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효자
2011.02.03 07:06
현대판 효자
김 학
효자불여악처(孝子不如惡妻)라 했던가? 아무리 효자라 해도 사악한 아내만 못하다고 한 선인들의 지혜는 참으로 옳다. 옛사람이나 요즘사람이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이다. 오랜 경험에서 발굴해낸 속담이려니 싶다. 이 속담 하나로 현대 노부모들의 공감까지 자아내는 걸 보면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2011년 신묘년 설날, 이틀 전 서울에서 전주까지 올 때 고속도로에서 무려 8시간 반이나 보냈던 큰아들네 식구들이 오늘은 이른 아침에 떠났다. 새벽에 차례를 모시고 세배를 하자마자 오전 8시에 서울로 출발했다. 눈에 밟히는 손자손녀들을 보낸 뒤 적적하여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가며 두어 프로그램을 보았다. 2시간 반쯤이나 지났을까?
"할아버지, 서울에 도착했어요!"
벌써 서울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 큰아들처럼 서둘러 떠난 이들이 없어서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 설이나 추석 때 귀성객들은 '올 때는 느리게 갈 때는 빠르게'란 구호가 걸맞은 것 같다.
큰아들네 식구가 떠나자 우리 부부는 예전처럼 텅 빈 집에서 또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신바람 전도사 황수관 교수가 특강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노라니 지상파방송사마다 설 특집방송을 편성하여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따라 하하호호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한복을 입고 설날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우리 집 분위기까지 바꿔주지는 못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따분하여 컴퓨터를 켰다. 여기저기서 보내 준 메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하나하나 열어보며 보낸 이들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하고, 혼자 보기 아까운 내용은 지인들에게 전달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컴퓨터로 메일을 주고받는 것은 관심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받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ID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발신자는 그 수신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모르는 수신자라면 발신자는 그 이름만이라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기에 메일을 자주 주고받노라면 더 정답게 느껴진다.
컴퓨터 즐겨찾기에 입력해 놓고 평소 자주 놀러 다니던 홈페이지나 카페, 불로그 등을 두루두루 누빈다. 그러면 시간은 쉬지 않고 잘도 달린다. 한두 시간쯤은 금세 사라진다. 혼자 컴퓨터와 놀아도 즐겁기 짝이 없다. 컴퓨터는 바둑이나 장기처럼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예전에 점찍어 두었던 글감을 불러내어 글을 쓰기도 한다. 전화소리와 식구들의 발자국소리 등 방해꾼들이 없으니 글쓰기 진도가 잘 나가서 좋다.
연금과 텔레비전 그리고 컴퓨터는 현대판 효자다. 텔레비전은 지상파방송만 보려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니 더 많은 돈을 들여 유선방송이나 위성방송까지 연결할 필요도 없다. 또 컴퓨터는,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텔레비전보다 더 박학다식한 지식과 정보의 보고요, 만물박사이며, 상냥한 개인 비서다.
나는 내 곁에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있어서 행복하다. 설날 찾아오셨던 조상님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없을 때 사셨는데 얼마나 심심하셨을까? 아니, 그때는 농경사회 대가족시대였으니 심심할 짬도 없었을까?
전주에서 아들딸을 낳고 가르쳐서 다 서울로 보내고 나니 우리 부부의 노후가 쓸쓸하다. 매주 주말마다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옆집 노부부는 사람 사는 맛이 느껴져 무척이나 부럽다. 그럴 때마다 맛있는 요리를 하면서 왜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놓는지 모를 일이다.
어려울 때 우리 곁을 지켜 줄 마지막 사람은 가족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족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없다면 많은 재물을 모으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무슨 의미와 즐거움이 있으랴?
나도 우리 아들딸들이 전주에서 살도록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는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서울에 빨리 도착한 큰아들 가족은 고생을 하지 않아 좋겠지만 일찍 떠나보낸 부모의 섭섭한 마음을 모를 것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한 속담은 누가 만든 것일까? 그 사람을 수소문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다.
(2011. 2. 3.)
