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시, 시 같은 그림

2009.03.07 10:01

정해정 조회 수:1037 추천:88

  지난번에 잠깐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방배동에 산다는 친구 집에서 마침 고향친구 들이 모이는 날이라고 나를 그 자리에 초대했다.
  친구가 방배동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와 ‘로얄 빌라’라는 건사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에 들어섰다. 이름에 걸맞게 내부도 대리석과 원목나무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다 고가 수입품 일 텐데... 한국 사람들은 잘도 사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정쩡하게 거실로 안내 되었다. 시간이 이른지 아직 친구들이 도착 하지 않아 푹신한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았다. 한 쪽 구석 에는 한 아름도 훨씬 더 되는 일본제 청자화로에 연분홍빛이 도는 양란이 서른 개 도 넘게 꽃을 피우고 있으니 은은한 향기와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것보다도 나를 숨 막히게 한건 양란위에 붙은 그림이다.
  아! 저 그림! 신경호의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아닌가. 크기는 대충 90/150cm 정도이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지금 만나려는 고향친구 들 보다 훨씬 더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림은 희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맨 아래는 기와지붕 끝만 보인다. 그림 중심에는 길게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대나무 오른쪽으로는 샛 빨강 치마 같은 깃발이 휘날린다. 반대 편 에는 허연 동그란 무리 속에 노랑색으로 달인지 해인지 울듯이 떠 있다. 얼른 보면 어린아이들도 쉽게 따라 그릴 것 같은 민화 비슷한 아주 단순한 그림이다.
  그림에 빨강 치맛자락 같은 깃발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림 제목에서 풍기듯이 이것은 불꽃으로 펄럭이는 넋이 아닐까.  광주 비극의 아픔과, 삭히기 어려운 한이 서려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오래전에 들은 소문에는 이 그림으로 전두환 시절 때, 정보분가 어딘가에서 빨간 깃발이 인공기로 적화를 선동하는 내용이라고 작가가 큰 곤욕을 치루었다 는 소문을 듣고 나는 혼자서 분개했었다.

  <그림 같은 시, 시 같은 그림> 속에 묻혀 지금쯤 육십이 가까웠을 신경호를 나는 한 번도 만난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대할 때면 늘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친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나와는 동향이기도 하지만, 그의 부친은 아름답고 조용한 ‘소록도’라는 조그만 섬에서 나환자 들을 돌보는 병원장으로 십 수 년을 보내신 <신바이쳐>라는 별명을 가지신 훌륭한 분이시기도 하다.
  신경호는 애초부터 국전을 거부한 점이라든가, 우리민화와 우리 색채에 남달리 몰두 했던 점들이 마음에 들어 나는 신경호와, 신경호의 작품을 유난히 사랑하는가보다.

......한줌의 재가/ 한 그릇의 시간이 되었을 때/ 호젓한 자유를 만끽하는/ 사신의 외출.
    독방의 비구상/ 그 주인공은 피로 자화상을 그리고/ 새벽에는 눈물로 붓을 빠는/ 화가가 된다......                                     신경호의 (성년의 구도)중에서 일부분.
나는 가끔 신경호의 <그림 같은 시, 시 같은 그림>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쪽 면으로 거리가 먼 방배동 친구한테 그 그림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 볼 껄 그랬다 하는 아쉬움도 있다.
  나도 그림 같은 시를 쓰고, 시 같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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