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

2005.06.12 04:00

강학희 조회 수:24

밤비 / 강학희

웬 전언 이리 급한가
후둑거리는 밤비의 걸음
줄줄이 하늘 길을 뛰어내려
뿌연 외등 혼자 지키는 세상 길을 간다
처마 끝 낭떠러지로, 매끄런 유리 절벽으로,
폭신한 목련길이든 뾰쪽한 솔松길이든
뚜룩 뚜룩, 또록 또록 어느 길도 마다 않고 간다

잘났다 저 혼자 더 빨리 지름길 찾지 않고
손발을 합쳐 몸을 공 굴리며
미는 대로, 업힌 채로, 앞서고 뒤따르며
합하지도 못하고 뒹굴던
먼지 살마저 안고 간다

어디도 모난 곳 없는, 어디도 감춘 맘 없는
환한 속 들여다보니 길이 있어 가는 게 아니라
제 몸 터트려 물 자리 만들며 가는구나
토르륵 토록 맑은 게 제 눈물이었구나
만사 맘 길 안에 갈 길이 있었던 걸
물길 뚫고 가는 밤, 빗길이 환하다.


(해외문학  2006년 )에서

바다 건너에서도 피는 모국어의 꽃
- 꽃은 아름답고, 별은 신비한 것처럼 시는 여전히 위대하다. -    

                                                                                                         (시인 평론가)  박영호

다음은 자연과 모든 생명의 근원인 되는 물과 빗물의 몸짓을 통해서 생의 바른 길을 찾아 가는 시인의 가치 있는 영안(靈眼)의 명상 세계를 밝힌 아름다운 서정시다.

(전략)
잘났다 저 혼자 더 빨리 지름길 찾지 않고
손발을 합쳐 몸을 공 굴리며
미는 대로 업힌 채로, 앞 서고 뒤따르며
합하지도 못하고 뒹굴던
먼저 살마저 안고 간다.

어디도 모난 곳 없는, 어디도 감춘 맘 없는
환한 속 들여다보나니 길이 있어 가는 게 아니라
제 몸 터트려 물자리 만들며 가는구나
또륵 또르륵 맑은 제 눈물이었구나
만사 맘 길 안에 갈 길이 있었던 걸
물길 뚫고 가는 밤, 빗길이 환하다.
                               (강학희 '밤비' 일부 『미주문학』2006 겨울)

  어둠 속에서 내리는 밤비 소리를 들으며 물은 덕(德)이고 길이며 그 덕은 바로 만물의 도(道)라는 노자의 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를 표현한 시다. 물의 순리가 자연의 순리이고 물의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순리일 것이다.  
이러한 물의 몸짓을 통한 길 만들기는 자연과 그리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빗물이 어두운 땅 위에 스스로 길을 내고 흐르는 모습을 심안(心眼)으로 보면서, 골똘히 사색의 세계에 잠겨 빗물들이 방울방울 서로를 내 살처럼 끌어안고 하나로 조화되어 스스로 길을 내면서 바른길을 찾아가는 물길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의 바른 도리이며 바른 몸짓이라는 것이고, 자신도 그 물길처럼 지혜로운 몸짓으로 살아가리라는 바른 생에 대한 자세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생도 물의 순리나 도를 따라서 스스로 길을 내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더욱이나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인 사색보다는 물의 근원적인 순리인 생명과 사랑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나 인류평화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시인의 사색의 세계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길 뚫고 가는 밤, 빗길이 환하다.'
결국 물의 지혜로움으로 인해 내가 속해 있는 현실세계나 다름없는 이 밤에 빗길이 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밝은 미래에 대한 시인의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9 풀 잎 사 랑 성백군 2005.06.18 26
798 게으름과 산행 김영교 2006.01.03 110
797 당신의 첫사랑 박경숙 2005.06.08 276
796 릴케의 조언 권태성 2005.06.07 103
795 이사를 하면서 박경숙 2005.06.06 139
794 수레바퀴 사랑 김영강 2009.07.12 122
793 뼈 속은 왜 비어있는가 윤석훈 2005.06.06 208
792 산불 정용진 2007.11.02 43
791 인생의 4계절 박경숙 2005.06.04 267
790 고향 이야기 백선영 2005.06.03 61
789 상흔(傷痕) 장태숙 2005.06.09 95
788 나무 한 그루 옮겨 심으며 / 석정희 석정희 2005.06.10 89
787 상처테 1, 2 김영교 2005.06.12 130
786 텃밭 일구기 1. 장태숙 2007.08.14 19
» 밤비 강학희 2005.06.12 24
784 동그란 말 또는 생각들 강학희 2005.06.12 29
783 기忌제사를 맞으며 강학희 2005.06.12 43
782 어떤 진단서 이월란 2008.04.16 2
781 친구야! 권태성 2005.06.13 27
780 오해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박경숙 2005.05.31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