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삶을 북돋우는 국어 교육 - 김수업

2012.10.08 17:44

지희선 조회 수:451 추천:27

부산 국어교사 연수물에서 퍼온 글이다.

삶을 북돋우는 국어 교육


김수업 /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 교육과



1. 먹고 살자는 일인가?

그렇다. ‘국어 교육’이라는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나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한다. 일꾼으로 자처하며 조합을 만들고 일할 맛이 나는 조건과 환경을 가꾸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 나온다.
그러나, 일이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돈을 벌면 그뿐인가? 돈만 벌고 그뿐이라면 구멍가게를 내거나 회사원을 하지 않고 하필 국어 교육을 하는 까닭이 뭔가? 그런 일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골라잡은 것인가?
그게 아니다. 일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무엇보다도 보람을 주어야 한다. 아니, 일이 그런 것들을 주어야 한다기보다 내가 일에서 그런 것들을 얻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따분하고 지겹다. 한시바삐 팽개쳐버리고,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이 복된 삶을 값지고 보람차게 만드는 길이다.
지금의 국어 교육이 여기 모인 젊은 국어 교사 여러분들에게 과연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을 맛보게 하는가?


2.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노릇인가?

그렇다. ‘국어 교육’으로 학생들을 잘 자라게 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교실에서 하고 있는 국어 교육으로 학생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이 오늘 학교에서 하고 나온 국어 교육으로 학생들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렀을까?
아니다. 학생들이 잘 자라려면 무엇보다도 머리가 환히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하게 열려야 하는데, 국어 공부가 오히려 머리를 아프게 어지럽히고 마음을 갑갑하게 닫아 잠그도록 부채질하고 있다. 정답이 본디 없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정답을 찾으라고 우기기 때문에 학생들은 머리가 아프기만 하고 마음이 갑갑하기만 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답을 국어 교육 안에서만 찾고 있으니 그것으로 어떻게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며, 그것이 어떻게 세상 안에서 평생을 복되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겠는가? 다만, 시험을 치는 데나 써먹을 수 있을 뿐이다. 시험지를 덮으면 그길로 잊어버려도 도무지 아까울 것이란 없다.
시험을 치는 데만 써먹을 수 있어도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 이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 학생들이 치는 시험은 뭣을 하자는 노릇인가? 차례를 매기자는 노릇일 따름 아닌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값진 삶을 살아가자면 반드시 알고 깨달아야 할 것을 얼마나 깊고 넓게 알고 깨달았는가를 밝히자는 시험이라면 그런 시험을 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공부가 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차례를 매기자는 시험이라면 그것에 써먹는 것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기병이가 일등이면 어떻고, 꽃님이가 일등이면 어떤가? 옥희가 꼴찌면 어떻고, 철호가 꼴찌면 어떤가? 이래도 누군가는 일등을 하고, 저래도 누군가는 꼴찌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학급의 학생만 다른 학급의 학생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까닭이 뭔가? 우리 학교의 학생만 다른 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아서 차례에 앞서야만 직성이 풀릴 까닭이 어디 있는가? 일류 대학이라는 것이 과연 있다면, 우리나라의 학생들 가운데 어차피 누군가는 그런 대학에 들어가서 정원을 채우고야 말지 않겠는가? 남은 들어가지 말고 나만 들어가야 하고, 너희는 들어가지 말고 우리만 들어가야 하는 까닭을 어디서 찾겠는가? 남이야 어찌 되었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국어 시험을 잘 쳐서 일류 대학에 많이 붙었으면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국어 교육을 해서 참으로 학생들을 잘 자라게 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평생을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은 없을까?


