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2008.10.20 08:13

장태숙 조회 수:985 추천:84

   피아노
                      

그날, 온 몸에 하얀 등불 수백, 수천 개 밝힌 목련나무 아래에서 듣던 피아노 소리
텅 빈 휴일의 교정에서 음표들이 나비처럼 꽃잎처럼 출렁출렁 날아서 또르르르르르- 굴러 가기도 했는데 열여섯 살 단발머리 나는 머릿속이 구름 뭉실뭉실 하얘지면서 화구(畵具) 두 손에 단정히 그러쥐고도 무엇에 이끌리듯 미술실 대신 음악실 쪽으로  
꼭 무엇에 딸려가듯

유리창 너머로 엿본 피아노 건반 위의 흰 손
날렵한 손가락이 토해내는
수많은 언어의 애련한 뭉클거림을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통통통 뛰어가는 작은 새의 뜀박질을
광주리에 잘 익은 자두 담듯
점점 붉어지는 가슴에 쌓고 있었는데

그 향기의 흔적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고 목련꽃 눈 환한 날에 스멀스멀 기어 나와 묵은 앨범 뒤적이며 보채면 포르말린 속에 담긴 내가, 뜬금없는 열여섯 살 단발머리 내가 가슴 한 쪽이 불붙듯 후드득 떨려오는 것이다

   - 2008년 <시작>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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