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 길벗의 호남 여성론
2009.05.0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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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 진수 '호남 우먼파워' 실체!”
<기고>김우영, “21세기는 女性이 세상을 이끌 것”
김우영 작가
◇ 여고 졸업생 소녀의 잠재된 호남 우먼파워
나는 충청도 서천의 외진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소년기와 스무살 초반에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스무살 중반기에는 청바지와 장발, 긴 구두굽에 도깨비빗을 뒷주머니에 쑥 찔러 넣고 다니며 서울에서 허접하게 생활하였다.
서울에서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형님이 하시는 사업을 도와주며 그럭저럭 서른살 문턱을 향하여 세월의 주름살을 넘기고 있었다.
이때 소년시절부터 좋아했던 문학이란 화두(話頭)를 향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나의 문학입문 동인회(同人會)였던 ‘나아가니 문학회’와 ‘한국순례문학회’가 나의 문학청년시절의 모태(母胎)이다.
그 당시 문학청년시절에 만난 사람이 바로 수필을 쓴 다는 ‘미스 김(김애경)’이었다. 당시 미스 김은 고향 전북 고창에서 고창여고를 막 졸업하고 앳띤 단발머리로 서울에 올라와 오빠집에 머물고 있었다. 미스 김과 나는 모임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친하지는 않았다. 모임에서 만나면 서로 회원정도로써 눈길 인사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였다.
1983년 12월 서울 동대문 제기동에서 우린 커피숍을 빌려 ‘윤동주 문학의 밤’ 행사를 기획하였다. 당시 윤동주 시인의 애제자 연세대학교 신동욱 국문과 교수와 마광수 교수를 초청하여 윤동주 시인의 업적과 시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다하여 심도있게 토론을 벌이며 열띤 행사를 가졌다.
몇 달을 준비한 행사를 마치니 몸과 마음이 나른하였다. 아마도 경험이 없는 문학청년시절 서울에서 처음 기획한 행사라서 긴장을 많이 한 탓 일게다. 행사장을 빠져나오며 나는 외쳤다. “길 떠나는 그대 뒷모습이 아름다워라!” 별명이 길손이요, 유독히 길 떠남을 좋아하는 나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행사를 마치고 머리도 식힐 겸 어디로 훌쩍 여행이나 다녀오기 위해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제기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뒤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인기척이 들리는 게 아닌가?
뒤를 바라보니 함께 활동하는 미스 김이 나를 따라 지하철을 타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쩐 일 이예요? 이쪽이 집이던가요?” “집 방향은 맞은데 집에 가는 것 아니고 그냥 우영씨 가는 곳을 따라가려고요.”
▲ 나의 문학입문 동인회(同人會)였던 ‘나아가니 문학회’와 ‘한국순례문학회’가 나의 문학청년시절의 모태(母胎)이다.
그 당시 문학청년시절에 만난 사람이 바로 수필을 쓴 다는 ‘미스 김(김애경)’이었다.
동행(同行)이란 기쁜 맘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마침 잘 되었네요. 혼자서 어디론가 가려던 여행길에 동지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아요.” 미스 김은 방긋 웃으며 반가워한다. “저도 잘 되었네요. 우영씨와 함께 여행해서요.”
“좋아요. 미스 김.” 둘이는 즉석에서 의기투합이 되었다. 지하철 영등포역에서 내려 일반 열차 플렛트홈으로 옮겼다. 휙--휙-- 스치는 플렛트홈에 서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열차를 타자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자, 우리 목적지도 목표도 없으니 지금부터 제일 먼저 오는 열차를 타는 거예요.” “좋아요. 굿…….!” 손을 걸고 파이팅을 외쳤다. 잠시 후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플렛트홈으로 들어온다. 호남선 야간열차였다.
소주와 오징어를 준비한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둘이는 까아만 밤길을 달리는 철마에 몸을 싣고 중원평야를 거쳐 호남들을 향하여 달렸다.
