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 사이로
2007.06.06 06:12
판자 사이로 “글마루” 2001년
삭아 떨어진 판자 헛간이었다. 벌써 오래 전에 헐어버렸어도 남았을 목조 건물이다. 그것을 정히 보존하여 역사적 사물로 남긴 이 나라 사람들의 보존관념이 돋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좋아 거기서 시 낭송회를 갖기로 했다.
문지방을 넘어 안에 들어섰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판자에 걸린 큰 액자그림이었다. 판자가 낡아 벽이 뚫린 사이로, 하늘의 파랑과, 나무 잎의 초록과, 검은 나무 가지로 총 천연색 액자그림이 되었다. 그 판자라도 떨어져 나갈까보아, 서로 엇걸리게 엮어 놓은 철사 줄은 액자의 유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벽 하나 가득 천연덕스럽게 걸려있는 자연 본연의 예술품이다. 이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임의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이번은 나, 다음은 너 하며 그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들 문턱에 걸터앉아 시 낭송의 시간을 반긴다. 시 속에 젖고 있는 그 느낌의 세계는 내 마음속에서 항상 그렸던 향수 같은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을 껴안으며 나는 벽에 걸린 자연 액자를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아! 역시 이 세상은 아름답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어 글을 쓰는 기쁨도 있지 않은가. 내 심장에서 울리는 감동의 고동은 시상과 같이 잔잔히 박동치고 있었다.
시 낭독이 끝나고 밖에 나왔다. 십일월이 끝나 가는 데도 멀리 산허리의 단풍은 아직도 아름답다. 그러나 내 발아래 딩굴고 있는 말라붙은 단풍은 삭막하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다. 조심스레 잎새 하나를 집어 올린다. 찬찬히 드려다 본다. 어쩌면 단풍이 든 잎새 속에 그리도 많은 색깔이 들어 있을까. 나는 또 한 잎을 줍는다.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것들은 같은 잎새이면서 크기와 색깔이 다르다. 또 줍는다. 다 다르다.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사람과 같았다. 봄, 여, 가을을 열심히 살다 땅에 떨어지고, 이렇게 구르다가 퇴비가 된다. 자연의 섭리이기는 하지만 그 잎새를 보는 내 마음은 나를 보는 것 같아 아프고 헐헐하다.
우리는 촘촘히 각목으로 짜인 길로 들어섰다. 무엇을 보여주려고 저 긴 길을 이렇게도 정성스레 만들어 놓았을까. 그 정성이 아름다워 더욱 많이 느끼려 마음을 돋운다. 자연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피는 창작이다. 느낌이 넘쳐흘러 그 넘침이 시가 되듯, 아름다움도 내 마음속에서 먼저 피어난다. 내가 곱게 느껴야 자연도 곱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피크닉 테이불에 어제 남은 찬밥을 내려놓고 먹기 시작한다. 시장끼가 반찬인가 꿀맛이다. 이제 식사도 끝나고 여행도 끝나 갈 시간이 왔다. 어쩐지 헤어지기가 아쉬워 허전하다. 누군가가 믿음이 같은 사람들을 말해서, 같은 분모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도 우리 글마루 식구들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눈길만 건네도 서로 통할 것 같아서 좋고, 손끝으로 살짝 찍어도 반응이 있을 것 같아서 좋은 사람들. 고원 교수님의 시의 세계가 우리들을 이렇게 한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
뚫어진 판자벽에 걸린 자연의 그림 액자를 보며 소녀가 되어서 좋아하던 사람들의 모임은 내게 한층 다른 정감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아름답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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