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진 자리에.jpg

- 꽃 진다고 설워 마라
  꽃 진 자리에 열매 맺나니 - 
 
엄마의 마지막 일기장을 만들어 드리며 표지에 적어 드린 나의 응원가다.
김동원 작가의 석류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를 보자 엄마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에게 받고 싶은 유품으로 꼭 엄마의 일기장을 갖고 싶었다.
살아 생전에 어떤 걸 보았고, 어떤 느낌을 가졌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일기를 통해 엄마의 속내를 훔쳐 보고 싶었다.
엄마 돌아가시면, 분명 그 일기장은 엄마와 나를 영적으로 묶어주는 끈이 되리라 믿었다.
엄마를 볼 때마다 일기를 쓰시라고 보챘다.
- 야야! 나는 일제 시대에 공부해서 맞춤법도 다 틀리는데 뭘 쓰라꼬...
- 엄마! 신춘문예 출품작도 아니고, 딸 외에 볼 사람도 없는데 맞춤법이 좀 틀리면 어떻고 문장이 안 좋으면 어때요? 저는 그냥 엄마가 육필로 쓰신 거면 다 좋아요!
- 하이고! 그래도 넘사시러버서...
- 엄마! 넘이 봐야 넘사시럽지요. 딸만 볼 건데 뭐가 넘사시러버요? “우리가 넘이가?!” ㅎㅎ
- 맞다, 맞다!! 그런데 맨날 그 날이 그 날이라 쓸 게 없는데?
- 엄마! 우리 어릴 때 무엇이든지 예사로 보지 말라고 하셨지요? 엄마 눈이 좋아서, 팔십이 넘어도 약병 글씨까지 다 보는데 무슨 걱정! 방 한 번 삥 둘러 봐도 쓸 게 많구먼요!
- 니는 글 쓰는 사람이라 그렇지만...
-엄마! 언니도 동시 작가고, 나는 수필가고, 막내는 인터넷 작가신데 우리 피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요? 엄마가 ‘처녀 총각 만나서 대한민국 만세!’ 부르면서 DNA에 다 넣어 주신 거죠! 엄마도 작문 쓰신 거 맨날 뒤에 붙여졌다면서요?
- 하하하! 옛날에는 너거 엄마가 못하는 기 없었는기라!
공부 잘 했지, 수 잘 놨지, 습자, 작문, 그림, 달리기... 만능 선수였지!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고 신났다.
- 맞습니더! 게다가, 고성 3대 미인 중에 한 명이셨지! 뭐 빠질 게 없잖아요? 까이껏! 일기 그거 뭐라꼬, 그냥 생각나는대로 끄적끄적하면 됩니더! 아, 그라고 국어 선생 딸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꺼?
- 하하하! 듣고 보이 그렇네! 알았다! 생각나면 한 번 써 보꺼마!
크게 자랑할 게 없는 엄마는 걸핏하면 “와아? 처녀 총각 만나서 아들 낳고 딸 낳고 대한민국 만세 불렀으면 됐지! 뭘 더 바래?” 하고 유세하셨다.
엄마를 웃기려면 다른 말 필요 없다.
이 말 한 마디만 흉내 내면, 그 자리서 까르르 넘어가신다.
엄마도 농담 나도 농담, 함께 웃는 웃음이 천정을 날렸다.
나는 쓸 게 없다는 엄마를 위해, 샘플로 짧은 수필을 3-4 편 써 드렸다.
중심 단어 하나만 잡고 물고 늘어지라고.
눈에 보이는 금붕어, 난 화분, 창문, 노래 수첩, 약병 등등...
빤히 쳐다 보고 있으면, 저희들이 먼저 말을 걸어 올 거라고.
그걸 그냥 받아 쓰기만 하면 된다고.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러나 엄마의 일기장은 내가 써 드린 단수필 샘플만 적혀 있을 뿐, 늘 깨끗한 한 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방 안이 조용했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보니, 밥상 위에 노트를 펼쳐 놓으신 채 뭔가 열심히 쓰고 계셨다.
‘아하! 엄마가 드디어 글을 쓰시는구나!’ 난 쾌재를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소녀처럼 수줍게 입을 가리고 웃으시면서 노트를 내미셨다.
- 하이고, 모르겄다! 그게 글인지 내 넋두린지..:
제목은 <호박 나무>였다.
‘나의 그리움을 흘려 버릴 수 없어 글로 표현해 본다’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었다.  
 
... ... 봄에 자란 호박 나무/ 여름에는 열매를 매저준 호박/ 예쁜 호박을 친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먹게 한 고마운 호박/ 가을에는 더문더문 매저준 호박/ 그러나 줄기마는 싱싱한 호박 나무/ 지금은 초겨울인데도/ 아침 저녁 즐겁게 바라 본 귀여운 호박/ 세월은 거슬리 수 없는지 군대군대/ 시들어 가는 호박잎/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 아마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할 거야...... 
 
‘나도 너와 함께 시들어 간다’에서 목이 콱 막혔다.
하지만, 오버 액션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 와우! 엄마! 고칠 거 하나도 없어요! 진짜로, 참말로... 하하! 그리고 여기 ‘나도 너와 같이 시들어 간다’ 바로 이것이 이 시를 확 살렸어요! 엄마와 호박이 하나 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인생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핵심이에요!  와아! 우리 엄마! 진짜 잘 쓰신다아 ~ 계속 그렇게 써 보세요!
엄마의 표정이 영락 없이 선생님께 칭찬 받은 학생 모습이다.
십 년을 한결같이 가꾸어 오던 채마밭을 노인 아파트 새 주인이 들어서면서 파킹랏 설치 계획으로 뺏겨 버렸다.
그 이후, 엄마는 거름밭이 되어버린 채마밭을 우정 외면하고 돌아서 다니셨다.
그러던 다음 해 봄날, 뾰족 올라온 호박 떡잎을 우연히 보게 되셨다.
그때부터, 생명은 죽일 수 없다며 아침 저녁으로 우유통에 물을 받아 뿌려주셨다.
호박은 무럭무럭 자라, 친구와 나누어 먹을 정도였다.
초가을 무렵, 마지막 호박을 따 오신 날은 차마 반찬으로 해 드시지 못하고 호박을 만지작거리고만 계셨다.
아무래도 아쉬웠나 보다.
시든 줄기조차 떼어 버리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라도 되라고 그냥 두고 오셨다 했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 달랠 길 없어, 홀로 방에 들어 가셔서 끙끙대며 호박과의 이별사를 쓰신 모양이다.
엄마의 <호박 나무>는 6개월 뒤 임종하신 어머니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꽃이 진다고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꽃 진 자리엔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2012년 4월, 엄마의 봄날은 끝났다.
여든 셋, 어머니꽃 떨어진 빈 자리에 우린 어떤 어여쁜 모습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
미련인 양, 열매 위에서 머뭇대고 있는 석류꽃을 보니 어머니 생각 절로 난다.  
- 어머이!
- 아, 우리 희서이가? 왔나? 문 열어 주까?
엄마의 화들짝 반기는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온다.
 (2020. 5) 
 
(사진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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