까아만 어둠이 하늘로 하늘로 걷히며 여명이 다가올 무렵에 열차는 정읍역에 숨 가쁘게 도착하였다. 우리는 출출하여 역 앞 식당으로 가서 따끈한 떡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여행 뒤에서 오는 피로함을 덜기 위하여 식당 뒷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왜냐하면 얼마후이면 날이 새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허름한 단칸방에서 스무살의 혈기방장한 남녀가 앉아 있기에는 서로 겸연쩍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는 남녀의 문턱을 넘어 성(城)에 입성했다. 그 아름답고 성스러운 남녀의 운우지정(雲雨之情)불이 붙은 것이다.
시인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우리는 ‘요구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스러운 경지.’로 승화되었다. 서로 평소에 갈급하게 사랑했거나 어떤 목적의 이상(理想)도 원하지 안했다. 다만 둘 만의 공간에서 강요가 아닌 진정한 한 남성을, 한 여성을 자율적 선택으로 공감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마치 태초에 밤과 낮이 생기고, 남녀가 나뉘어져 세상이 탄생한 것 같은 신비와 환희가 바로 나와 미스 김의 결합이었다. 그대 그리고 내가 아닌 ‘우리’라는 정(情)의 울타리가 생긴 것이다. 그야말로 철로 위에 시나브로 맺어진 그런 우리가 되었다.
이제는 미스 김과 우영은 아닌 정인(情人)이 되어 버렸다. 거리감이 좁혀져 길거리를 팔장을 끼고 걷는 능청스런 ‘연인’이 되었다. 미국의 물리학자 ‘로렌스’가 말 한 것처럼 ‘인간과 인간의 결합은 육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또한 시인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이 말에 우리를 쌍수를 들고 동의하는 현실을 체감했다.
평소 표정이 그저 그런 보편타당한 모습의 미스 김은 밝고 명랑한 얼굴을 보면서 철학자 ‘피치글리리라’의 ‘여자의 행복은 바로 유혹자를 만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정읍역 떡국집 사건(!)이 있는지 1년여 지났을까? 시골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우리 서울에서 급히 시골로 달려가 슬픔에 영전을 서성이는데 집안 아주머니가 말씀을 하신다.
“야, 느으덜 사귀냐? 앞으로 결혼을 헐라믄 아부지 영전(靈前)에 찬물 떠놓고 상중예식(喪中禮式)을 치뤄라이. 그러믄 돌아가신 느희 아부지도 좋아허실게다.”
아버님을 잃은 불효자로써 슬픔에 젖은 나와 미스 김은 상중예식을 올렸다. 나는 스무살 청년시절 입었던 퀘퀘한 바지와 와이셔츠를 꺼내 툭툭 털며 입었은 차림으로, 미스김은 어머님의 구겨진 한복을 입고 시골집 마당에서 찬물 떠놓고 서로 마주 보며 맞절을 했다. 동네 어르신과 일가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충청도 관례에 따라 망부(亡父)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상중예식을 치뤘다.
우연히 함께 한 열차여행이 평생 열차 레일 위를 함께 가는 ‘부부’가 되었다. 따라서 충청도 청바지와 더벅머리 총각이 전라도 고창 처녀에게 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후 충청도 서천과 전라도 고창을 오가며 아이 셋을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 우연히 함께 한 열차여행이 평생 열차 레일 위를 함께 가는 ‘부부’가 되었다. 따라서 충청도 청바지와 더벅머리 총각이 전라도 고창 처녀에게 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 '억척여성 근검절약' 의 진수
충청도 외진 마을에서 태어나 애오라지 순박 일변도의 길만 걸어왔고, 삶에 대한 억척이나 노력에 부족함이 가득한 나는 미스김 즉, 지금의 아내 김애경을 만나 살면서 아내의 억척성과 근면성에 놀랐다.
내가 직장에 나가면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부업을 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움직였다. 아이 셋 양육에 직장을 나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집에서 부업을 하기 위해서 읍내에 나가 가계를 기웃거리며 부업거리를 가져와 하루 종일 작은 방안에 앉아 일을 했다.
부업의 종류는 수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종이봉투, 구슬 악세사리, 인형만들기 등을 하기 위해서 읍내에 나가 가계를 기웃거리며 부업거리를 가져와 하루 종일 작은 방안에 앉아 부업거리를 가지고 시름을 했다.