*김학
1980년 월간문학 등단/《수필아, 고맙다》등 수필집 11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신곡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예술상, 목정문화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김 학
효자불여악처(孝子不如惡妻)라 했던가? 아무리 효자라 해도 사악한 아내만 못하다고 한 선인들의 지혜는 참으로 옳다. 옛사람이나 요즘사람이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이다. 오랜 경험에서 발굴해낸 속담이려니 싶다. 이 속담 하나로 현대 노부모들의 공감까지 자아내는 걸 보면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2011년 신묘년 설날, 이틀 전 서울에서 전주까지 올 때 고속도로에서 무려 8시간 반이나 보냈던 큰아들네 식구들이 오늘은 이른 아침에 떠났다. 새벽에 차례를 모시고 세배를 하자마자 오전 8시에 서울로 출발했다. 눈에 밟히는 손자손녀들을 보낸 뒤 적적하여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가며 두어 프로그램을 보았다. 2시간 반쯤이나 지났을까?
"할아버지, 서울에 도착했어요!"
벌써 서울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 큰아들처럼 서둘러 떠난 이들이 없어서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 설이나 추석 때 귀성객들은 '올 때는 느리게 갈 때는 빠르게'란 구호가 걸맞은 것 같다.
큰아들네 식구가 떠나자 우리 부부는 예전처럼 텅 빈 집에서 또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신바람 전도사 황수관 교수가 특강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노라니 지상파방송사마다 설 특집방송을 편성하여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따라 하하호호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한복을 입고 설날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우리 집 분위기까지 바꿔주지는 못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따분하여 컴퓨터를 켰다. 여기저기서 보내 준 메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하나하나 열어보며 보낸 이들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하고, 혼자 보기 아까운 내용은 지인들에게 전달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컴퓨터로 메일을 주고받는 것은 관심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받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ID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발신자는 그 수신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모르는 수신자라면 발신자는 그 이름만이라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기에 메일을 자주 주고받노라면 더 정답게 느껴진다.
컴퓨터 즐겨찾기에 입력해 놓고 평소 자주 놀러 다니던 홈페이지나 카페, 불로그 등을 두루두루 누빈다. 그러면 시간은 쉬지 않고 잘도 달린다. 한두 시간쯤은 금세 사라진다. 혼자 컴퓨터와 놀아도 즐겁기 짝이 없다. 컴퓨터는 바둑이나 장기처럼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예전에 점찍어 두었던 글감을 불러내어 글을 쓰기도 한다. 전화소리와 식구들의 발자국소리 등 방해꾼들이 없으니 글쓰기 진도가 잘 나가서 좋다.
연금과 텔레비전 그리고 컴퓨터는 현대판 효자다. 텔레비전은 지상파방송만 보려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니 더 많은 돈을 들여 유선방송이나 위성방송까지 연결할 필요도 없다. 또 컴퓨터는,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텔레비전보다 더 박학다식한 지식과 정보의 보고요, 만물박사이며, 상냥한 개인 비서다.
나는 내 곁에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있어서 행복하다. 설날 찾아오셨던 조상님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없을 때 사셨는데 얼마나 심심하셨을까? 아니, 그때는 농경사회 대가족시대였으니 심심할 짬도 없었을까?
전주에서 아들딸을 낳고 가르쳐서 다 서울로 보내고 나니 우리 부부의 노후가 쓸쓸하다. 매주 주말마다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옆집 노부부는 사람 사는 맛이 느껴져 무척이나 부럽다. 그럴 때마다 맛있는 요리를 하면서 왜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놓는지 모를 일이다.
어려울 때 우리 곁을 지켜 줄 마지막 사람은 가족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족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없다면 많은 재물을 모으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무슨 의미와 즐거움이 있으랴?
나도 우리 아들딸들이 전주에서 살도록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는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서울에 빨리 도착한 큰아들 가족은 고생을 하지 않아 좋겠지만 일찍 떠나보낸 부모의 섭섭한 마음을 모를 것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한 속담은 누가 만든 것일까? 그 사람을 수소문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다.
(2011. 2. 3.)
*김학
1980년 월간문학 등단/《수필아, 고맙다》등 수필집 11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신곡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예술상, 목정문화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