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白雪) 속에서 백석(白石)을 만나다
2010.03.02 05:08
눈 구경을 한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십 년을 넘게 로스앤젤레스에 살다 보니 눈을 보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남들은 일 년에 한번은 그래도 눈 보러 간다고들 하지만, 딸과 둘이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게 그냥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지난 겨울, 한국에 가면서 딸도 나도 눈 구경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삼 주를 한국에 머무는 동안 딸과 나의 소망은 마지막 비행기를 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매정한 눈은 끝내 우리를 반기러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하고 이삼일쯤 지나서인가. 한국에 눈이 많이 왔다는 뉴스를 인터넷으로 접하며 얼마나 아쉽고 야속했던지.
이번에 어느 문학단체와 함께 빅 베어에 다녀왔다. 오래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천재시인 백석과 함께. 내 차로 나보다 연세가 조금 더 드신 언니들을 모시고 갔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2시간 가까이 프리웨이와 로칼길을 달렸다. 비가 눈으로 막 바뀌기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는 기쁨을 누렸다.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면 어떻게 하나 염려를 하고 가던 차였는데 눈은 우리 길을 방해하지 못 했다. 어쩌면 그렇게 탐스럽게 함빡 눈이 내릴 수 있을까. 눈은 꽃이었다. 내려오는 모습도 그렇고 내려서 땅에 쌓인 모습도 그대로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눈을 굴러 눈사람을 만들었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주워온 나뭇가지로 눈도 코도 입도 만들고 머리카락까지 붙여주니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수북이 쌓여 지천에 깔려 그냥 녹아내릴 별 볼일 없는 눈. 그 중 얼마가 선택받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눈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리고는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내가 만든 눈사람.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나의 대화 상대도 되었다.
조별로 음식 준비를 했는데 우리조의 조장되시는 회장님은 준비해 오신 음식을 이웃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참 아름다운 큰언니의 모습이었다. 크든 작든 나누는 것은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타고 날 수도 있지만 연습에 의해 되어가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진정 사랑은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많이많이 연습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나눔 속에서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니까.
도착한 날 저녁에는 시인 백석을 연구하고 토의하는 모임이 있었다. 천재시인이지만 북한에 억류되어 자신의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 하고 고생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 그의 생을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다. 그 주옥 같은 귀한 시들이 월북 시인의 작품이라 하여 한동안 금지 되었다가 1980년대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온 불운한 시인. 왜 하필 우리는 그 하얀 눈 속에서 그를 생각하고 그를 토의했을까. 눈이 세상을 모두 덮어 땅이 보이지 않아도 눈이 녹으면 땅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에서는 그를 억류하고, 일체의 창작활동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시들은 머나먼 낮선 땅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되살아났다.
저녁 토의를 마치고 바깥에 나오니 눈앞에 나타난 황홀함은 그대로 요지경 속이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들이 방금 내려앉은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얼어 하이얀 눈꽃이 되었다.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모두 눈을 입고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벗은 모습이 없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숫한 색깔로 그림을 그리지만 저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팔레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색깔이 왜 필요할까. 저 하얀, 무색의 저 모습이 이 세상의 어떠한 색깔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다 나타내고 있음이니. 그만해도 너무 아름다운데 달빛까지 비춰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정 눈꽃. 그 사이로 수줍은 듯, 다 드러내지 못 하고 숨어서 보여주는 그 얼굴. 나뭇가지 사이로 이리저리 쪼개져 있는 것들을 조각조각 맞추어 보니 ‘쟁반같이’ 둥근달이었다. 아, 오늘이 정월대보름날이구나.
찢겨 조각난 나의 삶의 부분들도 이렇게 조각모음을 하면 환한 대보름달이 될 수 있을까?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른 둥근달이 어우러져 창조해낸 아름다움을 내 어찌 짧은 필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백설 속에서 백석을 만나던 날 나는 밤새 하얀 꿈을 꾸었다. 하얀 나비, 하얀 나무, 하얀 달, 하얀 꽃, 하얀 세상.