3. 우리가 찾아야 할 국어 교육의 길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야 할 국어 교육의 길에서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국어 교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을 마음껏 맛보게 해야 한다. 둘째는 학생들에게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으로 평생을 보람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두 가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첫째 것은 둘째 것에서 저절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으로 보람차게 살아가도록 도우면서 그렇게 자라고 살아가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교사는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을 맛보게 된다. 국어 교사의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은 학생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 일에서 나온다. 그것을 거기서 찾지 않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면 허탕을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생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엉뚱한 데서 보람을 찾으려는 국어 교사들이 없지 않다.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제가 좋아하는 낚시며 등산 따위 이른바 취미 생활에 빠지는 교사들과 가정을 알뜰하게 가꾼다는 착각에 빠져 돈이 생길 만한 부업 따위를 밝히는 교사들이다. 한 사람의 삶으로 말하자면 그런 취미와 부업 생활을 반드시 허탕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국어 교사의 삶으로서는 허탕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의 사람됨과 삶을 북돋우면서 교사들이 보람을 맛보는 국어 교육의 길은 지금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했다. 나타나지 않은 길을 찾자면 반드시 애를 태우고 땀을 흘리고 밤잠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더러는 깜깜한 밤중에 수풀 속을 헤치듯한 고비를 만나서 가시덤불에 살갗을 할퀴어 피를 흘리고 돌부리에 넘어져서 무릎을 깨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아픔과 괴로움이야말로 기쁨과 즐거움의 밑천이고 보람의 바탕이기에 달게 받으며 나아가야 한다.

4. 삶을 북돋우는 국어 교육

가. 제 스스로를 살피도록
국어 교육은 우리가 눈만 뜨면 주고받는 우리말을 다루는 교육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우리의 국어 교육은 우리 스스로를 살피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1) 우리말을 살피지 못했다
진짜 우리 토박이말은 반세기 동안의 우리 국어 교육에서 쓰레기처럼 내버려졌다. 온 겨레가 기나긴 세월에 걸쳐 눈만 뜨면 주고받은 우리의 아름답고 보배로운 토박이말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국어 사전을 만들고, 국어 문법을 세우고, 국어 교과서를 만들고, 국어 교육을 해왔다. 우리 토박이말은 살피지 않은 채로 남의 사전을 베끼고, 남의 문법을 빌리고, 남의 교과서를 본뜨고, 남의 국어 교육을 흉내내면서 국어 교육을 잘 하는 것으로 알았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볼 수 없는 남의 낱말로 사전이 가득 차고, 날마다 주고받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의 이론으로 문법책을 메우고, 집안에서 가족들과 나누는 말과는 다른 남의 말로 교과서가 꾸며지고, 나날이 살아가며 쓰는 말과는 동떨어진 것만으로 국어 교육을 해왔다.

2) 우리 삶을 살피지 못했다
이러니 저절로 우리의 삶을 살필 수가 없었다. 말은 소리와 뜻으로 이루어지고, 소리와 뜻은 사람의 천품과 경험과 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말은 곧 사람의 천품과 경험과 정신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말은 개인의 천품과 경험과 정신으로 이루어지고, 공동체의 말은 공동체의 천품과 경험과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토박이말을 꼼꼼이 살피지 않았으니 토박이말에 담긴 우리네 삶을 어떻게 살필 수 있었겠는가. <우리 마누라>, <우리 서방님> 하는 말을 꼼꼼히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값진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고, <얼>과 <넋>이란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우리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알고 살았는지 깨달을 수가 없었다. 토와 씨끝이 슬쩍만 달라지면 말뜻이 엉뚱하게 바뀌어지고, 마지막 풀이말이 끝날 때까지 귀담아 들어보지 않고는 말하려는 뜻을 붙잡을 수 없는 월짜임을 곰곰이 살폈더라면 우리네 삶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말로써 우리 삶을 살피고 배우는 국어 교육을 하지 못했다.

