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부재한 시대의 ‘신성’ 발견
유성호
1.
고진하(高鎭河)(1953- )는 1987년 〈빈 들〉, 〈농부 하느님〉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래, 꾸준한 시적 이력을 축적하면서 네 권의 시집을 차곡차곡 세상에 내놓은 중견 시인이다. 그는 ‘성(聖)’과 ‘속(俗)’이 지상에서 벌이는 치열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개신교의 사제(司祭) 시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목사인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는 ‘성’과 ‘속’ 어느 곳에도 일방적으로 깃들이지 않고, 그 사이의 통합과 균형을 특유의 종교적 상상력으로 탐색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줄곧 펼쳐온, 우리 시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세상에 차례로 내놓은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민음사, 1990)과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지성사, 1993) 그리고 《우주배꼽》(세계사, 1997) 등의 시집에는 이 같은 ‘종교적 상상력’을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그의 시적 욕망과 열정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그 세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편재해 있는 모든 신성(神聖)한 존재들을 발견하고 만나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화해하려는 일련의 ‘화목제(和睦祭)’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 시단에서 가장 빈곤한 영역 중의 하나인 ‘신성’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하고 있고, 나아가 ‘초월’ 의지와 ‘현실’ 감각 사이의 접점을 형성하는 데도 남다른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 시편들이 종교적 관념이나 교의(dogma)를 드러내고 확인하는 데 골몰하는 반면, 고진하의 시편들은 구체적인 생명의 세목들(‘나무’나 ‘꽃’ 같은 ‘자연’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을 이른바 ‘일반 계시’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면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조차 사실은 신성한 자연의 망(網) 속에서 자그마한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생태적 사유’를 거기에 결합시키고 있다. 고진하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이 같은 ‘종교적 상상력’과 ‘생태적 사유’의 결합은, 그의 시로 하여금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신성을 탐구케 하는 동시에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욕망에까지 그 시선을 투시하게 하며, 나아가 그 이면에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충동까지 가져다준다. 그래서 그의 상상력과 시는 현실 탐색의 의지보다는 근원 탐구적 욕망에 의해 더욱더 강하게 규율되고 완성되고 있는 세계이다.
또한 그의 상상력과 시는 ‘기독교’라는 특정한 역사적 종교에서 발원하고는 있지만, 모든 종교의 속성들을 아우르려는 이른바 ‘통(通)종교’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으며, 때로는 모든 생명체에서 신성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적 충동으로도 나아가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근원적인 신성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와 유기적이고 풍요로운 생태적 사유를 결합하려는 그의 시적 의지가 더욱 심화되어 풍부한 형상을 얻고 있는 세계가 이번에 출간된 네 번째 시집 《얼음수도원》(민음사, 2001)이라고 할 수 있다.
2.
먼저 시집을 펼쳐보자. 흰 하드커버에 단순하고 밝은 구도로 짜여진 표지는 시집의 제목인 ‘얼음’의 희고 서늘한 이미지와 ‘수도원’의 탈속적이고 적요한 이미지를 동시에 잘 살리고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서구적이고 이지적인 외관을 한 시인의 흑백 사진이 왼쪽에 실려 있고, 그의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단한 이력이 그 아래 정연하게 적혀 있다. 이력을 언뜻 보기만 해도 그의 구체적 삶이 종교적 자장과 문학적 자장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이어지는 〈自序〉는 “입 없는 침묵에도 빨간 혓바닥이 있음을 알겠다”는 통합과 균형, 그리고 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감각으로 시작되는데, 그만큼 그는 “열대에서 빙하까지, 시장에서 수도원까지, 풀잎에서 별까지, 붓다에서 예수까지, 의식에서 무의식까지, 소음에서 고요까지, 삶에서 죽음까지” 두루 편재(遍在)하는 신성의 흔적들을 주목하고 표현하고 노래하려 하고 있다. 시집의 첫 머리에 실린 다음 작품도 그러한 신성을 ‘라일락’의 자태에서 발견하는 새삼스런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 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보다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 〈라일락〉 전문
