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

2020.02.16 23:43

구연식 조회 수:9

고향 땅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고향 땅은 땅값이 가장 비싼 부자마을도 아니다. 고향 땅은 경치가 좋은 가장 아름다운 마을도 아니다. 고향 땅은 사람 살기 가장 좋은 편리한 마을도 아니다. 고향 땅은 나의 영혼에 탯줄을 이어준 곳이다. 그래서 나는 공직 퇴임 후 아버지가 산 넘고 논길을 지나 익산시 왕궁면사무소에서 구연식이란 이름 석 자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고향 면사무소에서 다시 주소지를 고향으로 되돌려 놓았다.

 

 고향 땅은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체온이 식지 않은 곳이다. 옥신각신하면서도 좁은 이불속에서 동기간의 정으로 추위를 녹이고 오순도순 살던 곳이다. 마을의 대소사 때 이웃끼리 기뻐해 주고 위로해주었던 송진 덩어리처럼 끈끈한 정으로 뭉쳐진 소박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가슴에 저미는 사연들이 쌓여있는 땅이다. 그래서 고향 땅은 손으로 만져지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더 많은 땅이다.

 

 나는 고향 익산시 왕궁면 부상마을에 갈 때는 가끔 의도적으로 아래뜸에서 위뜸까지 고샅길을 샅샅이 훑어보는 습관이 있다. 모정(茅亭) 앞에서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던 정자나무는 모정 대신 마을회관을 짓는다고 옮겨 심더니 고사하고 말았다. 정답던 모정을 몰아내고 이방인처럼 눌러앉은 시멘트 가루로 분칠한 마을회관이 미워서 정자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꼬불꼬불 고샅길을 걸어서 동네 한 바퀴 돌아보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동네 사람들의 살림을 모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널찍한 포장길에 자가용차들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은 없고 차만 지키고 있는 동네가 되었다. 교도소 담보다 더 높은 담장 안에는 인기척도 없다. 불청객을 지키는 검둥이들이 발걸음 소리만 나도 컹컹 짖어댄다. 이웃 사람들을 경계하는 맹견들의 포효소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마저 내쫓는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등장하면서 일자리가 풍부한 도시로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이촌향도(離村向都)가 진행되면서 50여 년 사이에 빈집 마당은 잡초들이 지키고 있고, 방문은 거미집으로 얽힌 채 굳게 닫혀있다. 농촌의 고향은 명절 때나 찾아가는 곳, 조상의 묘소가 있어 성묘하러 가는 곳으로만 점점 굳어지고 있다. 어쩌다가 고향을 찾아가도 옛집은 모두 헐리어 새로 지어진 낯선 건물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땅을 기반으로 삶을 이어 오셨다. 그래서 고향 땅 하면 도시의 시멘트 건물인 아파트보다는 시골의 초가집이 먼저 떠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다닥다닥 앉아있는 참새들, 들판의 벼물결을 헤엄쳐 다니는 메뚜기들, 마을 앞 시냇가에 은빛 꼬리를 흔들며 정답게 다니는 송사리 떼들은 어느 동물원에서도 어느 수족관에서도 볼 수 없던 고향의 정겨운 친구들이다.

 

 바짓가랑이에 대나무를 끼워 말을 타면서 뒷동산을 휘저으며 술래잡기하던 친구들, 집에 돌아오니 발뒤꿈치에 황토가 벌겋게 묻어있고, 바짓가랑이에는 도깨비바늘이 지남철에 쇳가루처럼 붙어있었다. 어머니가 깨끗이 닦아놓은 마루를 털지도 않고 올라가 성큼성큼 걸어가니, 황토 먼지와 도깨비바늘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어머니는 성화를 대시며 혼을 내셨다. 고향땅은 황토 먼지가 언제나 묻어 다녔고, 자식만은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도깨비바늘도 다정한 곳이었다.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물으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나이 든 기성세대에게 고향은 내가 언제나 찾아가도 낯설지 않은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이 보듬어 주는 곳이다. 먼 훗날 돌아가신 조상님들에게 고향을 모셔다 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상전벽해가 된 고향을 찾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 온 지 6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저것 세간을 볼 때마다 언제인가는 다시 짐을 꾸려 고향 땅으로 가야한다고 피난민처럼 다짐하면서 살고 있다. 하필이면 아파트 뒤창밖에는 고향의 뒷산인 미륵산과 용화산이 언제나 반기고 있다. 잠을 잘 때도 머리를 그쪽으로 두르며, 요사이는 이것저것 일을 하기 위하여 출근할 때도 고향쪽으로 향하고 있다. 아마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인간이 하는 짓을 여우가 흉내 낸 것 같다.

 

 세기의 피아노 신동 쇼팽은 39세로 요절하기 전까지 고향 땅 폴란드에 묻히기를 평생 원했지만, 그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거절당했다. 심장은 폴란드에 시신은 파리에 묻혀 고향 폴란드 흙만 묘지 위에 뿌려졌다. 조선왕조 건국시조 이성계는 노년에 고향 땅 함흥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무덤에 함흥의 흙을 뿌리고 고향의 상징인 억새를 심어달라고 유언했다. 세기의 피아니스트와 한 왕조의 건국시조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는 고향 땅을 그리워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꿈을 이루지 못했다. 초개(草芥)와 같은 나는 그 영웅들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꿈을 쉽게 이룰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020.2.1.)

 

crane43%4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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