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분꽃 씨 2알

2025.06.22 21:02

서경 조회 수: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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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 언제 이리 예쁜 방을 꾸미셨나

꾸민 날자 몰라도

임자 아직 들지 않았으니

벽지 향

풀풀한 방에

신방인 양 올랐네

 

바람 불고 비와도 하늘 아래 대궐인데

칠보주단 가구쯤

있은들 애물이지

빈 벽에

먹 잉크 뿌려

별꽃들이 피는 방

 

창 없는 창틈으로 달이 지고 별이 지면

눈뜨는 하늘 길에

어둠 세월 다 묻고

작은 새

큰새가 되어

갈 데까지 가리라

 

< 단상 >

모처럼 작품 정리를 하다 오래 전에 보내 온 글을 하나 발견했다. <몽돌>시조로 유명한 박구하 시인이 200798일에 내 문학서재에 남겨 놓은 글이었다. 반가웠다. 그는 가고 없는데, 한 자 한 자가 그의 호흡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천국에서도 그는 시조를 쓰고 있을까.

단 한 번의 만남! 2002년 정완영 선생을 모시고 언니랑 선생님의 시비 투어 여행을 할 때였다. 김천, 문경, 예천, 대구 등등을 거쳐 울산에 다다랐을 때였다. 정완영 선생을 뵈오러 지역의 많은 시조 시인이 몰려 왔다.

선생은 한 사람을 시조계의 큰 재원이라 치켜세우며 인사를 시켰다. <시조월드> 편집을 맡고 있는 박구하 시인이라 했다. 검게 탄 얼굴에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꽤나 무뚝뚝하게 보이는 갱상도 사내였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부산으로 아버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그도 마침 부산 여류 시인들 초대를 맡고 강의를 하려 부산으로 가야 했다. 그와 나는 뜻밖에도 같은 시외버스를 타고 여행 같은 동행을 하게 됐다.

대화를 나누어 보니 상당히 지적이고 깊이가 있었다. 게다가, 인상과는 달리 퍽 다정다감했다. 한국 시조계의 실태를 말해줄 때는 저으기 실망스런 말투였다. 나는 속으로 '여기도 시대의 조류를 타거나, 줄 서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하고 넘어 갔다.

언니의 권유로 갑자기 나온 귀국 여행이었고, 목적이 '정완영 선생 살아 계실 때 함께 선생의 시비를 돌아보는 것'이었기에 도무지 내 개인 시간이 없었다. 내 가방엔 친구들 만나면 줄려고 마련한 소소한 선물과 커피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날 시간이 없던 나는 그에게 불쑥 커피 한 봉지를 꺼내 주었다. 그도 뜻밖에 건네받은 선물에 잠시 멈칫하더니, 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시럭거렸다.

"그럼, 나는 이거라도..."하며 꺼내 준 선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분꽃 씨 2! 거무티티하고 무뚝뚝한 '갱상도' 사내 호주머니에서 꽃씨가 나오다니! 상상도 못한 반전이었다.

아침에 나오는데 현관 앞에 분꽃 씨가 떨어져 있어 주어 왔단다. 그는 외국을 넘나들며 사업하는 비즈니스 맨으로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그의 심경 어디에 이런 여유가 있었을까. 허리를 굽혀 분꽃 씨를 주운 이 감성적 남자는 도대체 누군가.

"고국 생각하며 분꽃 씨 심으세요!"

"- 장독은 없지만 고향 심듯 분꽃 씨 심고 볼게요!"

분꽃 씨 2 알을 두 손 모아 받았다. 내 마음은 미국 우리 집 1에이크 땅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내 고향집 작은 뜰로 달려갔다. 수수한 분꽃 씨는 시골에서 자란 나에겐 봉숭아꽃이나 빨간 맨드라미만큼이나 정겨웠다.

버스가 도착할 즈음, 갑자기 굵은 소낙비가 쏟아졌다.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나는 우산이 없었고 그는 우산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우산대를 잡고 지하도까지 냅다 뛰었다. 어차피, 둘 다 한 쪽 어깨는 젖을 터. 이왕이면 비를 적게 맞자는 심산이었다. 그의 강의 시간도 임박했다.

'가을비 우산 속을'하는 노래 가사처럼 감상에 젖거나 정우성처럼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서면 쪽 방향의 지하철을 탔고 나는 대신동 쪽의 지하철을 탔다. 남북이 갈리듯 서와 동으로 나뉘어 우린 중간 지점에서 헤어졌다.

그 이후, <시조월드> 원고 문제로 한두 번 연락했을 뿐 만날 일은 없었다.

2008616. 내 문학서재에 이 글을 남긴 지, 1년도 안 되어 그는 갔다. 바람결에 들려온 그의 병명은 뇌일혈. 겨우 60 남짓한 나이. 너무 일찍 가서 아쉽고, 지하자원 같이 무궁무진했던 그의 재능이 묻혀 아깝다.

처음 만났는데도 오라버니같이 격의 없이 대해 준 그. 내게 꽃씨 선물을 준 유일한 남자. 갑자기 내린 소낙비 속을 냅다 뛰었던 영화 같은 한 장면. 내겐 이것만으로도 오랜 기억 속에 남을 사람이다. 늦게나마, 그의 영혼이 천국에서 평안하기를 빌며 답 시 하나 띄운다.

 

분꽃 씨 2

 

호주머니 뒤져 건네 준

분꽃 씨 2알이라

 

뒤뜰에 묻어 두고

고향 보듯 하라신다

 

장독도

없는 이국 땅에

고향 심듯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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