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 송영 작가
▲ 현(鉉)의 마녀’로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7).
최근 손가락 부상에서 회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중앙포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honybee.gif    활 잡으면 맹렬 질주 … 소리는 정확 · 간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끌로드 드뷔시의 음악은 어느 것이나 점묘법 화가의 풍경화처럼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귓가에서 가물거린다. 다분히 몽환적이란 말이 어울리는데
드뷔시 연주의 대가인 파스칼 로제는 드뷔시 음악은 청중이 쉽게 간파 못하는
이면의 동기를 감추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연주도 그만큼 까다로운 건 당연하다.

드뷔시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것저것 찾아 들어 보는데
마음에 드는 연주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대에 맞는 연주를 찾았는데 그게 정경화 연주였다. 점묘화가 그렇듯 음 한 조각만 비틀려도 전체가 어색해진다.
참으로 섬세하고 정확하고 앙칼진-긍정적 의미로-프레이징으로 끌고 가는데
두 악기의 다툼이 상쾌감을 자아낸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스스로 걸작이라고 뽐내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정경화 연주로 듣고 몹시 감탄했던 일이 떠올랐다. 감성적으로 백치상태지만 재즈와
집시음악의 활달한 리듬이 결합된 이 다이나믹한 협주곡을 정경화는 마치 늘 부르는
콧노래처럼 능숙하게 연주했다. 1973년 녹음으로 겨우 이십대 중반 나이인데 그 배짱과
돌파력이 놀랍기만 했다. 지금도 이 곡의 무수한 연주들이 있지만 그의 연주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드뷔시 곡을 계기로 정경화 연주를 다시 들어본다.
그에 관해 대강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큰 착각이었다는 걸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초기를 제외하고 그는 한국 무대에도 자주 선 걸로 아는데 불행히도 나는 한 차례도
객석에서 그의 연주를 실연으로 듣지 못했다. 아마 그가 한창 뻗어오르던 시기는
내가 십여년 엄혹한 궁핍의 시기를 보낸 시간과 겹칠 것이다. 정장을 갖추고 음악회에
입장하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그러나 마음은 연주회에 가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브루흐의 협주곡을 비롯, 다수의 음반을 일찍부터
구입해 들어온 것이 증거다.

<Kyung-Wha Chung - Bruch Violin Concerto No.1 - Klaus Tennstedt


그런데 음반과 실황에는 이해의 폭과 깊이에서 확실히 적잖은 차이가 있다.
좋은 시절이 되어 연주실황을 방에 앉아 감상할 수 없었다면 나는 정경화가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가 지휘하는 로열콘체르트허바우와
협연한 베토벤 협주곡 연주의 그 압도하는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준비된 가공미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텐슈테트와 습관적 연주를 혐오하는 독주자,
두 사람의 즉흥적 순발력이 맞아 떨어져 아주 흥미롭고 순도높은 베토벤이
연출되었는데 청중 반응도 그만큼 뜨거웠다. 청중들이 바라는 것도 자발성이 강한
이런 연주일 것이다. 괴짜로 알려진 텐슈테트가 독주자 손등에 입을 맞추는 순간
그 연주는 기념비적 연주회로 완성되었다.

그가 정상급 악단과 연출해낸 협주곡 무대는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다.
1983년 리카르도 샤이 지휘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한 드보르작 협주곡 연주도
넘치는 활력, 빈틈이 전혀 없는 완벽무대라는 점에서 인상에 남는다. 어느 정도 관록이
쌓인만큼 그의 동작도 부드러워지고 아기자기한 3악장 악구를 스스로 즐기는 여유마저 보인다.

Kyung-Wha Chung plays Beethoven violin concerto with her brother Myung-Whun Chung and KBS Symphony.


그는 협주곡에 강하다.
차이콥스키건 브루흐건 바르토크건 언제나 완벽무대를 연출해낸다.
협주곡에 강하다는 것은 큰 무대에 강하다는 것이고 오케스트라와의 일치감을 위해
자기 모든 열정을 거기 바친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활을 잡고 얼마나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지 그 모습을 보노라면 손에 땀이 난다. 그는 팔과 손으로만 연주하지 않고
온 몸으로 연주한다. 오직 정확하고 간결한 한줄기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쏟아내는
열정 앞에 잠시 숙연해진다.

