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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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2003.05.31 07:31

새봄 아저씨 (1)

조회 수 764 추천 수 1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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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아저씨 (1) / 홍인숙(Grace)


이른 아침. 사그랑 사그랑 흙을 일구는 소리가 새벽하늘에 부딪쳐 신선하게 들려온다.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살짝 커튼을 열어보니 이웃 아저씨가 오셨다.
새봄이 오면 제일 먼저 봄을 안고 오시는 분.
언제 오셨는지 행여 우리의 단잠을 방해할까 조용조용 흙을 일구신다.

벌써 여러 해 째 봄이 오면 각종 씨앗을 모종내어 우리 집 마당에 심어 주시는 아저씨.
이불처럼 누워있는 잡초를 거두어 내고, 겨우내 홀로 있던 땅을 일구어 비료를 섞은 후,
빼꼼이 솟아난 오이, 호박, 고추, 깻잎 등..
어린 싹을 옮겨 심으시고 달팽이 약까지 솔솔 뿌리고 가신다.
그리고는 시집보낸 딸을 보듯, 싹이 제대로 잘 자라나,
벌레가 연한 새싹을 먹어 버리지는 않나 매일 들러 보시며 정성껏 가꾸어 주신다.

서너 주가 지나 제법 모종이 자라면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여러 개의 긴 나뭇가지를 휘어
일렬로 아치형을 만든 후, 손수 다리미질까지 하셔서 이어 붙인
커단 비닐을 둥글게 씌어 훌륭한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놓으신다.
아저씨의 정성 아래 가녀린 모종들은 안심하고 가지를 뻗고
말끔한 얼굴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낸다.
야자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고 화려한 서양 꽃들이 만발한 캘리포니아의 정원 한 쪽에서
한국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 풋풋한 향수를 자아낸다.

우리 집은 제법 넓은 정원을 갖고 있다.
그 넓은 정원을 남편과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둘 다 서울 토박이에 맞벌이 생활이어서 있는 과일 나무도 가꾸지 못하는 처지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는 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교인이신 아저씨가 매년 이렇게 수고를 해 주신다.
특별히 부탁한 것도 아닌데, 손수 한국 씨앗을 모종 내어 여러 집을 돌며 채소를 심어 주신다.
행여 부담이라도 될까 차 한잔도 마다하시고,
아무도 없는 시간을 틈타 살짝살짝 다녀가시며 사이사이 뒷손질을 해주시는 분.
고국의 정서와 한국인의 훈훈한 인심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시는 그 분은
그저 우리가 잘 자란 야채를 즐겨 먹어 주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 분 덕에 매년 여름이면 무공해 야채로 고국에서나 맛보던 풍성한 식탁을 차려
더위에 지친 가족들의 입맛을 상큼하게 돋굴 수 있었다.
잘 자란 오이로 냉국이나 소박이도 만들고,
수시로 상추를 솎아 쌈장을 곁들여 풋고추와 상추쌈도 즐겨 먹었다.
또 상추와 오이와 깻잎을 송송 썰어 무치면 향긋한 상추 겉절이가 되었고,
국수에 얹어 맛있는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집에서 여러가지 채소를 기르니 가족들의 반찬은 물론,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의 식사도 힘들이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고,
풍성한 야채를 친지들과 나누어 먹으며 이웃과의 정을 돈독케 하기도 했다.
또 자칫 잊기 쉬운 계절의 흐름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땅 속의 신비함과, 하찮게 여기던 아주 작은 것들의 생명력 등,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오묘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바쁜 미국생활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집을 농사지어 주시는 분.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는
그 분의 근면함과 행동하는 신앙 앞에서 언제나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올해도 그 분의 사랑으로 풍요로운 계절을 맞게 될 행복한 설레임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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