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음악이 흐르는 창

2020.06.07 21:29

서경 조회 수:65

음악이 흐르는 1.jpg

 

   모짤트와 따스한 아침 햇살 흐르는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어제 직장 가까운 LA로 이사를 했다. 하루 종일 짐 풀고, 가구 배치 하고, 부엌 살림 정리에, 책 정리 하느라 혼났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거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이사 하기’다. 엄마를 위시하여, 언니 동생 모두 심지어 딸까지 이사 명수들이다. 나만 별종이다.
  사부작 사부작. 힘 쓰는 일에 취약한 나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 나가기로 했다. 일단, 창을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창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건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것. 수납장이 많은 아이보리 앤틱 책상 위에 어울리는 브라운 계통의 앤틱 라디오를 올렸다. 그 위에 광산에서 켜 왔다는 옥 위에 새겨진 예수님 사진을 모셨다.
  야단스럽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대다가, 우리 집 공작들이 털갈이를 하며 선물한 깃털로 장식을 했다. 녀석들이 날개를 활짝 펴서 빙그르르 돌며 암놈 앞에서 위용을 과시하던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다. 뼈대는 약하고 깃털은 가벼웠다.
  게다가, 깃털로 무지개빛 찬란한 얼굴들을 가려 마치 주렴 뒤에 숨은 듯하여 가위로 좀 정리했다. 길이도 길고 짧게 하여 높낮이를 조절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걸려 마지막 모양새 잡는 건 다음으로 미루었다. 가로등 같은 코너 등은 분위기 아는 제인이 선물했다. 형광 전등 모양새가 직선이 아니고 둥글어 부드러웠다.
  엊그제 급한 생필품을 사러 코스코에 들린 터에, 난 화분도 두 개 샀다. 사랑하는 나의 창을 위한 선물이다. 요즘은 방 안으로 그린을 불러 들이는 게 대세라고 하니, 튼튼한 2단 목테이블에 꽃과 나무들을 몇 개 더 갖다놓을 예정이다. 열대어가 꼬리 치는 자그마한 어항도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렇게도 나의 삶이 엄마를 닮아가는지 모르겠다. 꽃과 금붕어와 노래를 사랑한 어머니- 어머니는 죽어가는 꽃도 살릴 정도로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신기한 재주까진 내게 없다.
  아침 햇살이 수란 치마 끌듯이 스르르 비켜 간다. 나도 창을 떠나 부엌으로 왔다. 나는 책과 예쁜 그릇과 마음을 주고 받는 사랑에 유독 욕심이 많다. 세 가지 욕심 중에 사랑을 얻기가 가장 어렵다.
  언니랑 얼마 전에 이런 얘기를 나누던 중, 언니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형은 이 세상에 없다며 ‘피리어드 (.)를 세 번이나 내리 찍었다. 우리 집 성격은 누군가 좋아하면, 100을 주는 all in 형인데 상대방은 10-20밖에 안 준다고 한다.
  10-20? 내가 어디 100을 달랬나. 70만 줘도 좋다 하지 않았나. 사랑은 이상한 셈법으로 흐르지만, 그래도 상대방은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닌가. 그것도 못해 주면 왜 굳이 연인이란 이름으로 남자를 만나고 남편이란 이름으로 한 남자를 받아 들여야 하느냐고 항변했다. 간호사 출신에 매사 해결해 주려는 열정에 힘 입어 이번에도 해결사로 나섰다.
  - 움직이는 ‘물체’로 생각해!
  - 움직이는 물체?
  - 그래, 움직이는 물체!
  - 물체랑 내가 왜 살아야 하는데?
  - 그래도 ‘말 하는 물체’ 아이가?
  - 말 하는 물체? 그 말 하는 물체 하고 살려고 내 인생 전부를 걸어? 차라리, 우산 접듯 포기하고 혼자 사는 게 낫지!
  - 아이구, 큰 소리 치긴! 넌 옆에 사람 훈기가 있어야 한다며?
  - 그건 그래. 하지만, 너무 했다! 같이 사는 사람을 움직이는 물체니 말하는 물체라 하는 건 너무 심하다... 죽고 못 사는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서로 마음은 주고 받고 살아야지?
  - 아, 글쎄, 사랑 타령 그만하고.... 세상 여자들 다 그러고 살듯이 ‘움직이는 물체’를 수용하고 살 것이냐 아니면 외로움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야!
