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보기 / 홍인숙 (Grace)
[슬플 때는 거리낌없이 울어 보세요
마음을 너무 감시하지 마세요
눈물이 흐르는 대로 슬퍼하더라도
죽는 일은 없으니까요.]
Dr. Erich Kastner 의 시다.
그는 작가이자, 시인이며 정신과 의사였다.
1952년 독일 PEN 클럽 회장에 추대되었고,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황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각종 정신질환을 의학으로만 치료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처방시집 [마주보기]를 펴냈다.
처방시집이란 표현 그대로 각 시마다 삶의 질환이 명시되어 있었다.
위의 시는 가슴이 답답할 때 읽는 [슬퍼하세요]라는 시다.
처방 글귀만 보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나는, 단순하고도 어린애 같은 글귀에 당황하였다. 하지만,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가 황폐해진 현대인의 정신치유에 명쾌한 열쇠를 제시했음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신분이나 나이, 그리고 분위기에 맞게 보여지는 삶을 위해 얼마나 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감시하였던가. 교양인인 척, 신앙 좋은 교인인 척,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친구인 척 각종 위선의 허물을 겹겹이 두르고 숨조차 드러내어 쉬지 못한 채 살아 왔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인가. 나의 어눌한 말투와, 생각보다 못 미치는 행동, 언제나 남들 보다 한 걸음 더디 사는 나태함, 이 모든 자기혐오에 빠져 많은 날을 우울해 하지 않았던가.
'현대인의 스트레스'. 외부에서 오는 자극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지쳐 있다.
거기에 자신이 스스로에게 지우는 스트레스까지 가세된다면 너무 잔혹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식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끔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거울 앞에 서서 마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지리라.
이제 나도 스스로를 감시하는 이 올무를 벗고, 슬플 때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 기쁠 때는 잠시 주위의 시선도 접어 둔 채 소리내어 웃어보고 싶다.
긴 여름밤을 적시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지금껏 쌓인 감정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새 날을 시작하고 싶다.
(1995년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 '여성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