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병아리

2020.06.20 00:16

최정순 조회 수:5

빨간 머리 병아리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최정순

 

 

 

 

  해마다 3월이면 마당에는 햇병아리가 그득했다. 아버지는 싱글벙글하시며 좁쌀과 축이 낮은 물그릇이랑 싸릿대로 엮은 어까리를 챙기셨다. 그리고는 허술한 수챗구멍과 강아지가 들락거리는 담장 밑 개구멍까지도 짚 뭉치로 틀어막곤 하셨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시골에서 가용 마련이나 식구들 보양감으로는 닭만 한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병아리를 깼지만, 사료를 사서 기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니 방목할 수밖에, 아버지는 어까리에서 한 마리씩 꺼내 병아리 머리에 빨간색 물감을 발라 마당에다 훅 던지며

  “잘 주워 먹고, 잘 놀다가, 잘 찾아오너라.”

하시던 아버지! 나의 머리에도 빨간색 물감을 발라주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한 배에서 태어난 병아리가 스물한 마리나 되었다. 아버지는 허실 없이 키워야 한다며 암컷을 더 챙기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요놈들을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딸내미가 사달라는 별표 운동화랑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지.’하시는 거였다. 검정 고무신만 신었던 나는 운동화를 사준다는 말씀에 병아리를 정성껏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선 병아리부터 찾았다. 꼬리를 치며 반기는 강아지는 뒷전이고 병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입술을 앞쪽으로 쭉 빼고 구~~구를 외치면서 텃밭을 돌아 헛간 거름자리를 거쳐 소매통이 놓인 뒷간까지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다. 허겁지겁 한참 구~~구를 외치다 보면, 입술이 얼얼해져 헛바람만 나왔다. 걱정되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뒷집 대밭 속에서 어미 닭의 꼭~~대는 소리와 함께 삐악거리며 따라오는 병아리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앞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고무신짝을 집어 어미 닭한테 던지기도 했었다.

 

  먹잇감이 많은 대숲은 족제비나 들고양이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행여 잡아먹힌 병아리는 없는지 어까리 속에 가두면서 세어보고 또 세어보곤 했었다. 이렇게 돌보는데도 병아리 수는 차츰차츰 줄어 열세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몇 마리가 더 없어질지 모른다. 어른들 말로는 공중에 솔개가 나타나면 어찌나 그 기세가 사납던지 갓난아기도 낚아채 갈 정도였다니, 병아리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솔개가 아니라도 병아리를 위협하는 적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한 번은 소매통에 빠진 병아리를 건져 목욕을 시켜서 솜으로 둘둘 말아 아랫목에 묻어 두었지만, 시들시들 오줌독으로 죽어 버렸다.  

 

  알에서 깬 지 3~4개월쯤 자라면 중병아리(약병아리)라 했고, 대략 6개월이 지나면 암탉은 알을 낳았다. 어미 닭도 이 무렵이면 젖떼기라도 하듯이 새끼들을 죽지 않을 만큼 마구 쪼아댔다. 그래도 새끼들은 그러려니 여기면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으며 커갔다. 여러 마리가 갈갈대며 알 자리를 찾는 풍경은 집안 분위기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유년기를 보내고 소년기로 접어든 약병아리 같은 나는 병아리들이랑 함께 자랐다.

 

  3~4개월이 지나자 나도 자웅(♂♀)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암탉과 달리 수컷은 다리가 길고 꺼벙했지만, 벼슬이 돋고 혈기가 넘쳐 눈도 불그스레 번쩍거렸다. 가끔 목을 하늘로 쳐들고 발성이 덜된 성대로 꼬끼오 소리도 제법 질렀다. ‘나는 왕이다’라고 외치는 것일까? 수컷들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했다. 암컷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싶은 자리다툼이었을 게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는 부리를 맞대고 눈을 노려보며 날개를 활짝 펴고는 모둠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가슴 치기를 해댔다. 털이 빠지고 피가 나도록 상대방을 마구 쪼아대며 싸웠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날개를 서서히 접으며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모이를 찾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슬 피해 가버리면 한바탕 싸움은 끝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파헤쳤다. 심지어 부뚜막에 놓인 소금이며 간장까지도 찍어 맛볼 정도였으니, 금방 청소한 마루에다 배설하고 발자국 동양화까지 그려놓곤 했었다. 툭하면 담을 넘어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며 채소밭에 손을 댔다가 주인한테 들켜 장대로 두들겨 맞고 도망치기가 일수였다.

 

  사춘기 시절의 반항아들이라더니, 남동생 넷이 모이면 수탉처럼 형이고 아우가 따로 없었다. 서로 욕지거리랑 힘겨루기를 하며 자랐다. 양말이고 신발이고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였다. 사실 나도 병아리가 아니던가.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날 때쯤이면 대추 볼때기가 발그스름했다. 아침 일찍부터 대추나무 밑을 서성였던 일이며, 벌집이 달린 줄도 모르고 나뭇가지를 흔들다가 주인집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놀라 신발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벗겨진 신발짝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날이 밝았다. 날이 밝자, ‘최 생원 계신가?’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때는 무서워 떨었건만, 토방에 놓인 신발짝 하나마저 지금은 왜 이리도 그리움으로 밀려오는지!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운동화와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내 어린 시절 병아리와 함께 자라면서 머릿속에 도장 찍힌 희망이었다. 병아리는 자라서 어김없이 알을 낳았으니까.  

  딸 결혼식에 오시지도 못할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 선반에 올려놓고 저고리 동정을 달아 벽에 걸어 놓았건만, 입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가셨다. 지금도 달걀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별표 운동화가 그려진다.

 

                                                    (2020.6.19.)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07 현대판 미득국 김길남 2020.06.23 16
1606 나의 19호실은 어디에 김성은 2020.06.23 4
1605 꼬리표 이성수 2020.06.22 18
1604 우리 부부가 사는 법 곽창선 2020.06.20 3
1603 가정방문과 담배 한 갑 구연식 2020.06.20 3
1602 미물들의 새끼사랑 박제철 2020.06.20 10
» 빨간 머리 병아리 최정순 2020.06.20 5
1600 비대면 김세명 2020.06.19 1
1599 두 천사 한성덕 2020.06.19 1
1598 아내를 생각하는 기도 정연복 2020.06.19 4
1597 학산이 주는 행복 이우철 2020.06.19 3
1596 준비하는 삶 권희면 2020.06.18 288
1595 전북중앙신문 신간 안내 조석창 2020.06.18 1
1594 강산이와 선생님 전용창 2020.06.18 1
1593 쑥을 보면 생각나는 분 고안상 2020.06.18 5
1592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8가지 사람의 유형 정장영 2020.06.17 5
1591 아, 영화감독 봉준호 김학 2020.06.17 2
1590 토끼를 키우면서 최동민 2020.06.17 19
1589 모내기 날 정석곤 2020.06.16 10
1588 초롱꽃 백승훈 2020.06.1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