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작했었다, 국민의 마음을/김길남
2009.05.30 08:22
짐작했었다, 국민의 마음을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야간반 김길남
짐작했었다, 국민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견디다 못해 벼랑에서 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그것을 확인하려고 서울광장으로 달려갔다.
새벽잠을 설치고 택시를 탔더니 어디 놀러 가느냐고 기사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에 참석하러 간다 했더니 그 기사는 뜻 깊은 일에 동참한다고 칭찬했다. 6시에 전주종합경기장에 100여명이 모여 버스 3대에 나누어 타고 서울로 향했다. 마이크를 잡고 하는 인사말들이 울분에 차 있었다. 전주 분향소는 물론 경상남도 봉하마을까지 다녀 온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비보를 듣고 1주일 간 일손이 잡히지 않아 멍하니 지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10시 반경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사람들이 밀려 걸어갈 수가 없었다. 잘 못하면 압사사고가 날 것 같기도 했으나 질서를 잘 지켰다. 누군가 모르지만 노란 모자와 풍선을 나누어 주어 받아서 썼다. 거의 메워진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국민장 영결식이 열리는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는 초청을 받은 2,500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서울광장에 자리 잡고 일반 시민들과 호흡을 맞추어 영상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국민장 영결식장은 하트 모양의 꽃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그 아래 단에 참석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앞줄에는 유족이 앉고 한승수 한명숙 공동 장의위원장이 다음이며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앉았다. 각 정당 대표와 외교사절 및 장의위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11시가 가까워지자 이명박 대통령의 도착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우’하고 여러 말로 야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는 검정색 케딜락이었다. 노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이었을 때부터 운전을 해온 최영 기사가 운전을 했다. 아침 5시에 발인제를 올리고 봉하마을을 출발하여 중간 입장휴게소에서 잠깐 쉰 뒤 400km를 달려 11시 조금 전에 경복궁에 도착했다. 영정을 모시고 유족이 들어서자 주위에서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노대통령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해요'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11시에 송지헌 아나운서의 사회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묵념을 올렸다. 이달곤 행자부장관이 고인의 일생을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조사에는 한승수 장의위원장이 먼저 나와 인권운동과 민주주의 발전, 권위주의 타파, 서민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을 되새겼다. 어떻게 보면 개념적인 조사였다. 뒤에 나온 한명숙 전 총리는 눈물을 자아내는 인정적인 조사를 하였다. 구구절절이 참석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할 때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눈물을 훔쳤다. ‘이제 저 세상에서는 정치하지 마십시오.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라고 뼈있는 말로 조사를 마쳤다.
종교의식으로 들어가 불교계를 대표하여 권양숙 여사에게 불심을 심어준 보문사 주지 명진 스님이 나와 영가에 대한 기도를 한 뒤 반야심경을 독송하였다. 나도 합장하고 반야심경을 따라 외웠다. 기독교 대표로는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인 권오석 목사가 기도하고 합창단이 찬송가를 불렀다. 천주교에서는 고인에게 세례를 준 송기인 신부가 고별기도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원불교의 이선종 서울교구장이 천도의식을 올렸다.
고인의 생전 영상을 보여줄 때 서울광장에서는 노란풍선을 올렸다. 바람에 날려가다 떨어지면 다시 쳐 올려 온 하늘이 노란색 바다가 되었다. 노란모자와 노랑스카프, 피켓
등과 어울려 노란색 물결을 이루었다.
이어 헌화를 하였다. 유족이 먼저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나왔다. 서울광장에서는 ‘물러가라. 꺼져라.' 등 큰소리가 많이 들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결식장에서도 한 국회의원이 '이 대통령, 사죄하시오!'하며 뛰쳐나왔고, 한겨례신문에 의하면 조문객들도 못할 말을 외쳤다 한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헌화하고, 삼부요인, 정당 대표, 외국사절 등의 헌화가 이어졌다.