무수히 돋아나는 ‘라일락’의 잎새들을 보면서 “천수관음보살”의 지극한 “공양”을 떠올리고 있는 시인의 발상법은 지극히 통(通)종교적인 것이다. 그 “공양”의 결과는 물론 개인적 복이 아니라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성과 세속은 그렇게 통하고,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눈/손/향낭(香囊)”을 가진 ‘라일락’은 그 순간 자신의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신성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생태적 사유와 신성 발견의 눈이 한 떨기의 생명에서조차 ‘신성’의 가능성을 찾아내게끔 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59편의 시편들 속에는 ‘예수’ ‘엘리야’ ‘십자가’ ‘수도원’ 같은 오래된 기독교적 제재는 물론이고 ‘나무’ ‘화석’‘숲’ ‘호수’ ‘새’ 같은 자연의 뭇 생명들이 시인의 세련된 언어 감각에 의해 신성을 부여받고 있다. 더욱 이색적인 것은 위의 시에 나오는 ‘보살’처럼 ‘범종’이나 ‘연꽃’ ‘사찰’ ‘죽비’ 같은 불교적 소재가 이 시집 행간 행간에 두루 어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고진하 시인은 종교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그어져 있는 영역 표지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만남을 두고 “벽이 허물어지는 아름다운 어울림”(〈연꽃과 십자가〉)으로 해석하는 그의 안목과 그대로 연결된다. 그러고 보니, 뒤 표지의 글은 이해인 수녀와 수완 스님이 쓰고 있지 않은가. 시쳇말로 종교간에 쌓인 인위적 담 허물기 작업을 그는, 시편들의 내용은 물론이고 자신의 시집 형식에까지 이렇듯 철저하게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살아 있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죽은 생명의 흔적 속에 웅크리고 있는 신성에까지 그 시선을 확대하는 데 이른다. 다음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삶의 무늬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는 아침마다 뒷산에 올라 산책을 하다가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아예 도외시해왔던 예외적 풍경을 통해 새로운 통찰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에게 ‘아침’은 저절로 밝아오는 것이 아니라 ‘발견’에 눈을 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밝아오는 어떤 것이 된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쫙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
불꽃 같은 혓바닥이 쬐끔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 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신(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 〈꽃뱀 화석〉 전문
아침 산책길에서 문득 발견하게 된, 풍화되어가는 ‘뱀’의 시신이라는 모티프는 두 가지 점에서 ‘생명’과 거리가 있다. 하나는 이미 죽어 화석처럼 굳어져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는 점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상상력에서 ‘뱀’이라는 상징이 악(惡)의 화신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같은 두 가지 편견을 극복하고 거기에서조차 우리가 잃어버린 ‘신성’의 흔적을 들추어낸다.
시인은 자신의 산책길을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일종의 언어 유희(pun)에서 발상을 빌려온 것이지만, 자연에 미만해 있는 뭇 존재 형식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불러오는 언어 감각이다. 이 “색다른 독서 경험”에서 시인은 뱀의 등과 꼬리에 있는 “타이어의 문양”을 보게 되는데, 이때 ‘문양(文樣)’이라는 말은 ‘무늬’의 뜻도 되지만, “산이라는 책”에 담겨 있는 ‘문양(文樣, 文體 또는 文彩)’이기도 하다. 시인은 잔혹하게 밟고 간 타이어 자국을 통해 “산이라는 책”에 담겨 있는 문명의 날카로운 틈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뱀의 시신은 “눈먼/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사신(蛇神)”으로 시인에게 읽혀지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뱀에 대한 시선은 창세기의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성서적 상상력과 뱀을 시원(始原)의 생명의 한 사례로 보는 문명 비판적 시각의 통합성에서 나온다. 문명의 바퀴에 희생당한 뱀의 시신을 두고 그는 “사신이여,/이제 그대가 갈 곳은/그대의 어미 대지밖에 없겠다./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여한도 없겠다.”