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하현 반달을 보았다. 몇 일전에 추석 대보름을 지낸 터라 그 때 마주 보았던 환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 새 수척하게 야윈 모습이다. 수심이 마음속의 박 넝쿨로 엉켜 있은 것일까. 들어내 놓고 내보일 수 없는 생애의 애틋한 사연을 적요의 지창으로 가린 듯 흘러나오는 은은한 달빛이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눈물 속에 피어난 여인의 웃음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던데 전설로 피운 박꽃인양 환했던 그 모습은 어느 경점에서 이울었을까.



보름달은 이백이 읊었던 것처럼 시를 낳았고 상현 반달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같은 동요를 낳았는데 하현 반달은 무슨 산문을 잉태하고 있는 걸까. 버들잎 띄운 바가지 물을 실컷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을 그런 소재의 산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하현 반달은 애틋한 그리움을 다 풀어내지 못하고 떠나가야 했던 여인의 애련한 옆모습 같다. 왠지 쓸쓸함과 허전함이 엿보인다. 이 가을에 나는 무슨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 본지가 얼마 안되었는데도 보고 싶고 몇 마디의 통화라도 할 수 있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텐데 언제나 미흡하기만 했던 그 모습이건만 오래 볼 수는 없다. 불박힌 망부석처럼 지켜본다고 해도 옆모습은 항상 시각적 제한 때문에 순간적으로 스쳐가 버리기 일쑤다.



달의 상태는 만월을 표준삼아 본다면 LA 근교에서 보는 보름달과 한국에서 보는 그것은 차이가 있다. 원래 음력(월력)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선 일몰 후에 쟁반 같은 보름달이 동산 위에 둥실 떠올랐다가 다음날 일출 전에 서녘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대체로 주야의 명암이 바꿔지는 때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양력(일력) 문화권인 LA 근교에선 하루가 차이 날뿐더러 일출 기준으론 한국보다 7-8시간 앞서가기 때문에 보름달은 해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일 때 떠올라있다. 잠깐 동안 보름달과 해가 랑데부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까닭에 명암이 바뀌는 때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름 전날이 더 만월에 가깝고 정작 보름날의 만월은 약간 이운 모양새이다.



하현 반달이 되는 날짜도 조금 일찍 당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직 미명일 때부터 일출 전까지가 만나볼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기에 이른 아침 산책을 즐기는 사람에게나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하현 반달은 그 모습을 얼마 동안 보여줄 뿐이다. 그나마 가을엔 아침 안개가 자주 끼며 한 낮엔 햇볕이 너무 강열할뿐더러 스모그 영향 때문에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그 동요는 거의 불러질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가려진 데를 찾아내기 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 더 관심을 갖기 마련인지라 하현 반달은 아무도 알 수 없을 혼자만의 진한 사연을 소중하게 품고 있을지도 모를 중년 이후의 여인일 것 같아서 내 마음이 거기에 머무는지도 모르겠다.



그 하현 반달은 인생살이의 성쇠와 회로애락을 영육 간에 깊이 체험해보았을 것임으로 때론 아픔이 따를지라도 체념할 줄도, 그리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곤 할게다. 오욕칠정 같은 것은 초연한 경지에서 다스릴 줄도 아는 그 심령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월광이면 깊어가는 이 가을이지만 허허로운 마음의 박동이 충전되어 내 잔이 차고 넘칠 듯 하다.



심령이 순수의 호수에 침잠되어있을 때면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피차 은근히 마음의 전의를 내분비처럼 흘려서 알고, 눈빛으로 그 마음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 사이일 것이기에 그것은 예사로운 만남은 아니지 않은가. 포화상태로 북적거리는 인구밀도와 난해한 순열조합에서 몇 만분의 일의 확률로도 간택될까 말까한 가려 뽑힘처럼 심령의 주파수가 맞는 인연은 어떤 보석보다 더 값질 게다.



그래서 그럴까. 하현 반달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생각하면 나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안쓰러운 연민에 젖는다. “그리움은 만날 수 없는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만날 수 있는 그리움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움과 기다림은 언젠가는 한 박자로 마주쳐야지-. 끝날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그것은 픽션의 소재로 한정되었으면 좋을 성 싶다. 초승달은 어느 전능한 천사가 잘라버린 손톱을 창공에 띄운 것이라고 해두자. 말굽 쇠처럼 비워진 동쪽 편을 차츰 채워서 상현 반달이 되었다가 둥그런 보름달이 된다. 그러나 하현 반달은 서쪽 편을 점차 비워가다가 끝내는 잘라버린 손톱이 반대로 놓이는 그믐달로 이운다. 그렇지만 긴 인내를 견디어 낸 그리움과 기다림은 또 다시 끝매듭 없는 둥근 사랑 보름달이 된다.



문득 나는 ‘쌩떽쥐뻬리’ 작 ‘어린 왕자’의 대화 구절을 떠올린다. “네가 날 길들인다면 그건 놀라운 것이 될 거야. 황금색의 밀은 네 생각을 하게 해줄 거야. 그리고 나는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지난해 나는 추석 대보름 달을 프랑스 국경을 넘어서 이태리로 들어간 투어 차의 차창에서 보았었다. 프랑스의 벌판과 구릉지대를 지나치며 황금빛 밀밭과 바람의 실상 지를 찾아보려 했었다. 부질없었는데 주파수가 맞춰지니 그 대화는 그렇게 먼데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길들려 지면서 하현 반달은 밀밭이고 나는 바람소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물도 깊어지면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는데 나같이 미진한 사람이 어찌 그런 모래톱 주변엔들 이를까마는 하현 반달과의 만남엔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늘 말을 잃고 침묵한다. 그 이전엔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으랴마는 막상 마주하면 왜 말이 없어지는 걸까. 하기야 하현 반달은 그 용태로, 월광과 적요로, 촉촉한 이슬 같은 것으로 내 마음을 적셨던 것을 상기하면 새삼스레 내가 말을 하지 아니해도 내 무뚝뚝한 표피의 속결까지 하현 반달은 속속들이 들여다 보 듯 알고 있을 게다.



그런대도 하현 반달에겐 쎄룰라폰이나 e-mail도 마음의 끌림대로 보낼 수도, 내가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보이는 절반은 스스로 채웠으면서 보이지 않는 절반은 비우고 있지 않은가. 하현 반달은 그것으로 이미 내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은 것일 게다. 활활 타올랐던 저물녘의 모닥불이 다음을 기약하듯, 다시 둥그런 보름달이 되기 위해 그 보이지 않는 절반을 나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는다.



그 미완의 여백이 내게 살맛을 더해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