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마지막 편지

2007.12.28 14:28

정찬열 조회 수:8


                          
  독자 여러분께서 혹시 유서를 써 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며칠 남지 않은 한 해를 정리해 보던 중 불현듯, 어김없이 다가올 내 생의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그래서 조금은 엉뚱한 유서 얘기를 묻게 됐다.  
  필자는 유서를 써 본 적이 있다. 오래 전, 2박 3일 일정으로 부부가 함께 참석하여 진행된, 성당에서 주관하는 피정에 참석했다. 두 째날 저녁이었다. 진행자가 내일 아침까지 완성해 오라고 하면서 "당신은 내일 죽게 됩니다. 배우자에게 유서를 쓰십시오“. 하는 주제를 벽에 걸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 죽음이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구나. 어느 날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야 하는 게 인생이구나.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방에 돌아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깊어지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정말로 내일 죽음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정이 아닌 사실이라고 생각하니,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진정하려고 해도 마음 뿐 이었다. 내가 죽어야 하다니.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살아온 날 들이 한 장면씩 되살아나고 최선을 다해 살아오지 못한 많은 날들이 참으로 후회가 되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왔다. 한없이, 끝도 갓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일은 내가 죽을 날이 아니었다. 아, 나에게 아직 생명이 남아있다니.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곁에 아내가 잠들어있었다. 눈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인 것을 그 때 알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나뭇잎이 바람결에 한들거리고, 밝은 빛이 가만가만 온 누리에 번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아내를 더 사랑해주지 못했던 것을, 지난날 아이들에게 주었던 마음의 상처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가 미워했던 이들에게까지도 감사하고 회개하고 또 용서하는 마음을 담아, 그 아침에 마지막 유서를 쓰게 된 것이다.
  죽음에 임박하니 한순간 한순간이 절박하고 간절했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할 틈이 없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것들을 얼싸안고 뺨에 부비고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었다.  
  피정을 끝내고 나니, 모든 게 귀하게 다가왔다. 아내도, 아이들도. 친구도, 이웃도, 다 새롭게 보였다. 나무도, 풀도, 나는 새도, 다 사랑스러웠다. 적어도 피정을 끝내고 돌아온 한 동안은 그런 마음으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무디어지더니, 어느새 그때의 감정이 사라져갔다.
  며칠 전, 내가 아는 분이 세상을 떠났다. 마흔 살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과 세 자녀를 남겨두고 훌쩍 떠났다. 왔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길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잊었던 그 마음이 연말을 맞아 아는 분의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 해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다시 유서를 써 보고 싶다. 재산을 누구에게 분배 한다는 식의 편지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을 담아 편지를 써 보내고 싶다. 한 해를 정리하고, 희망찬 새 해 새 아침을 밝고 맑은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12/28/07년 미주중앙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