3) 미국․일본만 따라가려 했다
알다시피 왕조 사회 후반 일천 수백 년 동안 우리 겨레의 지배 계층과 지식인들은 내것을 버리고 중국을 따라가기에 겨를이 없었다. 진나라를 본떠서 고구려가 태학을 세우고(372), 당나라를 본떠서 신라가 국학을 세운(682) 뒤로 갈수록 중국 따르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자 이제부터 우리 겨레의 지배 계층과 지식인들은 다시 미국과 일본을 따라가느라 눈코뜰새가 없다.
왕조 시대에 중국 따라가기를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 이렇게 학교 교육으로 부채질을 해댔듯이 민주 시대에 미국․일본 따라가기도 학교 교육이 앞장섰다. 한미수호조약 보빙대사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이 미국 교사를 바로 들여와 시작한 육영공원(1886)에 이어 일어학교(1891) 같은 외국어학교에서 비롯하여 오늘까지 내려오는 학교 교육이 내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따라가는 풍조에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그처럼 얼빠진 역사와 전통에 뿌리가 박힌 학교 교육 안에 국어 교육도 싸잡혀 있으니 어찌 다른 길로 나갈 수가 있었겠는가.
광복한 뒤로 우리네 국어 교육이 미국과 일본을 따라가느라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아보려면 아주 간단한 길이 있다. 교육과정을 놓고 서로 견주어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것은 미군정 시절에 만든 교수요목의 틀을 마련하며 자리잡은 뒤로 교육과정의 뼈대로서 여태까지 굳건히 남아 있고, 일본 것은 그 뒤로 일곱 차례 바뀐 교육과정의 구석구석에 파고 들어와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나. <말의 힘>을 깨닫도록
사정이 이랬으니 국어 교육에서 말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일제가 가르치고 간 거짓 이론에 물든 정신을 씻어내지 못하고, 말을 그냥 낫이나 그릇이나 수레나 컴퓨터 같은 도구로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말은 살아가는 데 쓰려고 사람이 제 힘으로 만들어낸 도구와는 다르다. 조물주가 생명과 함께 사람의 몸에다 마련해놓은 신비스러운 능력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이천여 년 동안 곱씹고 되씹은 다음에 소쓔르 같은 현대 언어학자들이 나와서 “이제 말의 신비는 그만큼 알았으니 과학으로 헤집어보자”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네 국어학자들은 소쓔르의 『언어학원론』은 알아도 단테의 『토박이말 옹호』는 모르고, 촘스키의 이론은 공부하면서도 데카르트의 이론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1) 『꼬리없는 원숭이』
지구 위에 살아있는 온갖 생명체들이 벌이는 진화의 마라톤에서는 사람만 홀로 멀리 앞장서 달려나간다. 둘째인 렘나 원숭이를 비롯하여 목숨 있는 온갖 것들도 사람을 멀리 바라보며 쉬지 않고 달려나가지만 저들은 모두 한 무리를 이루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존재들을 멀리 뒤로하고 사람만 홀로 앞장서 내달리게 되는 까닭은 뭘까? 그 까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말’이라고 한다.

2) 브로카(Paul Broca) 영역(소리)과 베르니케(Carl Wernicke) 영역(뜻)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나 저들끼리 정보를 주고받는다. 그들 가운데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자리를 옮기며 살아가는 동물들은 골(뇌)을 지니고 거기서 정보를 간추리고 부린다. 소리를 내어서 정보를 주고받는 짐승들의 일(이것이 말의 본질이다)도 거기서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골은 진화의 차례와 발맞추어 ‘뇌수 → 뇌간 → 소뇌 → 중뇌 → 대뇌 → 피질’로 자라난다. 뇌수쪽으로 가면 갈수록 목숨의 본질과 기초를 맡고, 피질쪽으로 가면 갈수록 본능에서 멀어지는 추상과 상상을 맡는다. 그래서 골이 어디까지 자라났는지를 보면 그 동물이 진화의 마라톤에서 어떤 차례로 달리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소리를 내어 정보를 주고받는 ‘말’은 왼쪽 대뇌 피질에 이웃해서 자리잡은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에서 관리한다. 그런데 유인원을 비롯하여 모든 짐승들이 소리로 정보를 주고받는 일은 뇌수와 뇌간에서 맡고 있다. 그만큼 짐승들의 소리는 본능으로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말은 추상으로 하는 노릇이라 서로 견줄 수가 없는 것이다.

