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그 깊은 그늘

2006.12.17 10:57

이윤홍 조회 수:37 추천:1

노인, 그 깊은 그늘


        노인은 굳게닫힌 마켓문 옆에 검은 부조(浮彫)처럼 서있었다. 새벽을 걸어온듯
      헝클어진 머리와 긴 수염과 낡은 자켓이 축축히 젖어있었다. 마켓문을 열고 불을
      켜자 노인이 들어와서는 24온스 캔맥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새술꾼이시군하며
      바라본 노인의 눈이 맑고 푸른것에 내심 깜짝 놀랬다. 오른쪽 다리를 절며 나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잉카여인과 스페인 군인 혼혈의 후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로 노인은 가게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옆에 서서 나와 눈이 마주치면
      두 손가락 혹은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곤 했다. 그렇게 노인은 하루에 세번, 오전.
      오후. 그리고 문닫을 시간쯤, 단 하루도 걸르는 일 없이 거의 같은 시간에 술을 사
      갔고 아침부터 해지기 전까지 마켓 뒷 파킹랏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곡기(穀氣)를 끊은것이 분명했다. 음식을 갖다주면 고맙게 받았지만 한 조각도
      입에 대지않을 때가 더 많았다. 술만 마시면서도 한번도 걸음걸이가 흩트러지지
      않는것이 놀라웠다. 노인의 자리에는 언제나 하루종일 햇살이 따가웠지만 한 여름
      에도 노인은 낡은 자켓을 입고 한치도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이따금 노인이 자리를
      비울 때에도 그의 그림자는 양지속 깊이 박혀 있었고 날마다 그의 그림자는 짙어만
      갔다. 멀리서 바라볼 때면 그의 그림자위로 이내가 감돌았다. 이따금 노인에게 술을
      건네 줄때면 그의 몸에서 무엇이 타는듯한 비릿한 냄새가 풍기곤 했는데 그것을
      나는 홈리스들의 몸에 배어있는 악취와 찌든 술냄새와 방랑자들의 몸에서 풍기는
      흙먼지 냄새일꺼라고 생각했다.
         햇살 따가운 2월의 어느 날, 파킹랏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노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 노인이 햇살에 자신을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무릎을 가슴속까지 끌어모아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볼록렌즈가 되어있는 노인.
      그를 통과한 햇살들이 그의 몸 뒤쪽 어디에선가 한 점으로 모이고 언제,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냄새가 그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피어올라
      왔다. 그의 등 뒤로 푸른 인광(燐光)이 떠도는듯 했다.
      아, 그 누구도 모르게 햇살을 끌어모아 생(生)목숨을 화장(火葬)하고 있는 노인. 그
      날 따라 노인은 바싹 말라보였고 툭- 건드리면 그대로 한줌 재가되어 스러질것만
      같았다.
         그날밤 마켓문을 닫기직전 노인은 1.75리터 180도 화주(火酒)를 사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이 제 생일이라고. 어디를 갔다올데가 있다고. 그가 다시 올 때 내가
      그를 알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하며 노인이 웃으면서 나갔다. 그것이 노인을 본
      마지막이였다.
         몆 주가 지난 어느 날 밤, 집으로 가기위해 파킹랏으로 나갔다. 노인의 자리를
      지나가다  문득 아직도 남아있는 노인의 그림자를 들여다 보았던 것인데 나는 그만
      그가 파놓은 광중(壙中), 저 깊고 깊은 곳으로 빛들이 한 점으로 모여들고 화르르
      불꽃이 일어나는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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