추모공연순서였다. 국립합창단은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상록수'를 불렀고 방은일이 아리랑과 아침이슬을 편곡한 가락을 해금으로 연주하여 애절한 느낌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삼군의장대가 21발의 조총을 쏘면서 영결식을 마쳤다.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에서는 운구차가 올 때까지 김제동의 사회로 식전행사를 가졌다. 양희은이 검은 옷을 입고 나와 윤도현 록밴드 BY의 반주로 상록수를 부르니 많은 사람이 따라 불렀고, 윤도현이 ‘후회 없이’와 ‘사랑 투’를 불렀다. 김제동이 고인의 유언에 대한 답 형식의 글을 낭독하여 국민의 마음을 대변했다. ‘아주 작은 비석을 세워 달라 했는데 우리 마음속에 잊지 못할 큰 비석을 세우겠습니다.' 등이 한 예다. ‘바보 대통령, 그러나 자랑스러웠던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 감사했습니다.’ 하며 끝냈다.
운구차가 도착하여 노제가 열렸다. 도종환 시인이 제관으로 나와 행사를 진행하였다. 여는 마당에서는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이 흰옷을 입고 혼을 부른 뒤 국립합창단이 향로를 들고 혼 맞이 노래를 부르며 한 바퀴 돌았다. 그 노래가 몹시 구슬퍼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이어 안도현 시인이 조시를 낭송할 때 검정 옷을 입은 마귀와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나와 무용을 하였는데 아리랑 가락을 배경음악으로 삶과 죽음을 표현한 듯했다. 김진경은 고인이 도운 소녀가장이었던 시인인데 조시를 낭송했고, 장시아 시인은 유서를 낭독하였다. 안숙선 명창이 조창을 부를 때도 콧등이 시큰했다. 마지막으로 진혼무를 추어 영혼을 위로하고 노제를 마쳤다.
사회자가
"노무현, 당신을 사랑합니다!"
선창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우렁차게 후창을 하였다. 고인이 즐겨 불렀던 ‘사랑으로'를 같이 부르자 하여 일제히 같이 부르니 그 소리가 하늘까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라며 여러 곳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기온이 30도가 넘고 쨍쨍 내려쬐는 햇볕 아래에서 4시간 동안이나 앉아있었더니 땀도 많이 나고 더웠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참여하기는 했지만 성숙한 우리 국민의 높은 금도를 보여 주었다.
영결식과 노제를 마치고 운구차가 서울역까지 천천히 운행하면 1,000여 개의 만장이 뒤따르고 추모객이 뒤를 이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광화문부터 서울광장을 거쳐 남대문 및 서울역까지 인도와 차도 가릴 것 없이 50만 명이 넘는 추모객으로 꽉 차서 운구차가 가지를 못했다. 나는 사람사이를 비집고 걸어서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먼저 갔다. 오는 길에 길가에서 하는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다.
‘ㅎㅈㅂ와 ㄱㅊ이 죽였다.’ '누구가 죽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을 걸.' 등이었다. 마침 우리 버스가 운구차가 지나는 길옆에 있기에 차를 타고 기다렸다. 그러나 1시간을 기다려도 행렬이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을 더 기다리니 운구차가 왔으나 서울역에서는 아주 막혀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막아섰고 가까이 가서 운구차를 만져보기라도 하려고 밀어댔다. 경찰은 있으나 손을 쓰지 못했다. 그만큼 국민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조금씩 열리는 길로 빠져 나가고 우리도 전주로 출발했다. 오면서 보니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운구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없는 곳도 있으나 거의 연결 되었다. 수원 연화장이란 화장장으로 가는 운구차를 보려고 그런 것이다. 연화장에도 2만명이 모여 기다린다고 했다. 전국의 분향소는 300여개가 넘는데 분향한 추모객은 봉하마을 분향소 100만 명을 합하여 500만 명이 넘었다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국민의 마음이 어떤가 알 수 있었다.
"이제 한 줌의 재로 변한 노 대통령님, 하늘에서나마 편히 쉬십시오.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저 세상에서 고이 잠드소서. 남은 우리들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정쟁을 하지 말고 나라를 위하는 일에 힘을 합해야겠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이 국민편만 있는 정치를 하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무섭게 여기는 정치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제발제발 부탁합니다."