3) 바벨탑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지방에 내려오던 수메르 겨레의 신화였다. “동쪽에서 흘러오던 사람들은 시날 지방에 모여서 ‘낱말도 같은 한 가지 말’을 쓰면서 돌을 벽돌로, 흙을 역청으로 바꾸어 도시를 세우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았다. 하느님이 이런 사람들의 도시와 탑을 보고 걱정스러워 ‘말을 뒤섞어’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우던 도시와 쌓던 탑을 그만두고 뿔뿔이 흩어졌다.”
모든 자연과 환경은 물론 사람의 육신 조건까지도 그대로 있고 오직 ‘말’만 바꾸어 썼는데 동아리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낱말까지 같은 한 가지 말’을 쓸 적에는 하느님도 두려워할 만한 문명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이것저것 ‘뒤섞인 말’을 쓰니까 그만 아무 일도 못하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 <국어의 뜻>을 알도록
국어 교육을 반세기 동안이나 해왔는데 국어의 뜻을 잘못 가르쳤다고 하면 소가 웃을 소리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1) 입말과 글말과 전자말
국어의 바탕과 뿌리는 누가 뭐래도 입말(Oral language)이다. 입말은 가마득한 옛날부터 써왔을 뿐만 아니라 겨레의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써온 말이다. 써온 시간으로 보거나 써온 사람으로 보거나 입말은 국어의 바탕이며 뿌리가 아닐 수 없다. 지난날로 보아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날을 보아서도 그렇다. 입말은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우리 겨레면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 쓸 것이다.
입말에 견주어 글말(Written language)은 써온 시간에서나 써온 사람에서나 보잘것이 없다. 겨레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글말을 쓰게 된 것은 이제 겨우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는 셈이고, 지난 날로 갈수록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만 글말을 쓸 수 있었다. 그나마 글말이라는 것을 쓰기 비롯한 시간이 겨우 오백여 년에 지나지 못한다. 중국의 글말을 빌어다 쓴 것은 그보다 일천 년을 더 올려잡아야 하지만, 그런 중국 글말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은 참으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몇 되지 않았다.
사실은 이와 같은데 우리네 국어 교육은 여태까지 국어의 바탕이며 뿌리인 입말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겨레가 생기기에 앞서 글자와 글말이 있었던 서유럽의 이론에 얼을 빼앗기고, 글말로 살아온 역사가 깊어 글말의 유산이 산더미처럼 쌓인 중국의 이론을 본받고, 중국만은 못해도 글말을 쓴 시간과 사람이 우리보다는 곱절을 넘게 많았던 일본을 따라가려고만 하면서 우리의 남다른 말살이를 찾아 내세우지 못했다. 더없이 가멸지고 넉넉한 입말은 돌보지 않고 보잘것없고 가난한 글말에만 마음을 쓰자니 아무리 보아도 서양이나 중국이나 일본에게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전자말(Electron language)이라는 새로운 말의 새벽을 맞이했다. 입말과 글말을 모두 붙들어서 얼마든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눈깜박할 사이에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전자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느 겨레도 우리만큼 전자말을 잘 부려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한글이 뛰어난 글자이기 때문이다. 국어 교육이 전자말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짐이며 몫이다.

2) 국어의 뜨레
우리 국어에는 여러 뜨레의 말들이 싸잡혀 있다. 그래서 그런 뜨레를 제대로 가려서 쓰고 가르치고 해야 마땅하다. 말이란 사람이 마음을 먹고 쓰는 것이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쓸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생각은 주시경에서 비롯하여 일제 아래 활발했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에게로 이어졌다. 광복한 뒤로도 최현배를 중심으로 이어졌으나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 서울대학교를 유달리 우대하면서 일제가 거기 심어둔 덫에 걸려 이런 생각은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겨레가 써왔고 쓰고 있는 말이면 모두 국어라고 하는 생각이 휩쓸고 있다. 말이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세상에서 쓰는 말이면 모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응백의 『국어 교육사연구』(신구문화사, 1975)를 비롯해서 갖가지 국어사전들도 그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졌다. 경성제국대학 어문학부에서 가르친 고바야시(小林英夫)의 영향에 뿌리가 박혔다고 보는데, 근래 우리 국어 교육의 이론, 정책, 실천이 거의 이런 생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쓰는 말은 모조리 한결같은 국어일 수 없다. 국어의 한가운데는 우리 겨레가 스스로 만들어 쓰는 토박이말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에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 있고, 다시 그 언저리에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말과 서양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서양말이 있도록 뜨레를 지어야 한다. 중국이건 일본이건 서양이건, 밖에서 들어온 말에는 우리말이 미처 되지 못한 남의 말(외국어)이 있고, 우리말의 틀에 맞추어져 어우러진 우리말(외래어)이 있다. 이것이 국어의 뜨레다.


