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이야기 2 - 읽을 수 없는 말
2018.06.28 09:37
***** 손녀 제이드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남달랐다. 어릴 땐,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 나랑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있다 보면, 그 애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대단히 큰 사건이나 놀랄 만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단문장으로 끝날 무심한 생활 속에서 느낌표를 찍고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은 행동들이다. 그 애의 따뜻한 마음은 핏속에 녹아 자연스레 흘러 나오는 것같다. 어린이는 누구나 천사 같다고 하나, 그 애 마음 한 켠을 보는 날이면 감사 기도가 절로 터져 나온다. “주님, 건강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손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이드는 커 가고 세월은 빨리도 흘러 간다. 내 기억도 자꾸만 가물가물해져 아름다운 추억마저 잊어 버릴까봐 걱정이다. 부지런히 써야 겠다. 손녀 제이드와의 마음 다사로왔던 추억담도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남겨두어야 겠다. 이런 연유로 <제이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은, 그 두번 째 이야기다.*****
오동통통하기만 했던 아가야 제이드는 커 가면서 조금씩 고물이 차 갔다. 기저귀를 빼고 나서는 나성 몬테소리 어린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고물고물한 아이들은 원장 선생님과 다정다감한 선생들의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친구들하고도 낯가림없이 잘 지냈다. 무얼 어떻게 했는지, 학교에서도 원장과 선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제이드는 인성이 참 좋다’고 칭찬했다. 보통은 어린 애를 두고 착하다고 하는데 인성이 좋다는 말이 좀 새롭게 들렸다.
햇수로, 나성 몬테소리 3년차에 들어서면서 다섯 살이 된 제이드는 킹더가든으로 올라 갔다. 글을 알고 부터는 책을 들고 살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것같았다. 갤러리아 푸드 코트에 가서 식사를 할 때도 밥을 얼른 먹고는 세종문고로 달려가 책을 읽고 있기 일수였다. 아예 서점 주인은 그 애가 달려 오면 으례 어디가 그 애 고정석인지 알 정도였다.
어른들은 식사 후, 입가심으로 일어설 줄 모르고 수다 타임을 갖는다는 걸 애는 벌써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이 책 좋아하는 아이한테는 다시 없는 호기였는지도 모른다. 손녀에게는 책 읽기가 일상의 호흡이었다.
부엌에서 내가 일할 때는 거실에서 책을 읽게 한다. 좀더 가까이 두고 왔다갔다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엌에서는 아이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소리내어 크게 읽으라고 말한다. 서로 교감도 하고 나도 내용을 알고 있으면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그 날도 아이는 어김없이 제 좋아하는 책을 가져와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한 순간 소리가 멈추어졌다.
- 제이드! 소리 내서 크게 읽어라. 할머니도 좀 듣자!
부엌에서 크게 외쳤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 왔다.
- 할머니! 여기 있는 이 말은 너무나 나쁜 말이라서 소리 내어 읽을 수 없어요!”
- 뭐라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없다고? 무슨 말인데?
- 말할 수 없어요! 너무 나쁜 말이라 소리 내어 말해 줄 수 없어요!
정말 호기심이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다섯 살 아이가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고 누가 들을까 봐 크게 말로 전해줄 수도 없는 단어가 어린이 동화 책 속에 들어 있다고? 나는 물 묻은 손을 닦고 부엌에서 바로 달려 나갔다.
- 무슨 말인데 우리 공주님이 소리 내어 읽지 못하실까?
장난기 있게 물었더니, 날 따라 웃기는커녕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 할머니! 귓속말로 스펠링을 불러줘도 돼요? 왜냐하면, 이 말 너무 나쁜 말이라 워드로 못 읽어요.
아이는 벌써 몇 번째 나쁜 말임을 강조했다. 이젠, 내가 그 ‘나쁜 말’을 봐서도 안된다는 듯 책을 아예 덮고 말을 했다.
- 호~오, 그래? 그러면 귓속말로 스펠링 말해 봐!
나는 토끼 귀를 쫑긋 세우며 그 애 입술 가까이 갖다 댔다. 아이는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그것도 천천히 한 자 한 자 내 귀에 퍼즐 피스 맞추듯 끼워 주었다.
- H......
- A......
- T......
- E......
- Hate?
- 네! 진짜 나쁜 말이에요! 이 말은 절대 절대 쓰면 안 돼요! Never... NEVER!
아이는 강조에 강조를 더해 곱배기 강조를 했다. 그것도 할머니한테는 보통 한국말로 하는데 영어까지 튀어 나왔다. 쌍욕이라도 되는 줄 알고 단단히 마음 무장하고 귀를 갖다 댔던 나는 대수롭지 않는 그 말에 ‘대단히’ 실망했다.
‘hate’는 쌍욕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사전에도 나오는 비속어도 아니다. ‘나쁜 말’이기는 커녕, 기분 나쁠 때면 미국 사람들이 “ I hate you! “하고 툭 뱉는 일상 용어가 아닌가.
그럼에도, 이 아이는 소리내어 읽을 수도 없다니. 아니, 제 입술을 빌어 말로 전해 줄 수 조차 없다니! 난 아이를 다시 올려다 봤다. 그리고 꼭 안아 주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별 ‘개념없이’ 쓰는 미움이란 말.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미움으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들. 어른으로서 정말 부끄러웠다. 이거야 말로, 우리 주변에 만연하고 있는 나쁜 바이러스가 아닌가. 심지어, 살인과 전쟁을 불러오는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기실, 미움이란 불화의 핵이요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다.
- 그래! HATE라는 말은 정말 ‘나쁜 말’이야! 그지?
- 네! 이 말은 절대로 쓰면 안 돼요......
아이는 누가 이 말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사실, 이 미워한다는 동사는 말로 써서도 안 되고 행동으로 옮겨서는 더욱 안 되는 ‘나쁜 말’이다.
- 제이드! 이 말은 책에 써서도 안 되지만, 누구를 미워하면 더 ‘나쁜 말’이야. 그지?
'행동'이란 말이 좀 어려울까 봐 우정 쉽게 말했다.
- 네! 맞아요!
- 그래, 제이드는 커서도 누굴 미워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 네! NEVER!
시무룩했던 아이는 다시 기를 찾았다. 화색도 밝아졌다. 든든한 동조자가 생겨서 그런지 함박웃음을 짓고는 다시 소리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부엌으로 돌아 와 일하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아주 오래 전에 잊어 버렸던 노래 가사 한 줄을 떠올리게 했다. 그 가사는 가을 빈 들을 가로 지르는 엉겅퀴 굴렁쇠처럼 내 가슴을 훑고 목울대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 우리는 너 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 사랑하질 않나...
다섯 살 아이가 소리 내어 읽을 수 없는 말. 그 말을 생각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나도 몰래 어떤 수분이 촉촉히 눈시울을 적셔 왔다. 그래, 왜 서로 사랑하질 않나......
오늘 다시 한 번, 손녀 제이드를 통해 배운다. ‘HATE’는 정말 ‘나쁜 말’이라고. 그리고 다짐한다. ‘사랑하자, 사랑하자! 어제보다 오늘 더욱 사랑하자!’ 사랑도 결심이라는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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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그 손녀...넘 사랑스러워..
나도 꼬옥 안아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