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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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크리스토 레이 마을

2014.10.06 06:47

최영숙 조회 수:234 추천:39

 

 


지난 여름에 단기 선교로 다녀왔던 벨리즈를 올 8월에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내가 벨리즈로 단기 선교를 간다고 말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부러워했다. 나도 역시 벨리즈가 카리브 해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나라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곳이 왜 그런 별명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지난 해, 크리스토 레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내려 쪼이는 햇볕 아래에서 폴폴 먼지가 이는 길을 걸으며,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카리브 해라는 말은 물론, 은둔자의 낙원이라 불리는 섬이라든지, 에메랄드 빛 바다 속 산호초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는 열대어를 상상하는 일조차도 사치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녀 온 벨리즈 북부는 무덥고 모기가 많은 곳이었다.
간신히 시간을 내어 찾아간 카리브 해는 강한 바람 때문에 흙탕물이 되어 출렁이는 곳이었으며, 나는 그곳에서 겨우 사탕수수 농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통행증을 들고 멕시코로 출근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는 지역이었고, 그들은 멕시코에서 일을 하는데도 높은 관세 때문에 샴푸 한 개를 벨리즈로 사들여오는 것도 부담이 된다고 한탄하였다.

멕시코와 과테말라, 이 두 나라와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인구 삼 십 오만 명의 작은 나라 벨리즈를 다시 찾아갔을 때는 우기를 맞아 습하고 여전히 더웠다.

12명이 함께 한 단기 선교 팀은 리더십과 주일학교 교사 훈련, 찬양 교육, 마을 잔치, 축구경기 그리고 여름 성경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갖고 현지 주민들과 3박4일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사역을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오면 그곳도 여전히 덥다. 저녁을 먹은 다음, 경건회를 마치고 해먹에 누워 기온이 좀 떨어지는 깊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 해먹에 올라앉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누우려던 한 분이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배울 수 있었다. 온 몸이 풀솜처럼 늘어지는데도 난생 처음 누워 본 해먹 안에서는 정신이 또랑또랑 살아났다.

시간이 어느 덧 흘러 막 잠이 오려고 하는데 벽에 붙어 있던 도마뱀이 때맞춰 딱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창문 아래에서 자고 있던 개가 짖더니 닭이 울고, 닭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니까 온 동네 닭이 파도타기 식으로 화답을 해댔다.

그 소리에 놀란 개가 일어나 집 주위를 뛰어다니며 짖고, 나중에는 칠면조까지 합세해서 마을을 온통 뒤집는데, 그 세계 속에서 나만 또렷이 깨어 있는 느낌이었다. 해먹을 흔들며 뒤척이다가 겨우 새벽잠이 들려고 하는 그 때, 맙소사! 뚜다다당, 이번에는 양철지붕을 두드리며 세차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부석한 눈을 부비며 일어나긴 했어도, 해먹에 온 몸을 내던진 채 밤새 귀담아들은 자연의 소리는 아름다웠다.  

선교 사역의 종류는 비슷하지만 선교지에서 만나는 사람은 늘 새롭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나라라 해도 곳곳마다 성품이 다른 것도 그렇다. 벨리즈 북부에서 만난 마야 사람들은 대부분이 조용했다. 더워서 그런지 천천히 걷고 얌전하게 움직였다. 오히려 우리들의 보폭과 목소리가 커서 현지 분들이 밤길에 나선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쉽게 알아보곤 했다.  

어른들 대부분이 당뇨, 고혈압과 같은 성인병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른 선교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외지 사람들에 대해서 쉽게 마음을 여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마주보기 미안할 정도로 맑고 큰 것도 그랬다. 아이들 특유의 넘실대는 호기심을 그 눈에서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내가 들러 멘 배낭 속의 사탕 한 알을 갖고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얕은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넉넉하지 않아서 빈손으로 마주대할 때는 더욱 민망해졌다. 아이들이 자꾸 내 배낭을 기웃거리기 때문이었다. 어떤 아이는 아예 내 배낭에 손을 대기도 한다. 오랫동안 받는 일에 익숙해진 선교지의 아이들.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손 내미는 일을 자연스럽도록 가르친 것은 아닐까....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하다고 선한 것만도 아니라는 복합적인 사실을 나는 선교지에 갈 때마다 느낀다. 그래서 저들의 삶에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단기 선교 팀이 찾아가는 지역의 사람들이 대부분 복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 도 그렇다. 정말로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선교 팀을 받아들이는 저들은 웃는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을 바라보며 갖는 고민 중에서 가장 큰 고민은 아무래도 열매가 기대하는 만큼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미국 선교회에서 세운 교회를 다녔다.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던 그 교회에는 대부분 공장 자매들이 출석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소녀 가장이 많았고, 결핵과 같은 지병이 있는 자매도 있었으며, 특히 그들 중에는 가난으로 인해 치료 받지 못해서 병중에 있는 부모의 병원비를 벌어야만 하는 자매들이 많았다.

