 생각, 내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본능적인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쳐서 다듬고 뿌리를 뽑아야지. 그것도 때마다.... 오래 놔두면 못 뽑아.”
  나는 강아지를 끌고 집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고 넓게 퍼져 나간 죄성을 찾아 줄기를 따라 내려가고, 마디마다 내린 잔뿌리를 잘라 낸 다음, 원뿌리를 잘라내기 위한 몸부림을 이즈음에 시작해야겠다. 머잖아 훈풍을 따라 땅 속 깊은 곳에서 바랭이 풀의 새 싹이 어김없이 돋아날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5 내 인생의 리허설 최영숙 2023.02.06 37
54 스스로 속이지 말라 최영숙 2023.01.24 24
53 자식도 마음 아파요. [2] 최영숙 2023.01.08 33
52 당신을 증명하세요. 최영숙 2022.12.30 23
51 열흘, 그리고 하루 (단편 소설) 최영숙 2022.01.02 130
50 댄스 패밀리 최영숙 2019.09.16 115
49 마른 떡 한 조각 [3] 최영숙 2015.10.30 249
48 크리스마스와 추억 최영숙 2014.11.28 203
47 고양이 발톱 file 최영숙 2014.11.04 229
46 크리스토 레이 마을 최영숙 2014.10.06 234
45 안전 불감증 최영숙 2014.04.30 281
44 이름 유감 최영숙 2014.04.30 248
43 분노 최영숙 2014.03.11 367
42 뿌리 최영숙 2014.02.04 495
41 푸른 색 접시 최영숙 2014.01.21 698
40 요십이 아저씨 최영숙 2013.05.30 510
39 오징어 찌개 최영숙 2013.04.17 629
38 크루즈 패밀리 최영숙 2013.04.07 433
» 바랭이 풀 최영숙 2013.02.23 828
36 착한 아이 서약서 최영숙 2013.02.07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