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바람 불어 좋은 날

2018.04.13 09:43

서경 조회 수:123


   솜 씨앗 수정.jpg



   바람이 분다. 비 개인 하늘 쓸고 와 바람이 분다. 어제를 휩쓸고 간 바람도 내게로 되돌아 와 마음 깃을 펄럭인다. 소소한 생각 몇 이고 있던 팜츄리도 미련이랑 갖지 말자며 남은 잎을 버린다. 바람과 팜트리가 마치 사랑놀음을 하는 것같다.
  오늘 따라 바람도 만만찮다. 쌀쌀 맞은 여인네처럼, "그래, 잊어라. 이왕이면 깡그리 잊어줘!"하고 거짓 앙탈을 부리듯 세차게 훑고 간다. 팜츄리는 미련 없다는 듯, 열매마저 후두둑 털어 버린다. 마음에도 없는 말, 유아적인 사랑놀음에 저도 우는 날이 많았으련만. 오늘은 일 없나 보다.
  가을도 아닌데 거리엔 낙엽이 뒹굴고, 꽃도 아니면서 흔들리는 꽃이 되어 버들 강아지 하늘댄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던 도종환 시인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 모두는 흔들리면서 피고 흔들리면서 진다.
  바람은 불기 위해서 기다리고, 꽃은 흔들리기 위해 기다린다. 흔들리는 일이 어찌 나쁘기만 하랴. 불어주는 바람이 때로는 고마울 때도 있나니.
  점심 시간, 은행도 들릴 겸 거리로 나섰다. 비 온 뒤라 그런지, 햇빛은 유리처럼 눈 부시고 부는 바람은 상큼하다 못해 달다.
  그런데, 때 아닌 함박눈이 온 허공에 분분하다. 가던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사진을 찍어댄다. 강아지도 껑충거리며 뛸 분위기다. 바로 길 건너편 가로수에서 꽃씨를 사방에 날리고 있었다.
  하얀 민들레보다 몇 배나 커서 꼭 함박눈 같다. 꽃나무 이름을 물어보니 아무도 모른다. 언제나 핑크꽃을 피워 거리를 환하게 비추어주던 꽃등 나문데, 호명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누군가 "cotton tree?" 하며 고개를 갸웃댄다. 나쁘지 않는 이름이다.
  눈처럼 가벼운 무게로 바람에 날리면서도 거리를 구를 때에는 제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림자가 있다는 건 존재의 알림이다.
  문득, 작가적 관심이 일고 곧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릴 그 존재의 흔적을 증언해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만지고, 보고, 놀아야 한다. 망원경으로만 볼 게 아니라, 현미경도 동원해야 한다. 내 발등 주변을 스쳐가는 몇 놈을 주워 감촉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주을려고 하면 바람이 날려 버리고, 다시 잡을려고 허리를 굽히면 휙 달아나 버린다. 고얀 놈들. 몇 번이나 헛탕을 쳤더니 사람들도 웃으며 재미있어 한다. 나도 쿡 하고 웃음이 났다. 마치, 줄에 매달린 돈 따라가는 아이 같았다. 멀건 대낮에 이거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 둘까 하다가, 그래도 기어이 주어보리라 하고 계속 쫓아 다녔다.
  드디어, 바람이 좀 잦아진 틈에 놈들을 잽싸게 잡았다. 하나, 둘 ... 한웅큼도 더 넘게 모았다. 솜보다 훨씬 보드랍다. 명주처럼 가볍고 질기다. 촉감으로만 보면, Cotton Tree가 아니고 Silk Tree다.
  아, 그런데 명주 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송이 함박솜에는 제 각각 한 개의 까만 씨를 지니고 있었다. 죽은 듯 있는 이 미세한 한 알의 씨가 거목이 되어 사방에 씨를 날리다니. 누구도 심어주지 않고 가꾸어 주지 않아도 자기의 영토를 찾아 떠나는 길손들. 문득, 마태복음에 나오던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염려 붙들어 매라는 하느님의 부탁 말씀이다. 나도 이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나간 어제에 연연하고 오지 않은 내일에 불안해 한다. 진정 가장 중요하다는 오늘은 실종일 때가 많다.
  누가 그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만, 바람 불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인 것을. 다만, 뿌리까진 흔들리지 않겠다는 약속 하나로 살아갈 뿐이다.
  함박눈처럼 날리던 수 많은 씨 중에 나와 인연을 맺은 녀석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솜은 예쁜 천을 씌어 홈데코 소품을 만들거나 바늘꽂이 만들면 딱일 것같다. 씨는 불려서 다음에 우리집 정원에 심어주리라.
  오늘은 바람 불어 좋은 날. 아이가 요람에서 흔들리며 자라듯, 우리 모두 흔들리며 흔들리며 피노니. 조그만 씨앗 한 알도 바람을 타야 생명을 피우고, 처마 끝 풍경도 바람이 불어야 청아한 노래를 하지 않던가. 때로는 모진 바람도 가슴 열어 맞아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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