농장으로 시작한 선교사역은 나중에 기독병원을 세우는 일로 확장되어 어려운 사정에 처한 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병원비를 할인해 주고 외제 약을 무료로 나눠주곤 해서, 나도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던 위장약 암포젤을 가끔 얻을 수 있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시절이었다. 누구는 이런 것도 얻고 누구는 저런 것도 얻는데 나는 왜 이런 분배에서 빠지는 가가 교회 식구들 간에 이슈가 되었으며, 일반인 의사가 늘어나면서 병원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없는 이들을 먼저 치료하는 일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만이 결국 병원과 농장에 얽혀있는 이권 문제로 번져갔고, 그것으로 인해 교회는 큰 상처를 받았다. 대표 선교사는 한국인 제자들이 퍼뜨린 루머로 인해 모든 것을 놓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기독 병원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나중에는 병원 이름마저 바뀌게 되었다.

얼마 전, 고국 방문길에 나는 그 병원이 부도 처리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의 신도시에 종합병원이 들어서면서 경영난을 견디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갔을 때, 나는 큰 건물 틈바구니에서 왜소해진 기독 병원 건물을 보았다. 예전에 그 병원이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인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최고 시설을 갖췄다 해서 사람들이 항상 북적였다.

우리 교회 식구들은 그 병원을 제 2의 교회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드나들었고, 환자에게 전도하는 일을 하도 야단스럽게 해서 원장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대가 지나간 것을 보면서 나는 그곳을 밟고 간 여러 사람을 회상했다. 상처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었지만 시간이 약이어서 그런지 모두가 그립고 궁금했다.  

찾아낸 소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우리 중에서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해들은 형제가 목사가 되어 그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의 자매들과 해후했고, 선교사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어려운 이들이 사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현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기를 엄하게 가르쳤던 선교사들은 돌아가시고, 예전 교회는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복음의 줄기는 그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유난히 강조하던 경건 생활의 가르침대로 성도들은 식사를 하면서 한 주간의 안부를 묻고 야고보서에서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 전 교인이 야고보서를 공부하는 주간이라고 했다. 적어도 그곳에서 내 귀에 드라마나 여행, 건강식품, 스포츠, 정치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흩어졌던 교회 식구들이 자신이 사는 곳에서 지역 선교사가 되어 교회를 세우거나 아니면 겸손하고 충직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40여년 만에 맺은 이 열매가 참으로 선교사의 오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40년 전, 우리는 참 가난했다. 쇠못 한 개라도 주워서 집에 들어가면 칭찬 받는, 서리를 해서 참외 하나라도 들고 가면 식구들이 흐뭇해하던 풍토에서 벗어난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너무 가난하면 염치를 모른다고 한다. 염치를 알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를 찾아왔던 수많은 선교사를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은 선교사 대국이 되었다. 우리가 가난할 때 베풀며 참고 기다려주었던 그 분들처럼  우리도 염치없이 손 내미는 이들을 향하여 그래도 무언가를 쥐어 주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뭔가를 나눠주는 것도 내가 받았던 대로 콩 반쪽이라도 같이 나누는 심정으로 다가가고 싶다. 내가 가진 자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중의 일부분을 돌려드리는 일이 칭찬 받을 일도 아니고 생색 낼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부름꾼이 되어 시키신 일을 한 것뿐이다. 그 일에 땀을 흘렸으니 이제 나도 만족하다.

숲 속에는 큰 나무도 있고 잡목도 있으며, 잡초와 함께 독풀도 자란다. 다들 놓인 곳에서  제 구실을 하느라고 뿌리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독풀은 약이 될 때도 있고 잡초는 작은 동물의 먹이와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단기 선교를 통하여,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사악하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들을 똑같은 비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숲속의 나무나 풀처럼 제 각각 자기 모습을 갖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얼마나 눈물겨운 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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