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굴 둠벙과 잠사골 샘

2007.06.04 17:26

정찬열 조회 수:24 추천:2

한국신문에서 농부들이 모를 심는 사진을 보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던 때가 생각났다. 썩굴 둠벙과 잠사골 샘이 함께 떠올랐다.
  썩굴은 고향에 있는 골짜기 이름인데 그 곳에 우리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산골짝 논이 그렇듯이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그 맨 위쪽에 논배미들을 먹여 살리는 저수지, 이를테면 제법 큰 둠벙이 있었다.
  제때에 비가 내려주는 해는 물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가뭄이 들면 둠벙물도 함께 졸아들었다.
  가뭄이 극심했던 어느 해, 못자리 할 때부터 둠벙물을 퍼 쓰기 시작했다. 모를 키우기 위해 품어 쓰는 물만으로도 하루 한 뼘 이상씩 물이 줄어들었다. 흘러드는 물은 물론 솟아나는 물도 없는 터라 품어내지 않은 날도 물은 저절로 마르고 줄어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두레를 이용하여 물을 퍼냈다. 네모꼴로 된 두레의 네 귀퉁이에 세끼를 달아 줄 둘씩을 맞잡고 물을 품었다. 물이 깊지 않을 때는 힘이 덜 들었지만, 점점 깊어지면서 한 두레를 품어내기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어갔다. 견디기 힘든 일을 견뎌내야 했다. 두레를 따라 둠벙으로 끌려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농사에 익숙하지 않은 어머니와 중학을 갓 졸업하고 농사일을 배우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품을 물만 있다면야 아무리 힘에 겨워도 참아낼 수 있을 터였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둠벙 물이 바닥을 보이자 모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가슴도 그렇게 쩍쩍 갈라지고 타들었다. 하는 수 없이 물로 흙을 적셔가며 호미로 모를 심었다. 물 한 바가지에 모 한 포기를 심는 작업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했지만 이번에는 심어놓은 모가 말라비틀어졌다. 결국 논을 갈아엎어 메밀 씨를 뿌려버렸다.
  신문에서는 몇 십 년만의 한발이라며 그에 관한 뉴스로 연일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 혹독한 가뭄에서도 잠사골에 있는 우리 논은 끄덕 없었다. 자그마한 샘 때문이었다. 썩굴 둠벙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들 샘이었지만, 퍼내고 퍼내도 금시 물이 고였고 겨울이면 멀리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웃 논에서 물이 필요하다면 퍼다 쓰도록 했다.
  그 해 잠사골 논은 평년작 이상의 수확을 했다.  잠사골 논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가 먹을 식량마저 마련하지 못할 뻔 했다. 가뭄이 들어서야 잠사골 샘의 진가를 깨닫고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물이 없으면 논이란 게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가뭄을 통해 뼈가 저리게 체험했다. 헤쳐 가야할 내 삶의 논바닥에 물처럼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딱 잡히진 않았지만, 책 속에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사볼만한 처지는 못 되고, 닥치는 대로 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시골동네라 읽을만한 책이 금방 동이 났다. 읍내 아는 집에서 책을 빌려오기도 했다.
   낮에 농사일을 하고 밤에 졸리는 눈으로  책을 보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라 호롱불을 켰고, 때론 사람들을 피해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해 마루 밑에 파 놓은 굴에 들어가 책을 읽기도 했다.  
   4년 동안 농사를 지었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늦었지만 스물 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이따끔 잠삭골 샘을 생각한다. 비가 많은 해는 썩굴 둠벙이나 잠삭골 샘이 차이가 없지만 가뭄 때문에 잠사골 샘의 진가를 알게 된 일을 기억한다. 풍년에는 몰랐지만 가뭄을 통해 잠사골 샘에 감사하게 된 일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내 글에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할 만한 물기가 있는가를 걱정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알게 하고 고마움을 깨닫게 하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쓴다.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소재를 찾지 못하고 그런 좋은 글을 쓰지 못한 성 싶어 늘 아쉽다.  
  농부들이 논에서 모내기 하는 뉴스를 보면서, 논에 모를 심지 못하고 메밀 씨를 뿌렸던 때를 다시 떠 올린다. 농촌에 수로가 완비되었다니 이제는 전설 같은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지금도 잠사골에 가면 김나는 샘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내 삶의 논바닥을 촉촉이 적셔줄 마르지 않은 샘. 내 인생을 풍부하고 유익하게 가꾸어줄 생수 솟는 작은 샘 하나 갖고 싶다. <2007년 6월 6일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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