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2009.04.29 05:48
천적(天敵)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無空 이 순 종
1.
나는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내가 근무하던 GOP 아래 지명(地名)은 해안(亥安)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6ㆍ25때 ‘펀치 볼(punch-ball)’이란 별칭을 얻은 최대격전지이기도 한 곳이다. 이를테면, 모래사장에 주먹으로 내리쳤을 때 주먹이 닿은 자리만 옴폭 들어간 분지형상이 생기는데 해안면(亥安面)이 꼭 그렇게 생겨서 당시 참전 외국인들은 펀치 볼로 불렀다. 산 정상 초소에서 보면 해안(亥安)마을은 어쩌면 그렇게 화채 그릇을 똑 닮은 지형인지 참 신기할 정도였다.
해안(亥安)을 풀이하면 ‘돼지가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해안(亥安)은 뱀이 너무 많아 마을 사람들이 도통 바깥출입을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시제(時祭)를 지내면서 유명한 스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신 스님은 뱀과 돼지는 상극관계이니 돼지를 풀어 기르면 뱀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스님 말에 따라 돼지를 방목하였는데 과연 신기하게도 뱀이 없어져 주민들이 집 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이 때 부터 해안면(海安面)을 해안면(亥安面)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상극(相剋)관계, 즉 천적(天敵)이 공존한다. 개구리의 천적은 뱀이고, 뱀은 돼지가 천적일 수밖에 없다. 돼지는 뱀만 보면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다고 한다. 설령 독을 가진 뱀에 물린다고 해도 워낙 지방이 많아 뱀의 맹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하니 무서울 게 없는 독사도 돼지를 보면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으랴.
2.
활어(活魚) 수송차에 얽힌 미국의 이야기이다. 미국은 워낙 광대한 대륙이어서 동부 대서양 연안에서 잡은 활어들을 수조(水槽)에 실어 서부로 운송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죽는 놈이 부지기수이며 살아남은 물고기들도 대부분 시들시들해져 버린다. 싱싱하게 운송할 수 있다면 더 낳은 상품가치로 팔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활어들을 아주 싱싱한 채 운송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의 수조차(水槽車)에서 나온 활어들은 갓 잡아 올린 신선한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운반 비밀을 알고 보니 활어조(活漁槽) 안에 천적인 작은 상어를 넣어 운반한 것이다. 몇몇 활어들은 ‘상어 밥’이 되었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아주 싱싱한 채 오랜 시일을 견뎌냈다고 한다. 천적인 상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를 잡아먹는 놈과 함께 있어서 살 수 있었다.’라는 묘한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쯤 되면 천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극제가 되어 생동감 있는 삶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3.
지네는 닭만 보면 ‘걸음아 날 살려라’ 꽁무니를 빼기에 바쁘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골 지네 많은 집에서는 닭을 마당에 풀어 키웠다고 한다. 지네 처지에서 보면 닭의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 더욱 재미나는 것은 지네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가 닭고기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약용으로 쓰인 지네(오공蜈蚣)를 잡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항아리에 닭의 뼈를 넣어 유인하였으니 역설적으로 닭은 지네의 ‘밥’인 셈이다.
자연계에서 천적관계가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흔히 아는 고양이와 쥐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말이 있듯이 개와 원숭이 또한 태생적 원수가 아니던가.
동양에서는 천적과 유사한 뜻으로 상극(相剋)이란 말을 써왔다. 상극관계가 꼭 덩치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돼지한테 새우젓을 먹이면 죽는다고 하니 이 둘 또한 상극이요, 이를 활용해서 돼지고기와 새우젓을 함께 먹으니 상극을 이용한 음식궁합이 생겨난 것이다. 소를 배나무에 오래 매어 놓으면 죽는다고 한다. 하여 쇠고기 육회에는 배를 채로 썰어서 섞어 먹는다. 그 역시 오묘한 상극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싶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용어는 힘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풍수에서 좌청룡 우백호를 두고 명당을 구하니 이 또한 상극을 한데 어우르는 음양의 법칙과도 같다.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자연계에서 천적이 없는 존재는 점차 자멸하고, 천적이 있는 존재는 살아남는다고 한다. 천적이 있어야 게으름과 나태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풍수지리 현장답사를 했다. 노서하전(老鼠下田) 명당은 앞쪽에 고양이 형태의 지형물이 마주 보고 있어야만 그 터전을 생기 있게 한다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문득 나의 천적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끊임없이 나태를 경책(警責)하고 긴장과 생기를 불어넣는 나의 천적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 밤도 기어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2009. 4. 29.)
※GOP
:General Out Post 일반전초라는 군사용어, 비무장지대에 있음.
:우리나라 휴전선은 군사분계선이라 하는데 이 군사 분계선 북으로 2킬로미터 선을 북방한계선, 남으로 2킬로미터가 남방한계선이라 한다. 그 남방한계선이 GOP이다.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를 비무장지대(DMZ)라고 한다.
※노서하전(老鼠下田) 명당
:늙은 쥐가 풍요로운 곡식을 먹고자 밭으로 내려오는 지형을 말함.