  언니의 오피니언은 단호했다. 오랜 시간 속에 터득한 경험의 소산인가. 아니면, 이성적인 현명함일까. 어떤 유명 가수가 외롭지 않으려고 노래 불렀다고 고백하듯이, 언니도 외롭지 않으려고 동시를 쓰는 지도 모른다. 인간 관계를 중시 여기면서도 유독 인간 관계에 취약한 나에게 좀더 힘을 주려고 한 것일까.
  - 피리어드! 피리어드!! 피리어드!!!
  언니의 피리어드가 점층법으로 올라 갈 때마다, 좌절과 절망감으로 호흡이 가빠졌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이후로 얻은 병적 불안이지만, hopeless 그 절망적인 느낌이 오면 빈혈처럼 단전에서부터 나쁜 기운이 스물대며 올라 온다.
  - 언니! 피리어드 찍지마아~ 살면서 서로 대화를 통해서 적응해 갈 수도 있잖아? 난 그런 희망적 삶을 말하는 거야! 그러나 남자들은 감동없이 그 날이 그 날인 듯 사는 게 아무렇지 않는가  봐?
  - 글쎄, 좋은 말이다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더나? 남자들 한테는 우리가 요구하는 그 70%가 너무 과하다니까?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니까? 기대치를 낮추고 살거나 외로움을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야! 피리어드!
  - 하긴 그래! 70프로가 그들에겐 100 아니 150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행복한 척 웃고 있는 여자도 속은 타고  ‘또 하나의 고독’을 느끼며 사는 거겠지?
  - 야! 오죽하면 백조의 호수니 호수의 백존지 하는 그런 우스꽝스런 말도 나왔겠나!
  - 하하! 호수에 우아하게 떠 있어도 가라앉지 앉으려고 맹렬히 발을 돌리고 있는?
  - 그래! 생존해야 하니까!
  - 하이구야! 참말로 어렵데이! 사람 마음 하나 얻기가 이리도 어려워서야 어디 살겄나? 그러나 저러나, 같이 살아도 외롭고 혼자 살아도 외롭고 ... 외롭기는 마찬가지네?
  - 그래, 선택은 각자의 몫이야!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물체’라도 있는 게 나아! 
   언니는 산문도 안 쓰고 피리어드 없는 동시만 쓰면서도 오늘따라 말끝마다 피리어드를 찍었다. 아, 그러나 수필이랍시고 산문을 쓰는 나는 왜 이리도 피리어드를 찍지 못하는지!
  ‘많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닌데 ...  차 키도 ‘반응’이 없으면 배터리가 다 된 줄 알라고 했다.  배터리를 바꾸어야 하나, 키를 바꾸어야 하나, 통째로 차를 바꾸어야 하나. 허, 참!
  허참은 ‘허, 참’이다. 돈도 못 버는 코로나 시즌에 돈 쓸 일이 있나. 또다시 쉼표 찍고 숨고르기나 해야 할까 보다. 아직도 사랑을 꿈 꾸고 그 로망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못난 게지.
  부엌 살림 정리하는 중에, 손은 굼뜨면서도 ‘의식의 흐름’은 저 혼자 ‘카카오 스토리’를 써 내려 간다. 주님의 몽당 연필’이라 자청하던 데레사 성녀처럼 요즘은 내 카스도 나의 몽당 연필이런가. 이삿짐을 싸면서도 카스는 멈출 줄 모르고 이삿짐을 정리하면서도 머릿 속에서는 카스 스토리가 줄창 이어지고 있으니 웬 일인가. 에고, 이 재미라도 없으면 코로나를 어떻게 대적하며 내 어이 나의 이상적 로망의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카스야, 고맙다! 의식과 무의식, 더불어 총체적 내 삶을 대필해 주는 충실한 벗이여! 그래, 부엌 살림은 대충 정리 되었으니 이 참에 좀 쉬었다 하자. 벌나비도 쉬어 가고, 너도 쉬어 가고, 나도 좀 쉬어 가자.
  커피 한 잔과 너트 쿠키 한 줌, 책 몇 권 골라 방으로 들어선다. 뜨뜻한 돌침대에 누어 다리를 쭉 뻗으니 세상 행복 따로 없다. 음악의 신동 모짤트도 한 평 땅에 눕고, 나 또한 한 평 돌침대에 누우니 인생은 피차 평준화다.
  톨스토이여, 묻지 마시라.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고. 보라! 지금 내가 몸으로 답하고 있지 않는가. 아, 한 평 남짓한 돌침대로도 나의 행복을 살 수 있나니, 천 마지기 땅도 필요 없노라. 해 저물기 전, 나는 나의 침실로 가려는도다. 아, 행복한 게으름이여!
   이런 내 모습에 지나가는 코로나도 웃겠다. 코로나야! 너도 맹렬히 일했으니 이제 좀 쉬어 가렴. 이왕이면, 사회적 먼 거리를 두기 위해 지구 밖으로 가거라! 무리를 하면 병이 난다는구나!  
  아침 햇살 사라지자, 하얀 구름 내 창을 기웃대고 91.5 FM 모짤트는 한 치 실수도 없이 잘도 연주한다.          (202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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