고 노래하는 대목은, 시인이 보기에 “어미 대지”만이 생명과 신성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모태(‘무덤’이기도 하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서서히 화석이 되어가는 뱀의 시신을 두고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의 원형이 된다. 이처럼 “산이라는 책”에서 고진하가 읽어내는 감각과 통찰은 너무도 섬세하여 우리에게 신선한 미적, 반성적 시선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남다른 신성 발견과 형상화 능력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진흙 가면(假面). 그걸 볼 수 있는 눈을/지니고 있다는 것”(〈월식〉)에 대한 오연(傲然)한 자각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기쁘다. 내가/읽을 새 경전(經典)은 바로 나”(〈범종소리〉)라는 새삼스런 자기 성찰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제 시인은 세계에 편재해 있는 신성들을 찾아 “이름 짓는 자가 아니던가?”(〈신성한 숲〉). 고진하는 그 점에서 사물에 신성을 덧입히며 명명하는 “이름 짓는” 시인이다. “미래의 불꽃만 간직한 채 숯으로 변한/순교자”(〈숯의 미사〉)로 ‘숯’을 비유하는 것이나 “성스러움의 성(聖) 자도 모르는 놈이지만/인간이 먹다 버린 뼈다귀조차/저렇게 성화(聖化)하고 있”(〈누렁이〉)는 미물에게서조차 신성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은 모두 이 시인의 그러한 일관된 ‘눈’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시인의 가장 독자적인 매력 중의 하나는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는 ‘신성’의 움직임과 힘이다. 그 대표적 형상을 그는 자신의 어머니 속에서 찾고 있다.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 〈어머니의 총기〉 전문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팔순의 어머니는” 시인에게 “예수”이자 “밥”(〈밥〉)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속성(‘밥’)과 신성성(‘예수’)을 통합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이시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하는 일련의 행동적 연쇄는 사실 의미없는 반복적 습관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무슨 노여움도 없이/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은 그분의 살아계심의 확연한 증거이어서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과는 달리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팔순 어머니”야말로 참으로 “총기(聰氣)”로 가득한, 말하자면 신성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제3시집 《우주배꼽》에 나오는 〈어머니의 聖所〉와 견주어 읽을 만한 시편이다.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어머니는 오늘도/닦고 또 닦으신다/지상의 어느 성소인들/저보다 깨끗할까/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주름투성이 손을/항아리에 얹고/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어머니의 聖所〉)라는 표현에서 보듯, 시인에게 어머니의 장독대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즈므마을 1〉, 《우주배꼽》)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사라진(또는 은폐된) 신성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의 “주름투성이 손”의 놀림에서 찾는 것도 〈어머니의 총기〉와 유사한 안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의 오래된 습관적 노동을 신성의 발현으로 보고, 그 현장을 신성의 거소(居所)로 파악하는 이 시인의 눈은 생태적인 것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인생론의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하이데거(M. Heidegger)가 재차 인용한 횔덜린(Ho촥erlin)의 물음 곧 “신이 부재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회의에 대한 형이상적 응답의 가능성으로 읽힐 만한 것들이다. 이 시인이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내 목숨이 그곳의 나무들과/구름과 바위와 물소리에 이어져 있음을/섬뜩하니 깨닫곤 한다”(〈대관령 수도원〉)는 만물 상응(相應)의 고백이나, “그분의 밝은 눈/그분의 시퍼런 눈길”(〈예수〉)을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음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나, “고통은 저의 다정한 벗”(〈하늘빛 고요〉) 혹은 “경건에 이르는 고통”(〈대관령 수도원〉)이라는 구도자적 고백이야말로, 신성 발견과 그에 따르는 고통이 결국 우리가 감당해내면서 동시에 누려야 할 몫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눈에, 신성은 어디든 존재하고(은폐되어 있고), 그것은 눈 밝은 자의 ‘발견’을 통해서만 살아나고 발현되고 완성된다.