이렇게 번 돈은 몇 푼 안 되지만 내가 직장에서 퇴근 후 동료들과 1-2시간동안 잠깐 마시는 술값 정도를 하루 종일 애를 태워 돈을 벌곤 했다.
나의 박봉에 보탬을 주기위해 번 돈으로 아이들 간식거리와 옷 사주고, 유치원에 보내곤 했다. 가정주부치고는 꽤 큰 돈 벌이였다.
시장을 나가면 어디 싼거리가 없는지, 덤으로 주는 데는 없는지 시장골목을 여러번 누비고 다녔다.
매년 가을 김장철이면 아내는 ‘시래기 줍는 아낙’이 된다. 남들이 김장을 하고 버리는 무우나 배추 시래기감을 찾아 시장 채소전 곳곳을 돌며 보자기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매년 ‘시래기 줍는 아낙’ 모습이 비쳐지자 주변에서는 이랬다.
“참 지독한 애 엄마야” “저러니 전라도 억척이지 ……” 이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은 시래기는 집 처마에 쭈욱 매달아 말려 놓는다. 이 시래기로 우리 5가족은 다른 반찬을 사지 않고 시래기국으로 춥고 배고픈 긴 겨울을 낳곤 했다.
근래 아내 김애경은 1인 5역을 해내는 중년 우먼파워로 맹렬 정진하고 있다.
성악가로 활동과 화가로의 작업, 뜨개질 여도사, 수필가, 아르바이트 등이 그 것이다.
첫 째는 성악가로써의 노력이다. 여학교시절부터 해온 성악공부를 대전에 정착한 몇 년 전부터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
▲ 현모양처 아내의 재능은 너무 무궁무진하다. 그림에도 그 소질이 너무 다분하다.
나름대로 노력한 덕분에 요즘은 출연료를 받으며 각종 무대에 서고 있다. 주요한 레파토리는 ‘그리운 금강산’ ‘ 시월에 어느 멋진 날에’ ‘오델미오 아마토벤’ ‘님이 오시는지’ 등이다. 벌써 예금통장에 입금된 출연료는 상당하다. 이 돈으로 두 딸 혼수감을 사준다는 계획을 야무지게 세워놓고 있다.
둘째,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별하게 어느 유명한 화가에게 사사를 받거나 전문학원을 다닌바 없지만 이웃 화가들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어깨너머로 구경한 눈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현재 10점이나 된다. 주로 풍경화와 꽃, 산수를 그린다. 50여점이 모아지면 전시회를 한다는 계획이다.
셋째, 아내는 뜨개질 여도사이다. 웬만한 모자는 하루만에 한 개 뜨고, 웃옷이나 조끼는 2-3일이면 뜨고, 가방은 1주일 정도면 완성된다. 아내의 웬만한 의상과 모자, 가방, 장갑, 양발은 전부 자신이 손 수 뜬 수제품 장신구이다.
나와 함께 외출하여 어디를 가면 주변 여성들의 눈길이 아내의 의상이나 장신구로 쏠린다. 이런 아내와 함께 다니는 남편인 나에게도 함께 시선이 몰린다. 손수 뜬 의상과 모자,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내를 보고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부러운 모양이다. 이것도 뜨개질 여도사와 함께 사는 나의 축복이다, 즐거움이다.
넷째, 아내는 수필가이다. 그간 KBS 리포터를 비롯하여 충남 도정신문 명예기자, 대전일보, 충청일보 등에 여성수필란에 고정으로 연재하는 맹렬 여성 에세이스트이다. 이 덕분에 각종 노천명 문학상을 타는 것을 비롯하여 각종 상을 휩쓸고 수필집도 2권이나 출간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다섯째. 아내는 1년 중 거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구청 등에서 지역 주민을 일시 고용하여 추진하는 일이 자주 있다. 예를 들면 주택 인구조사원, 교통량조사원 등의 용역을 하며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돈은 우리 가족 5명의 보험료로 고스란히 지출되고 있다. 이 외에도 긴요한 가용돈으로 쓰여지고 있어 나의 박봉에 설움을 덜어주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한 가정의 엄마와 아내로써의 임무도 물론 충실하고 있지만 이 일은 어느 주부나 하는 일이기에 이곳에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 충청도 외진 마을에서 태어나 애오라지 순박 일변도의 길만 걸어왔고, 삶에 대한 억척이나 노력에 부족함이 가득한 나는 미스김 즉, 지금의 아내 김애경을 만나 살면서 아내의 억척성과 근면성에 놀랐다.
