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

2020.02.28 00:05

이우철 조회 수:2

귀소(歸巢)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우철

 

 

 

 고향친구들이 모여들고 있다. 새마을사업이 막 시작되던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무작정 떠났던 친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고향에 감나무를 심고 벌을 키우겠다며 전원생활의 꿈을 실천하는 친구들이다. 으스스한 저녁, 해가 저물어가면 새도 동물도 집을 찾아들어가듯 고향만큼 포근한 곳이 어디 있으랴.

 

 나이 들면 모임도 줄어든다. 아무리 다정했던 친구들도 끈끈한 관계가 아니면 동호회위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머리에 서리가 내린 고향친구 열세 명이 새롭게 만나고 있다. 신설학교에서 맺어진 1회 출신들이니 교실을 신축하느라 벽돌을 나르고 비가 오면 진흙투성이가 된 운동장에 모래와 자갈을 다지느라 비지땀을 흘리던 친구들이다. 한때 바다로 나갔던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찾아오고 있다. 애틋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마음은 설렜다.  

 

 자세히 보니 옛 모습이 떠올라 서로 얼싸안으며 반가워했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는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간 공직에서, 교직에서, 일반 기업체에서 일하기도 하고 무역업, 출판업, 화장품업 등 자영업을 하며 나름대로 입지를 다진 친구들이다. 평생 고향을 지키던 친구는 군 의회에 진출하여 의장을 지내기도 했고,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정년없는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미 십여 명 이상은 유명을 달리했다. 한때는 공부도 잘하고 똑소리 난다던 친구들이 먼저 갔으니 세상사는 성적순이 아니었다. 내 옆자리에서 시도 쓰고 학생회를 이끌었던 친구는 경찰간부로 퇴직하더니 2년전에 떠났다. 지나고 보니 행복은 돈도 사회적 지위도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면서도 고향을 지키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소박한 친구들이 행복해 보였다. 단란한 가족을 이루며 몸은 고되지만 마음이 건강한 것이 잘사는 길이었다.

 

 내 고향은 순창읍에서 30분쯤 거리에 있다. 친구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갈 수 있어 종종 살던 곳을 돌아본다. 정들었던 순창의 각시숲은 당산나무가 있고 각시탑이 있었다. 형제나 친구들과 더위를 식히며 정담을 나누던 곳이다. 이제 그 당산나무는 없어지고 집들로 들어차버렸다. 무더운 저녁이면 다리밑에서 목욕을 하던 젊은 여인들도 찾아볼 수 없다. 두부집 비지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자식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땅을 일구시던 동네 어른들은 옛사람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이 모이면 선생님들의 안부를 묻기 마련이다. 키는 작지만 무섭게 학생들을 지도하셨던 S교감선생님도, 아버지처럼 인자하셨던 올곧은 Y선생님도 세상을 뜨셨다. 아무리 찾아도 살아 계시는 선생님은 두어 분에 불과했다. 그분들 때문에 기죽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반백년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친구가 제안을 한다.  

 

 "우리 이제 은사님들을 한 번 모시면 어때?"

 "그래 좋지, 더 늦기 전에 한 번 해보자구. 그래, 그렇게 하자."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마음이 통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 때를 넘기면 허망한 꿈에 불과할 뿐이다.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기다려주지 않듯이 선생님들도 그렇다. 부끄럽지만 종심(從心)에 이르러 마음이 모아졌으니 올 스승의 날엔 꼭 실천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음식도 추억으로 먹는단다. 애환을 같이 하던 친구들은 그리움의 대상이며 나도 모르게 고향을 찾아 나선다. 서로 제 갈 길을 찾아 헤어진 지 반백년, 그동안 사는 곳도 하던 일도 달라 소식도 자주 전하지 못했던 그들이지만, 나이 들어 만나다 보니 얼굴도 낯설어졌다반환점을 돌아 결승지점에 들어오는 마라톤선수들처럼 우리는 만나고 있다.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뛰어준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늦가을 나무에 매달린 노릇노릇한 감을 보면 탐스러워진다. 비바람 찬서리를 맞으며 맛좋은 과일로 익어가듯 우리도 아름답게 익어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못다한 꿈을 실천해 볼 일이다. 이젠 돌아와 귀소담(歸巢談)을 들으며 하얀 밤을 밝히고 싶다.

                                                                                (2020.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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