이처럼 고진하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일락)의 모습, 죽은 생명의 흔적(꽃뱀 화석), 사람(어머니)의 구체적 삶 속에서 흩어져 있는 신성을 고루고루 채집하고 묶고 육화시킨다. 시인은 이미 첫 시집에서부터, 폐허가 된 농촌 풍경에서조차 충만한 신성을 노래한 바 있다. 그러한 역설적 투시(透視)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바로 그 신으로부터 일정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을 일정한 교의나 의식(儀式)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신성한 뭇 존재들로 그 시각과 관심을 점점 확대하려 하고 있고, 그 범주는 이제 모든 피조물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고진하 시인은 “돌아서면/이윽고 내 순한 욕망은 접히고/맑고 깊은 시심(詩心)이 불러주는 고마운 말씀들을/영혼의 수첩에 적”(〈이렇게 깊습니다〉)는 이른바 신성의 ‘대언자(代言者)’로서의 매개적 직능을 감당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3.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러나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왔던, 새로운 ‘신성’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고귀한 영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끔 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고진하만의 독자성이 있다. 산불이 나서 까맣게 타들어간 산을 보고 쓴 〈소나무들을 추모함 1·2〉 같은 ‘자연’에의 조시(弔詩)에서조차 그는 섣부른 환경론적 담론을 제출하지 않고, “푸른 수도승들의 다비식”이라는 비유를 통해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무슨 경전이라곤 씌어진 적이 없는 곳,/죄도 은총도 서식할 수 없는 곳,/신의 지문(指紋)이라면/얼음계곡에 묻힌 물고기의 뼈다귀들뿐”(〈얼음수도원 2〉)인 ‘얼음수도원’을 상상적으로 구축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그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그윽한”(〈신성한 숲〉) 것들과 “저 바다에 떠 있는 하늘빛 고요”(〈하늘빛 고요〉)로 충만한 이 세상을 따뜻하게 긍정하고 그것들과 화해하려는 의지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발견과 긍정과 화해, 이는 고진하 시에 가득한 동사(動詞)들이다.
이 모두가 “책, ‘황혼의 지식’에 집착하지 말라는”(〈단상〉, 《문학사상》 2001. 3.) 신의 음성을 옮겨 적는 시인의 태도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마음의 눈과 귀가 늘 깨어 있는 (목사)시인의 고요하면서도 힘이 있는 삶의 노래들”에서 청정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고 있는 이해인(李海仁) 수녀의 말에 수긍이 안 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구체적인 결실이 바로 《얼음수도원》이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 지은 책으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이 있음.
유성호
1.
고진하(高鎭河)(1953- )는 1987년 〈빈 들〉, 〈농부 하느님〉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래, 꾸준한 시적 이력을 축적하면서 네 권의 시집을 차곡차곡 세상에 내놓은 중견 시인이다. 그는 ‘성(聖)’과 ‘속(俗)’이 지상에서 벌이는 치열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개신교의 사제(司祭) 시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목사인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는 ‘성’과 ‘속’ 어느 곳에도 일방적으로 깃들이지 않고, 그 사이의 통합과 균형을 특유의 종교적 상상력으로 탐색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줄곧 펼쳐온, 우리 시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세상에 차례로 내놓은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민음사, 1990)과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지성사, 1993) 그리고 《우주배꼽》(세계사, 1997) 등의 시집에는 이 같은 ‘종교적 상상력’을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그의 시적 욕망과 열정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그 세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편재해 있는 모든 신성(神聖)한 존재들을 발견하고 만나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화해하려는 일련의 ‘화목제(和睦祭)’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 시단에서 가장 빈곤한 영역 중의 하나인 ‘신성’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하고 있고, 나아가 ‘초월’ 의지와 ‘현실’ 감각 사이의 접점을 형성하는 데도 남다른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 시편들이 종교적 관념이나 교의(dogma)를 드러내고 확인하는 데 골몰하는 반면, 고진하의 시편들은 구체적인 생명의 세목들(‘나무’나 ‘꽃’ 같은 ‘자연’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을 이른바 ‘일반 계시’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면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조차 사실은 신성한 자연의 망(網) 속에서 자그마한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생태적 사유’를 거기에 결합시키고 있다. 고진하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이 같은 ‘종교적 상상력’과 ‘생태적 사유’의 결합은, 그의 시로 하여금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신성을 탐구케 하는 동시에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욕망에까지 그 시선을 투시하게 하며, 나아가 그 이면에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충동까지 가져다준다. 그래서 그의 상상력과 시는 현실 탐색의 의지보다는 근원 탐구적 욕망에 의해 더욱더 강하게 규율되고 완성되고 있는 세계이다.
