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감상) 발가벗고 춤추마 - 장은초

2012.01.06 10:15

지희선 조회 수:446 추천:32


며칠 전부터 나에겐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실로 난감하기만 하다. 매사 주도면밀하다는 소릴 듣는 내가, 자승자박의 올가미에 된통 걸려들고 말았다.  한 꼬투리 속에 든 콩도 더 실한 게 있고 덜 실한 게 있듯이, 두 이이를 키우다 보니 태(胎)가 같다고 일매지리라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이란 걸 알았다. 두 아이는 성격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라, 가끔 애들이 형제가 맞나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어떤 성격이든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 그걸로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두 아이의 성적차이이다 공부를 제 스스로 하는 아이와 부모가 채근해서 마지못해 하는 아이의 성적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큰아이가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나도 아이랑 함께 시험공부를 했다. 영어, 수학, 과학은 이미 내 손이 못 미치는 과목이라 학원에다 맡기고 나머지 아홉 과목은 내가 진두지휘를 하며 치렀다. 그 담당과목 선생님 입장이 되어 시험문제를 내가 출제해 보았다. 아이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나 함정에 들기 쉬운 문제, 교과서에는 없으나 한번쯤 설명하고 지나갔을 법한 문제들을 골라서 과목당 50문제씩을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내 노력에 큰아이의 열성이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시험 때마다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나에게도 교학 상장(敎學相長)*의 길이기도 했다.

작은 애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큰애에게 했던 것처럼 시험 때마다 나는 야전 사령관이 되곤 했다. 하지만, 작은애는 늘 내 기대에 못 미쳤고 성적표를 받아올 때마다 번번이 나를 실망시켰다. 그래서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녀석아, 단 한 과목이라도 좋으니 100점 좀 받아와 봐라 그러면 내가 발가벗고 춤추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돌겠다.”라는 말을 3년 동안 줄기차게 해왔다. 그러던 두어 달 전쯤인가, 모 방송국 가요프로그램을 본 작은 애가, 인디밴드 카우치의 멤버들이 발가벗고 춤추다가 경찰에 잡혀갔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도 잡혀가고 싶지 않으면 그런 말은 인제 그만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만한 엄포에 발가벗고 춤추겠다는 말을 거둬들일 내가 아니다. 작은 애가 100점 받는 것보다, 없는 손자 환갑 지내 먹거나 솔 심어 정자 만드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 기대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며칠 전, 작은 애는 3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치렀다. 득의양양하게 현관문을 들어선 녀석의 손에는 시험지가 휘날리고 있었다. 가방에 넣어오다 집 근처에서 꺼내든 게 분명했다. “엄마, 이제 발가벗고 춤출 일만 남았네요!”하며 녀석이 내민 것은 100점 받은 수학시험지였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나는 엄마가 발가벗고 춤추는 걸 원치 않지만 엄마가 늘 그러셨지요. 자신의 말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요. 3년을 별렀던 일이니 우리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요. 이왕 나설 거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노량진 전철역쯤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게 어때요? 언제가 좋을지 아예 D-day를 잡을까요?” 속사포로 쏘아대는 녀석은 D-day를 잡는 게 아니라 나를 아주 쥐 잡듯 했다.

‘전들 3년 내내 맺힌 게 오죽했을까, 시험 때마다 대여섯 과목씩을 100점 받아오는 제 형에게 얼마나 누룩이 들었겠으며, 공부 못한다고 나에게 핀잔들은 건 또 얼마였던가, 녀석의 입장에선 작심을 하고야 이죽거릴 만도 하겠지….’

실제 발가벗고 동네 한 바퀴를 돈 여자가 있기는 하다.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방의 영주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매겼다. 영주부인인 고디이버가 시민들을 대신해 세금을 줄여 줄 것을 간청했다. 영주는 아내의 말을 묵살하면서도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아내에게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영주의 부인은 서슴없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로 나섰다. 이 사실을 안 시민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드리운 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고다이버 부인의 숭고한 정신을 성적 호기심으로 변질시키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결의였다. 고다이버 부인이야 민의를 대변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발가벗고 동네를 기행(騎行)했다지만 나는 무슨 명분이란 말인가,  

녀석이 제 깐엔 기본 용돈에다 약속을 못 지킨 범칙금이란 명목으로 용돈을 두 배로 받아내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내가, 제아무리 지싯거린들 만만쟁이 노릇만 할까, 녀석이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제 어미가 구미호보다 더한 ‘매구’라는 사실을. 필히 발가벗고 춤춰야 한다면 그 장소는 노량진역이 아니라 저 학교인 국사봉중학교 운동장이 될 거라고 더 큰 엄포를 놓아야겠다. 좀 치사스럽더라도 뒷갈망은 하고 봐야겠기에.

*사람에게 가르쳐 주거나 스승에게 배우거나 모두 나의 학업을 증진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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