:쥐는 부(富)를 상징한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無空 이 순 종
1.
나는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내가 근무하던 GOP 아래 지명(地名)은 해안(亥安)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6ㆍ25때 ‘펀치 볼(punch-ball)’이란 별칭을 얻은 최대격전지이기도 한 곳이다. 이를테면, 모래사장에 주먹으로 내리쳤을 때 주먹이 닿은 자리만 옴폭 들어간 분지형상이 생기는데 해안면(亥安面)이 꼭 그렇게 생겨서 당시 참전 외국인들은 펀치 볼로 불렀다. 산 정상 초소에서 보면 해안(亥安)마을은 어쩌면 그렇게 화채 그릇을 똑 닮은 지형인지 참 신기할 정도였다.
해안(亥安)을 풀이하면 ‘돼지가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해안(亥安)은 뱀이 너무 많아 마을 사람들이 도통 바깥출입을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시제(時祭)를 지내면서 유명한 스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신 스님은 뱀과 돼지는 상극관계이니 돼지를 풀어 기르면 뱀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스님 말에 따라 돼지를 방목하였는데 과연 신기하게도 뱀이 없어져 주민들이 집 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이 때 부터 해안면(海安面)을 해안면(亥安面)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상극(相剋)관계, 즉 천적(天敵)이 공존한다. 개구리의 천적은 뱀이고, 뱀은 돼지가 천적일 수밖에 없다. 돼지는 뱀만 보면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다고 한다. 설령 독을 가진 뱀에 물린다고 해도 워낙 지방이 많아 뱀의 맹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하니 무서울 게 없는 독사도 돼지를 보면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으랴.
2.
활어(活魚) 수송차에 얽힌 미국의 이야기이다. 미국은 워낙 광대한 대륙이어서 동부 대서양 연안에서 잡은 활어들을 수조(水槽)에 실어 서부로 운송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죽는 놈이 부지기수이며 살아남은 물고기들도 대부분 시들시들해져 버린다. 싱싱하게 운송할 수 있다면 더 낳은 상품가치로 팔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활어들을 아주 싱싱한 채 운송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다. 그의 수조차(水槽車)에서 나온 활어들은 갓 잡아 올린 신선한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운반 비밀을 알고 보니 활어조(活漁槽) 안에 천적인 작은 상어를 넣어 운반한 것이다. 몇몇 활어들은 ‘상어 밥’이 되었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아주 싱싱한 채 오랜 시일을 견뎌냈다고 한다. 천적인 상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를 잡아먹는 놈과 함께 있어서 살 수 있었다.’라는 묘한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쯤 되면 천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극제가 되어 생동감 있는 삶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3.
지네는 닭만 보면 ‘걸음아 날 살려라’ 꽁무니를 빼기에 바쁘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골 지네 많은 집에서는 닭을 마당에 풀어 키웠다고 한다. 지네 처지에서 보면 닭의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 더욱 재미나는 것은 지네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가 닭고기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약용으로 쓰인 지네(오공蜈蚣)를 잡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항아리에 닭의 뼈를 넣어 유인하였으니 역설적으로 닭은 지네의 ‘밥’인 셈이다.
자연계에서 천적관계가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흔히 아는 고양이와 쥐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말이 있듯이 개와 원숭이 또한 태생적 원수가 아니던가.
동양에서는 천적과 유사한 뜻으로 상극(相剋)이란 말을 써왔다. 상극관계가 꼭 덩치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돼지한테 새우젓을 먹이면 죽는다고 하니 이 둘 또한 상극이요, 이를 활용해서 돼지고기와 새우젓을 함께 먹으니 상극을 이용한 음식궁합이 생겨난 것이다. 소를 배나무에 오래 매어 놓으면 죽는다고 한다. 하여 쇠고기 육회에는 배를 채로 썰어서 섞어 먹는다. 그 역시 오묘한 상극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싶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용어는 힘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풍수에서 좌청룡 우백호를 두고 명당을 구하니 이 또한 상극을 한데 어우르는 음양의 법칙과도 같다.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자연계에서 천적이 없는 존재는 점차 자멸하고, 천적이 있는 존재는 살아남는다고 한다. 천적이 있어야 게으름과 나태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풍수지리 현장답사를 했다. 노서하전(老鼠下田) 명당은 앞쪽에 고양이 형태의 지형물이 마주 보고 있어야만 그 터전을 생기 있게 한다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문득 나의 천적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끊임없이 나태를 경책(警責)하고 긴장과 생기를 불어넣는 나의 천적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 밤도 기어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2009. 4. 29.)
※GOP
:General Out Post 일반전초라는 군사용어, 비무장지대에 있음.
:우리나라 휴전선은 군사분계선이라 하는데 이 군사 분계선 북으로 2킬로미터 선을 북방한계선, 남으로 2킬로미터가 남방한계선이라 한다. 그 남방한계선이 GOP이다.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를 비무장지대(DMZ)라고 한다.
※노서하전(老鼠下田) 명당
:늙은 쥐가 풍요로운 곡식을 먹고자 밭으로 내려오는 지형을 말함.
:쥐는 부(富)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