라. <말과 삶>을 하나로 보도록

1) 입말․글말과 삶
사람들은 일찍이 입말을 시간과 공간에서 뛰어넘게 하고 싶었다. 그런 바람은 긴 곡절을 거쳐 글자를 만들기에 이르고, 마침내 글말을 쓰는 데까지 왔다. <글자>는 칠천 년 전부터, <글말>은 삼천 년 전부터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글말은 정보를 담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정보가 잇달아 쌓이고 언제든지 다시 꺼내 쓸 수 있게 되자, 글말을 쓰는 겨레의 진화는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입말만 쓰는 겨레들과의 거리가 갈수록 벌어졌다.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뜨레가 환히 나타난다.
가) 글말이 없는 겨레 : 진화의 달리기에서 가장 뒤쳐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 글말이 있어도 나쁜 글말을 쓰는 겨레
(1) 제 겨레의 입말에다 남의 입말․글말을 덮어서 쓰는 사람들 :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와 인도를 비롯한 여러 겨레들
(2) 제 겨레의 입말에다 남의 글말을 덮어서 쓰는 사람들 : 중국의 주변 여러 겨레들
다) 좋은 글말을 쓰는 겨레 : 제 겨레의 입말을 그대로 글말로 쓰는 사람들
(1) 글말이 입말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겨레 : 발음 기호를 써야 하는 겨레
(2) 글말이 입말을 그대로 담아내는 겨레 : 소리에 맞는 글자를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겨레

2) 전자말과 삶
사람들은 마침내 물질 안에 들어있는 전자를 부리면서 입말과 글말을 새롭게 쓰는 전자말을 만들어냈다. 소리를 줄에 실어 멀리 보내고(전화기), 크기를 키워서 널리 퍼지게 하고(확성기), 붙잡아 두었다가 다시 되살려내고(축음기, 녹음기), 입말과 글말을 손쉽게 붙잡아 두었다 다시 되살려내고(컴퓨터), 눈깜박할 사이에 어디든지 주고받을 수(인터넷) 있게 했다.
전자말은 지난 백 년 사이에 생기고 자랐는데, 앞으로 나날이 놀라운 모습으로 자라나갈 것이다. 글말보다 더욱 무섭게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고, 사람들의 진화 마라톤에서 앞뒤 사람들의 거리를 갈수록 벌일 것이다. 우선 눈앞에서 보더라도 아래와 같은 뜨레가 뚜렷이 드러난다.
가) 전자말을 쓰지 못하는 겨레 : 가장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나) 나쁜 글말에 전자말의 발목이 잡히는 겨레 : 주고받는 속도가 느려서 진보가 더뎌진다.
다) 입말과 글말이 전자말에 잘 어우러지는 겨레 : 누구나 빠르게 주고받으며 앞장서 나간다.

마. 우리말을 살리도록

1) 우리말을 보는 눈
우리가 쓰는 입말 --- 우리말 --- 토박이말(배달말)
                       --- 들온말 --- 중국말(한자말)
                       --- 일본말(한자말)
                       --- 서양말
우리가 쓰는 글자 --- 우리글자 --- 한글(․향찰)
                       --- 들온글자 --- 한자(중국글자)
                       --- 로마자(서양글자)
우리가 쓰는 글말 -- 우리말 --- 한글말
                       -- 들온말 --- 한문(중국 글말)
                       -- 일문(일본 글말)
                       -- 영문(영미 글말)

2) 잃어버린 우리 이름
(1) 땅 이름 : 나라와 임금의 이름을 중국에 따라 바꿈(지증 4, 503) → 나라 땅과 백성을 중국에 따라 다스리도록 바꿈(구주와 오소경, 신문 5, 685) → 구주와 관직의 이름을 바꿈(경덕 16, 757)

(2) 사람 이름 : 7세기 이전에 건립한 진흥왕 순수비 넷(540-576), 진지왕 오작비(578), 진평왕 남산신성비(632)에는 중국식 성씨가 보이지 않음
국학(신문 2, 682), 독서삼품과(원성 4, 788)에서 비롯함 → 남북국 시대에 들어 신라 왕실과 육촌장에게 중국 성을 내림 → 고려 왕건이 군현 토호들에게 중국식 성을 정하고(태조 23, 940) 중국식 성을 내리는 정책을 씀 → 조선에 와서 족보를 챙기면서 중국식 성명이 널리 퍼짐
3) 짓밟힌 토박이말
가) 낱말의 뜻
(1) 이름씨 : <얼>과 <넋> / <속>과 <안> / <때문>과 <까닭>
(2) 움직씨 : <쉬다>와 <놀다> / <뛰다>와 <달리다> / <싸우다>와 <다투다>와 <겨루다>
(3) 그림씨 : <틀리다>와 <다르다> / <기쁘다>와 <즐겁다> / <무섭다>와 <두렵다>
(4) 어찌씨 : <매우>와 <몹시> / <온갖>과 <갖가지> / <모두>와 <모조리>