(2009. 5. 30.)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야간반 김길남
짐작했었다, 국민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견디다 못해 벼랑에서 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그것을 확인하려고 서울광장으로 달려갔다.
새벽잠을 설치고 택시를 탔더니 어디 놀러 가느냐고 기사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에 참석하러 간다 했더니 그 기사는 뜻 깊은 일에 동참한다고 칭찬했다. 6시에 전주종합경기장에 100여명이 모여 버스 3대에 나누어 타고 서울로 향했다. 마이크를 잡고 하는 인사말들이 울분에 차 있었다. 전주 분향소는 물론 경상남도 봉하마을까지 다녀 온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비보를 듣고 1주일 간 일손이 잡히지 않아 멍하니 지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10시 반경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사람들이 밀려 걸어갈 수가 없었다. 잘 못하면 압사사고가 날 것 같기도 했으나 질서를 잘 지켰다. 누군가 모르지만 노란 모자와 풍선을 나누어 주어 받아서 썼다. 거의 메워진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국민장 영결식이 열리는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는 초청을 받은 2,500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서울광장에 자리 잡고 일반 시민들과 호흡을 맞추어 영상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국민장 영결식장은 하트 모양의 꽃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그 아래 단에 참석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앞줄에는 유족이 앉고 한승수 한명숙 공동 장의위원장이 다음이며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앉았다. 각 정당 대표와 외교사절 및 장의위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11시가 가까워지자 이명박 대통령의 도착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우’하고 여러 말로 야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는 검정색 케딜락이었다. 노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이었을 때부터 운전을 해온 최영 기사가 운전을 했다. 아침 5시에 발인제를 올리고 봉하마을을 출발하여 중간 입장휴게소에서 잠깐 쉰 뒤 400km를 달려 11시 조금 전에 경복궁에 도착했다. 영정을 모시고 유족이 들어서자 주위에서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노대통령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해요'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11시에 송지헌 아나운서의 사회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묵념을 올렸다. 이달곤 행자부장관이 고인의 일생을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조사에는 한승수 장의위원장이 먼저 나와 인권운동과 민주주의 발전, 권위주의 타파, 서민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을 되새겼다. 어떻게 보면 개념적인 조사였다. 뒤에 나온 한명숙 전 총리는 눈물을 자아내는 인정적인 조사를 하였다. 구구절절이 참석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할 때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눈물을 훔쳤다. ‘이제 저 세상에서는 정치하지 마십시오.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라고 뼈있는 말로 조사를 마쳤다.
종교의식으로 들어가 불교계를 대표하여 권양숙 여사에게 불심을 심어준 보문사 주지 명진 스님이 나와 영가에 대한 기도를 한 뒤 반야심경을 독송하였다. 나도 합장하고 반야심경을 따라 외웠다. 기독교 대표로는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인 권오석 목사가 기도하고 합창단이 찬송가를 불렀다. 천주교에서는 고인에게 세례를 준 송기인 신부가 고별기도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원불교의 이선종 서울교구장이 천도의식을 올렸다.
고인의 생전 영상을 보여줄 때 서울광장에서는 노란풍선을 올렸다. 바람에 날려가다 떨어지면 다시 쳐 올려 온 하늘이 노란색 바다가 되었다. 노란모자와 노랑스카프, 피켓
등과 어울려 노란색 물결을 이루었다.
이어 헌화를 하였다. 유족이 먼저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나왔다. 서울광장에서는 ‘물러가라. 꺼져라.' 등 큰소리가 많이 들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결식장에서도 한 국회의원이 '이 대통령, 사죄하시오!'하며 뛰쳐나왔고, 한겨례신문에 의하면 조문객들도 못할 말을 외쳤다 한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헌화하고, 삼부요인, 정당 대표, 외국사절 등의 헌화가 이어졌다.