◇ 여성주도 21세기… 그 정신철학 '호남우먼'
호남지역은 고대로부터 한양 조정에서 이런저런 사정에 의하여 밀려난 선비들이 주로 오는 귀양살이의 도피처였다. 해안가의 외딴섬과 산골 등은 조정으로부터 보내기 쉬운 귀양처였다. 따라서 호남지역은 당시 조정으로부터 대접받는 곳이라기보다 귀양이나 보내는 한적한 외진 땅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예로부터 백제권역으로써 충청도와 함께 분류된다. 삼국시대 때 신라와 당나라 등으로부터 수많은 침입을 받으며 인고의 세월의 견디어낸 지역이다. 또한 서해와 남해안을 끼고 있어 임진왜란 때 수시로 침입하는 왜적의 출몰로 인하여 인명피해와 수탈을 겪는다.
기나긴 군사정권시절에는 위정자들에 의하여 비개발지역으로 묶여 빈한한 지역으로 구조적으로 천대받은 비경제적 곳이다. 그리고 근대사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더욱 호남권을 어려운 수렁으로 내모는데 한 축을 이룬다.
숱한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호남여성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삽과 호미를 들어야 했고, 몸소 경운기를 몰고 일터로 나가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호남여성의 우먼 파워는 만들어 졌던 것이다.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며느리와 딸에게 딸은 손녀에게 억세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긴박한 현실을 인식시켜 억척여성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오늘날 호남여성들은 그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것처럼 그 환경에 오랫동안 몸에 배어 살아왔기에 어디를 가나 팔을 걷어 부치고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거친 광야를 걸어 나가는 것이다.
그럼 호남여성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또는 그 저력과 역동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분하겠지만 호남여성과 26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우선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먹고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일터에서 노동을 해왔다. 남편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거나 소식이 없는 터에 현재의 생계를 여성 그들이 꾸려나가야 하겠기에 그렇다.
또 한양의 조정으로부터 유배당하여 온 선비들은 현실의 답답함을 대부분 책 저술이나 시, 그림 등의 예술로 승화시켜 나갔다. 학문과 예술의 지향성, 이런 양반가 귀양선비들과 함께 살며 예술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도 답답한 현실을 이를 통하여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중앙정부의 비경제적, 비개발이란 편향적 대접을 받으며 식솔이 굶거나 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산으로, 바다로 나가 먹고 살기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을 것이다.
▲ 아내와 한 지붕, 한 이불속에서 살아온지 26년. 가까이서 지켜본 호남여성 김애경은 분명 역사가 낳고 길러낸 억척여성이다. “21세기는 여성이 세상을 이끌 것이며, 그 기본적 정신철학이 바로 호남 우먼파워이다!”
이러한 삶의 본능적인 바탕위에서 모진 바닷바람과 거친 폭풍우를 맞으며 호남여성의 저력과 역동성은 자연스럽게 다져졌을 것이다. 요컨대 ‘일해야 먹고 산다!’ 이것이 아마도 호남여성의 정체성일 것이다.
멀리도 아닌 가까이서 함께 사는 나의 아내 김애경. 위로는 장모님, 더 나아가서는 할머니로부터 뜨거운 피를 이어받은 아내는 오늘날 아이 셋을 열심히 살고 있다. 성악가로, 화가로, 뜨개질여사로, 수필가로, 아르바이트라는 1인 5역은 물론, 기본의 가정의 엄마와 아내로써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이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26년을 지켜본 산증인 남편으로써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21세기는 여성이 세상을 이끌 것이며, 그 기본적 정신철학이 바로 호남 우먼파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