나) 가멸진 이름씨
가는실잠자리, 개미허리왕잠자리, 검물잠자리, 검은날개물잠자리, 검은물잠자리, 검정좀잠자리, 검정칡범잠자리, 고려칡범잠자리, 고추잠자리, 고추좀잠자리, 기생잠자리, 긴무늬왕잠자리, 깃동잠자리, 꼬마잠자리, 꼬마칡범잠자리, 끝빨간실잠자리, 나비잠자리, 난쟁이잠자리, 날개잠자리, 넉점박이잠자리, 넓적다리실잠자리, 노랑띠좀잠자리, 노랑말잠자리, 노랑배칡범잠자리, 노랑실잠자리, 노랑허리잠자리, 늦고추잠자리, 된장잠자리, 등검은실잠자리, 등줄실잠자리, 떼잠자리, 말잠자리, 먹줄왕잠자리, 메밀잠자리, 멧고추잠자리, 명주잠자리, 묵은실잠자리, 물방아잠자리, 물잠자리, 민풀잠자리, 밀잠자리......

다) 그윽한 움직씨
밥은 하고 / 매는 짓고 / 고두밥은 찌고 / 죽은 쑤고 / 감자는 삶고 / 콩은 볶고 / 나물은 데치고 / 지짐은 굽고 / 국은 끓이고 / 뼈는 고고 / 약은 달이고


바. 우리 말꽃을 살리도록

1) 우리 말꽃의 속내
한국문학(韓國文學) -- 구비문학(口碑文學)
                          -- 기록문학(記錄文學) --- 국문문학(國文文學) *향찰문학 포함
                          -- 한문문학(漢文文學)
우리 겨레의 말꽃 --- 우리 입말꽃 ----- ------------------  ※ 배달말꽃
                       --- 우리 글말꽃 ----- 향찰말꽃 ---
                                             ----- 한글말꽃---
                       --- 중국 글말문학(한문문학)
                       --- 일본 글말문학(일문문학)

2) 말꽃의 바탕인 입말꽃
(1) 입말꽃에는 겨레 얼의 뿌리인 서낭이야기(신화)가 살아 있다.
(2) 입말꽃에는 겨레의 삶과 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 입말꽃은 우리를 중국의 변방․아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3) 입말․글말꽃․전자말꽃이 하나되어
(1) 놀이말꽃
(2) 노래말꽃
(3) 이야기말꽃

5. 꿈을 꾸는 짓인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어 교육을 두고 꿈을 꾸고 있다고 느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으로 무서운 현실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국어 교육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렇다. 이것은 참으로 꿈을 꾸고 있는 이야기다. 한갓 국어 교육을 가지고 나를 버리고 남만 쳐다보며 쫓아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되돌려서 나를 떳떳하게 내세우는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하니 이것을 꿈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껏 국어 교육이라는 작은 지렛대로 우리 겨레가 살아온 지난 이천 년의 삶을 뒤집어서 새로운 역사의 길로 나아가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결코 헛된 꿈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적잖은 국어 교사들이 마음과 힘과 시간을 바쳐야 이루어낼 수 있는 그런 꿈일 뿐이다. 여러 국어 교육자들이 마음과 힘과 시간을 바치기만 하면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는 꿈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꿈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서유럽의 여러 겨레들에게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겨레에게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물론 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그처럼 거친 가시밭길을 끌려오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우리 백성들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세종 임금이 세상에서는 가장 좋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고, 백성의 능력과 한글이 어우러져서 다가오는 전자말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다는 조짐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걱정거리는 마음과 힘과 시간을 그만큼 바쳐줄 사람들, 애를 태우고 땀을 흘리고 밤잠을 줄여줄 사람들, 누구보다도 그런 국어 교육자가 얼마나 있느냐 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생각보다 훨씬 가벼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수많은 국어 교사들이 나와 비슷한 꿈들을 꾸면서 마음과 힘과 시간을 바치고 있으며, 애를 태우고 땀을 흘리고 밤잠을 줄여서 놀랄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런 자리도 그런 사람들이 마련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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