추모공연순서였다. 국립합창단은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상록수'를 불렀고 방은일이 아리랑과 아침이슬을 편곡한 가락을 해금으로 연주하여 애절한 느낌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삼군의장대가 21발의 조총을 쏘면서 영결식을 마쳤다.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에서는 운구차가 올 때까지 김제동의 사회로 식전행사를 가졌다. 양희은이 검은 옷을 입고 나와 윤도현 록밴드 BY의 반주로 상록수를 부르니 많은 사람이 따라 불렀고, 윤도현이 ‘후회 없이’와 ‘사랑 투’를 불렀다. 김제동이 고인의 유언에 대한 답 형식의 글을 낭독하여 국민의 마음을 대변했다. ‘아주 작은 비석을 세워 달라 했는데 우리 마음속에 잊지 못할 큰 비석을 세우겠습니다.' 등이 한 예다. ‘바보 대통령, 그러나 자랑스러웠던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 감사했습니다.’ 하며 끝냈다.
운구차가 도착하여 노제가 열렸다. 도종환 시인이 제관으로 나와 행사를 진행하였다. 여는 마당에서는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이 흰옷을 입고 혼을 부른 뒤 국립합창단이 향로를 들고 혼 맞이 노래를 부르며 한 바퀴 돌았다. 그 노래가 몹시 구슬퍼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이어 안도현 시인이 조시를 낭송할 때 검정 옷을 입은 마귀와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나와 무용을 하였는데 아리랑 가락을 배경음악으로 삶과 죽음을 표현한 듯했다. 김진경은 고인이 도운 소녀가장이었던 시인인데 조시를 낭송했고, 장시아 시인은 유서를 낭독하였다. 안숙선 명창이 조창을 부를 때도 콧등이 시큰했다. 마지막으로 진혼무를 추어 영혼을 위로하고 노제를 마쳤다.
사회자가
"노무현, 당신을 사랑합니다!"
선창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우렁차게 후창을 하였다. 고인이 즐겨 불렀던 ‘사랑으로'를 같이 부르자 하여 일제히 같이 부르니 그 소리가 하늘까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라며 여러 곳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기온이 30도가 넘고 쨍쨍 내려쬐는 햇볕 아래에서 4시간 동안이나 앉아있었더니 땀도 많이 나고 더웠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참여하기는 했지만 성숙한 우리 국민의 높은 금도를 보여 주었다.
영결식과 노제를 마치고 운구차가 서울역까지 천천히 운행하면 1,000여 개의 만장이 뒤따르고 추모객이 뒤를 이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광화문부터 서울광장을 거쳐 남대문 및 서울역까지 인도와 차도 가릴 것 없이 50만 명이 넘는 추모객으로 꽉 차서 운구차가 가지를 못했다. 나는 사람사이를 비집고 걸어서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먼저 갔다. 오는 길에 길가에서 하는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다.
‘ㅎㅈㅂ와 ㄱㅊ이 죽였다.’ '누구가 죽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을 걸.' 등이었다. 마침 우리 버스가 운구차가 지나는 길옆에 있기에 차를 타고 기다렸다. 그러나 1시간을 기다려도 행렬이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을 더 기다리니 운구차가 왔으나 서울역에서는 아주 막혀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막아섰고 가까이 가서 운구차를 만져보기라도 하려고 밀어댔다. 경찰은 있으나 손을 쓰지 못했다. 그만큼 국민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조금씩 열리는 길로 빠져 나가고 우리도 전주로 출발했다. 오면서 보니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운구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없는 곳도 있으나 거의 연결 되었다. 수원 연화장이란 화장장으로 가는 운구차를 보려고 그런 것이다. 연화장에도 2만명이 모여 기다린다고 했다. 전국의 분향소는 300여개가 넘는데 분향한 추모객은 봉하마을 분향소 100만 명을 합하여 500만 명이 넘었다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국민의 마음이 어떤가 알 수 있었다.
"이제 한 줌의 재로 변한 노 대통령님, 하늘에서나마 편히 쉬십시오.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저 세상에서 고이 잠드소서. 남은 우리들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정쟁을 하지 말고 나라를 위하는 일에 힘을 합해야겠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이 국민편만 있는 정치를 하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무섭게 여기는 정치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제발제발 부탁합니다."
(2009.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