오래 전이라 명확하진 않으나 그가 유학 초기에 자신은 서양 경쟁자들에 비해
손이 작고 팔도 짧아 도저히 경쟁이 될 것 같지 않아 숙소에서 혼자 울었다는
기록을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몹시 애처로운 기분에 젖었다.
그는 동양인의 그 작은 손과 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토록 온 몸의 힘을 쏟아
연주하는 습관을 기른 것인가. 지금 정상에 선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터무니
없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사례에서 보듯 정경화는 고전과 낭만뿐 아니라
바르토크, 베르크, 라벨 등 현대음악에도 강한 면을 보인다.
라벨의 소나타 No.2에서 조용한 정경의 한 순간을 정갈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그가 세밀화에 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1995년 현대작곡가 피에르 불레즈의
70회 탄생기념 음악제에도 바렌보임, 폴리니 등과 함께 초빙되어 바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연주로 갈채를 받은 바도 있다. 그만큼 현대음악 해석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Return to London’, 정경화 연주를 듣다가 우연히 만난 연주의 명칭이다.
그는 런던 페스티벌 홀의, 무대가 아닌 객석 통로 복판에 서서,
당연히 청중 없는 빈 공간에서 바흐의 ‘샤콘’을 15분 동안 열연했다.
자신이 절정기를 보내던 주무대일 것이다. 몇 해만의 귀환인지 모르지만
이 연주가 들려주는 얘기가 많다는 걸 느꼈다. 15분간 이 음악을 듣고 나면 마치
곡절많은 삶의 긴 회랑을 거쳐온 것 같은 깊은 감회에 젖게된다. 여왕에게도 곡절은
있기 마련이다. 그도 스스로 위안과 다짐을 얻기 위해 이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는 바흐 음악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바흐 연주에 뭔가 미진하다고 느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가 바흐 음악 연주에도 더욱 열정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 중앙선데이 제429호 | 송영 작가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 2015.05.31
top.gif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말러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 베니스의 미로를 흐르는 선율 arcadia 2015.06.22 10252
공지 [한 컷의 과학] 지구는 또 있을까 ~ 노벨상 1 - 15 回 arcadia 2015.06.14 18353
» 음악, 나의 위안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arcadia 2015.06.03 1592
공지 리스트 ‘두 개의 전설’ · 프란치스코의 기적을 소리로 arcadia 2015.06.03 8660
공지 버클리문학회초청 문학캠프 특강의 소감 · 이용욱 교수 [1] 유봉희 2015.05.08 8450
공지 용재 오닐의 슬픈노래 中 ‘장미와 버드나무’ arcadia 2015.05.03 3451
공지 모차르트 ‘편지 이중창’ - 산들바람의 노래 arcadia 2015.04.28 3183
공지 '음악이 있는 아침' - Alice Sara Ott plays Chopin arcadia 2015.03.29 1484
공지 TV문학관 메밀꽃필무렵 - 이효석 arcadia 2015.03.26 2511
공지 TV문학관 소나기 - 황순원 원작 arcadia 2015.03.25 6564
공지 ‘봄비’… 김소월 유봉희 2015.03.19 11401
공지 미당탄생100년 - '바이칼' 호숫가 돌칼 外 arcadia 2015.01.18 881
공지 특집다큐 - 玆山魚譜 200주년 新자산어보 2부작 arcadia 2014.12.23 504
공지 겨울왕국 - Frozen - Let It Go 유봉희 2014.05.01 510
공지 버클리문학산행 ㆍ Mt.Tamalpais & Bear Valley 유봉희 2013.02.11 2389
공지 2014'시인들이뽑는시인상'수상(유봉희·한기팔) [1] 유봉희 2014.09.25 869
공지 2014 '시인들이뽑는시인상' 시상식장에서 - 유봉희 유봉희 2014.12.13 1866
공지 슈만 - 여름날의 평화 (Sommerruh ) [1] ivoire 2011.06.03 2468
공지 Steinbeck Center / Berkeley Literature [1] 유봉희 2010.07.23 3532
공지 윤동주 문학의 밤 - 버클리 문인들 [1] 유봉희 2009.09.08 1683
공지 Fine Art Exhibition · 유제경 展 [2] 유봉희 2009.06.17 9494
공지 MOM's Paintings / 어머니의 오솔길 · 유봉희 [1] 유봉희 2009.04.20 2361
공지 Wallnut's Spring / Ducks & Egg Hunting'09 [1] 유봉희 2009.04.15 1318
공지 인생덕목 (人生德目) /김수환 추기경 말씀 [1] 양승희 2009.02.27 1447
공지 Bear Creek Trail [1] 유봉희 2008.12.30 1713
공지 Earth and Environment arcadia 2009.01.06 1519
공지 산와킨강 · San Joaquin River-&-Wallnut [1] 유봉희 2008.10.25 1877
공지 [KBS 시가 있는 음악세계] 소금화석 [1] Amellia 2007.06.07 1922
공지 내 별에 가다 [1] 박영호 2006.09.30 1886
654 왼손의 드레-시와 정신-이 계절의 시인 [1] 유봉희 2022.01.29 160
653 시인의 꿈-시와 정신-이 계절의 시인 유봉희 2022.01.29 83
652 부엉이의노래-시와 정신-이 계절의 시인 유봉희 2022.01.29 121
651 그리움의 중심-시와 정신-이계절의 시인 유봉희 2022.01.29 96
650 저만큼 안에 이만큼-시와 정신-이 계절의 시인 유봉희 2022.01.29 69
649 송기한 교수 해설 - 시와 정신 2021 가을 - 이계절의 시인 [1] 유봉희 2022.01.28 66
648 Lonely Shepherd by Zamfir eubonghee 2018.05.25 265
647 Secret Garden-poeme [1] eubonghee 2018.05.20 148
646 Leo Rojas - The Lonely Shepherd 유봉희 2018.05.10 8560
645 한국일보 기사 (손수락기자) 유봉희 시집 출간 [2] eubonghee 2018.02.10 248
644 Landscapes 유봉희 2017.08.08 196
643 Patagonia [1] 유봉희 2017.08.06 713
642 17 Most Unreal Rock Formations [1] 유봉희 2017.07.04 225
641 Amazing Places on Our Planet [4] 유봉희 2017.05.09 314
640 송정란입니다 [1] 송정란 2016.07.15 202

회원:
3
새 글:
0
등록일:
2015.03.17

오늘:
14
어제:
36
전체:
874,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