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함께 나를 찾아 온 그녀

2015.04.05 14:22

노기제 조회 수:396



20150405        봄과 함께 나를 찾아 온 그녀
                                                노기제
  
   “언니, 언니, 언니, 영신 언니가 3월 24일에 미국 온데.”
   숨이 넘어 갈 듯, 기쁨에 찬 혜신이의 전화 목소리가 울컥 내 가슴을 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얼마나 보고팠으면, 드디어 연락이 되었구나. 나쁜 기집애. 달랑 하나 여동생인데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을까
.
   여고 시절 특별한 이유 없이 티격태격 감정 대립을 키우며 정들어 버린 친구 영신이는 자기 작은 오빠 친구였던 한규씨를 만나 연애 끝에, 대학 졸업 직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친구다.

   그 후 영신이 소식은 여동생인 혜신이를 통해 가끔 들었지만 어느 때 부턴가 혜신이도 언니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석 박사 공부하는 남편 따라 미국대학에서 도서관학과를 전공하면서 아들 둘 낳아 기른다는 소식도 들었다. 학위 받은 남편이 한국 표준과학 연구소로 취업하고 대덕단지에서 산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지역 대학에서 영신이는 교수가 되었고, 자신의 월급은 모두 학비 못내는 학생들에게 지원금으로 쓴다는 소식도 들었다
.
   고교졸업 30주년 만남 여행 때 잠깐 얼굴을 비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잠깐 얼굴 마주치고 웃어주며 헤어진 후, 20년을 못 본 셈이다. 그렇게 사는가보다 했는데 난데없이 울란바토르에 있다며 혜신에게서 전화번호를 건네받아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게 몽골이란 것도 그 당시엔 몰랐다.

   영신이와 혜신이 자매를 생각하면 그냥 가슴이 메어온다. 두 살 터울의 자매. 내가 항상 꿈꾸며 바라던 여자 형제다. 엄마에겐 말 못할 얘기도 언니에게는 털어 놓을 수 있다.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는 혜신의 미국 이민생활이 어디 그리 녹록했을까. 풍문으로 들린 4.29 폭동 때, 크게 피해를 당했 던 혜신이 곁에 내가 잠깐 있어주면서도 영신이를 생각했다. 영신이가 가까이 살면 좋으련만. 아니, 한국에라도 살면서 이럴 땐, 왕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를 위한 오지 선교사 생활일까. 내 피붙이 몰라라 하면서 예수님을 전한다는 건, 이해하기 싫다. 보고 싶을 때 보면서 살고,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나누면서 가까이 살고 싶다. 연락하기도 힘들고, 연락이 된다 해도 금방 달려 올 수도 없는 환경에 스스로 묻혀 있다면 아예 언니라는 걸 사표 내라. 나쁜 기집애. 이건 어쩌면, 보고 싶은 영신이를 자주 볼 수 없음에 튕겨진 내 심사일지도 모른다. 나쁜 기집애.

   그런데, 영신이가 온단다. 화요일에 오는데 수요일 점심 때, 시내 식당에서   모이기로 했단다. 어릴 적 영신이를 알고, 만나기를 기다리는 가족들, 친구, 친척들 모두가 한꺼번에 한 장소에서 모인단다. 난, 안 기다린다. 화요일에 오면 화요일에 슬리핑 백 챙겨서 혜신네로 가겠다고 했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세 밤 자고 또 떠난단다. 우선 경자에게 연락하고 둘이 무작정 혜신네로 가기로 했다. 경자와 영신이가 단짝이었고 난 경자네 집에서 우연히 영신이를 만났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기억이 생생하다.

   얼굴을 보자마자 아! 나쁜 기집애, 아주 고상하게 할마이(할머니)다 됐구나. 힘껏 포옹하면서 뜨거움이 넘어온다. 살아 있으면 이렇게 다 만나는구나. 몽골이다 우간다다 온갖 척박한 환경에서의 생활에도, 고생에 찌든 모습이 아닌,  편안함이 전해온다. 다행이다. 으스러지게 껴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할 뿐이다. 잔잔한 미소로 차례를 기다리는 영신이 남편에게도 반가운 포옹을 드렸다. 마음 같아선 왜 이리 고생을 시키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예의를 차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 된 다섯 가시나들의 파자마 파티가 시작 됐다. 영신이, 혜신이, 경자, 뉴욕에서 날아 온 대봉이, 그리고 나. 영신이 남편과 혜신이 남편은 아예 모습도 안 보인 채 우리를 배려한다. 아이들 결혼해서 분가하고 혜신이 부부만 사는 방 두 개짜리 콘도. 침대 없는 방에 펼쳐진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운 계집애들. 꽁꽁 얼어 있는 얼음을 깨고 강 낚시가 시작 된다. 고교 졸업한지 반백 년, 졸업 전 학창시절 이야기부터 한 마리씩 낚아 올린다.

   그랬지. 그 땐 모든 면에 비교 되게 잘났던 언니를 분을 품으며 미워했다던 혜신의 고백에 사실은 혜신이가 더 예뻤다고 의견을 모으는 언니 친구들의 응원이 싫지 않은 혜신. “혜신이 더 크기 전에 영신이 너 빨리 시집가라. 혜신이 크면 다들 혜신이 달라고 하지 너 달라고 안 할 꺼다.” 어머니의 유언에 충격 받았다던 영신의 고백에 우리 모두 그랬구나, 그렇지. 혜신이 성격이 좀 좋으냐.

  영신이네 이동 스케줄을 따라, 이틀로 줄여 진 가시나들의 떠들썩 파티가 마감 되면서 은근히 영신이 남편에게 화살을 쏘았다.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이젠 나이도 70 줄인데, 그만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면 안 될까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단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순종하며 따를 뿐이란다. 억지로의 순종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평온하고 기쁜 가운데 행복을 만끽하는 삶이라고 표정을 맞춘다.

   “혜신아, 영신이가 카톡에 대답이 없네.”
   “그래서 언니,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라나 생각이 드는 건, 일단 오지로 떠난 후엔, 완전히 연락 두절하고 그 곳 생활에 흡수되어 산다우. 전화도 이메일도 카톡도 모두 끊고 살아요.”

   나쁜 기집애. 그리 천연덕스럽게 히히 하하 깔깔대며 보통사람처럼 먹고, 자고, 옛날 얘기 다 하더니만, 역시 외계인이 된 거야? 어디다 감금하고 보내지 말걸.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 아프게 만나지 못하고, 연락 끊고 무얼 위해서 그리 살아야 한다는 건지.

   형부가 감기로 열이 높았는데, 영신이도 감기기운 있다고 비타민 씨를 자주 먹더니 그마저도 약봉다리 잊고 갔다는 혜신이 음성이 흔들린다.


참고로 말한다면, 영신이는 여고 동창생. 남편인 문한규씨는 사대부중 4년 선배.
서울 사대 부중고 13회 졸업생 문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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