흰 당나귀, 기다림에 지쳐 창백해진 하얀 얼굴의 나타샤. 그 나타샤가 있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흰머리, 흰 수염 날리는 백석.
더하여 모든 것에 지쳐 쓰러져가는 하얀 내 모습까지.
이번에 어느 문학단체와 함께 빅 베어에 다녀왔다. 오래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천재시인 백석과 함께. 내 차로 나보다 연세가 조금 더 드신 언니들을 모시고 갔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2시간 가까이 프리웨이와 로칼길을 달렸다. 비가 눈으로 막 바뀌기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는 기쁨을 누렸다.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면 어떻게 하나 염려를 하고 가던 차였는데 눈은 우리 길을 방해하지 못 했다. 어쩌면 그렇게 탐스럽게 함빡 눈이 내릴 수 있을까. 눈은 꽃이었다. 내려오는 모습도 그렇고 내려서 땅에 쌓인 모습도 그대로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눈을 굴러 눈사람을 만들었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주워온 나뭇가지로 눈도 코도 입도 만들고 머리카락까지 붙여주니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수북이 쌓여 지천에 깔려 그냥 녹아내릴 별 볼일 없는 눈. 그 중 얼마가 선택받아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눈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리고는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내가 만든 눈사람.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나의 대화 상대도 되었다.
조별로 음식 준비를 했는데 우리조의 조장되시는 회장님은 준비해 오신 음식을 이웃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참 아름다운 큰언니의 모습이었다. 크든 작든 나누는 것은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타고 날 수도 있지만 연습에 의해 되어가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으니까. 진정 사랑은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많이많이 연습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나눔 속에서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니까.
도착한 날 저녁에는 시인 백석을 연구하고 토의하는 모임이 있었다. 천재시인이지만 북한에 억류되어 자신의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 하고 고생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 그의 생을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다. 그 주옥 같은 귀한 시들이 월북 시인의 작품이라 하여 한동안 금지 되었다가 1980년대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온 불운한 시인. 왜 하필 우리는 그 하얀 눈 속에서 그를 생각하고 그를 토의했을까. 눈이 세상을 모두 덮어 땅이 보이지 않아도 눈이 녹으면 땅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에서는 그를 억류하고, 일체의 창작활동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시들은 머나먼 낮선 땅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되살아났다.
저녁 토의를 마치고 바깥에 나오니 눈앞에 나타난 황홀함은 그대로 요지경 속이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들이 방금 내려앉은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얼어 하이얀 눈꽃이 되었다.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모두 눈을 입고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벗은 모습이 없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숫한 색깔로 그림을 그리지만 저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팔레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색깔이 왜 필요할까. 저 하얀, 무색의 저 모습이 이 세상의 어떠한 색깔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다 나타내고 있음이니. 그만해도 너무 아름다운데 달빛까지 비춰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정 눈꽃. 그 사이로 수줍은 듯, 다 드러내지 못 하고 숨어서 보여주는 그 얼굴. 나뭇가지 사이로 이리저리 쪼개져 있는 것들을 조각조각 맞추어 보니 ‘쟁반같이’ 둥근달이었다. 아, 오늘이 정월대보름날이구나.
찢겨 조각난 나의 삶의 부분들도 이렇게 조각모음을 하면 환한 대보름달이 될 수 있을까?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른 둥근달이 어우러져 창조해낸 아름다움을 내 어찌 짧은 필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백설 속에서 백석을 만나던 날 나는 밤새 하얀 꿈을 꾸었다. 하얀 나비, 하얀 나무, 하얀 달, 하얀 꽃, 하얀 세상.
흰 당나귀, 기다림에 지쳐 창백해진 하얀 얼굴의 나타샤. 그 나타샤가 있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흰머리, 흰 수염 날리는 백석.
더하여 모든 것에 지쳐 쓰러져가는 하얀 내 모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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