또한 그의 상상력과 시는 ‘기독교’라는 특정한 역사적 종교에서 발원하고는 있지만, 모든 종교의 속성들을 아우르려는 이른바 ‘통(通)종교’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으며, 때로는 모든 생명체에서 신성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적 충동으로도 나아가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근원적인 신성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와 유기적이고 풍요로운 생태적 사유를 결합하려는 그의 시적 의지가 더욱 심화되어 풍부한 형상을 얻고 있는 세계가 이번에 출간된 네 번째 시집 《얼음수도원》(민음사, 2001)이라고 할 수 있다.
2.
먼저 시집을 펼쳐보자. 흰 하드커버에 단순하고 밝은 구도로 짜여진 표지는 시집의 제목인 ‘얼음’의 희고 서늘한 이미지와 ‘수도원’의 탈속적이고 적요한 이미지를 동시에 잘 살리고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서구적이고 이지적인 외관을 한 시인의 흑백 사진이 왼쪽에 실려 있고, 그의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단한 이력이 그 아래 정연하게 적혀 있다. 이력을 언뜻 보기만 해도 그의 구체적 삶이 종교적 자장과 문학적 자장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이어지는 〈自序〉는 “입 없는 침묵에도 빨간 혓바닥이 있음을 알겠다”는 통합과 균형, 그리고 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감각으로 시작되는데, 그만큼 그는 “열대에서 빙하까지, 시장에서 수도원까지, 풀잎에서 별까지, 붓다에서 예수까지, 의식에서 무의식까지, 소음에서 고요까지, 삶에서 죽음까지” 두루 편재(遍在)하는 신성의 흔적들을 주목하고 표현하고 노래하려 하고 있다. 시집의 첫 머리에 실린 다음 작품도 그러한 신성을 ‘라일락’의 자태에서 발견하는 새삼스런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 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보다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 〈라일락〉 전문
무수히 돋아나는 ‘라일락’의 잎새들을 보면서 “천수관음보살”의 지극한 “공양”을 떠올리고 있는 시인의 발상법은 지극히 통(通)종교적인 것이다. 그 “공양”의 결과는 물론 개인적 복이 아니라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성과 세속은 그렇게 통하고,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눈/손/향낭(香囊)”을 가진 ‘라일락’은 그 순간 자신의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신성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생태적 사유와 신성 발견의 눈이 한 떨기의 생명에서조차 ‘신성’의 가능성을 찾아내게끔 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59편의 시편들 속에는 ‘예수’ ‘엘리야’ ‘십자가’ ‘수도원’ 같은 오래된 기독교적 제재는 물론이고 ‘나무’ ‘화석’‘숲’ ‘호수’ ‘새’ 같은 자연의 뭇 생명들이 시인의 세련된 언어 감각에 의해 신성을 부여받고 있다. 더욱 이색적인 것은 위의 시에 나오는 ‘보살’처럼 ‘범종’이나 ‘연꽃’ ‘사찰’ ‘죽비’ 같은 불교적 소재가 이 시집 행간 행간에 두루 어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고진하 시인은 종교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그어져 있는 영역 표지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만남을 두고 “벽이 허물어지는 아름다운 어울림”(〈연꽃과 십자가〉)으로 해석하는 그의 안목과 그대로 연결된다. 그러고 보니, 뒤 표지의 글은 이해인 수녀와 수완 스님이 쓰고 있지 않은가. 시쳇말로 종교간에 쌓인 인위적 담 허물기 작업을 그는, 시편들의 내용은 물론이고 자신의 시집 형식에까지 이렇듯 철저하게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살아 있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죽은 생명의 흔적 속에 웅크리고 있는 신성에까지 그 시선을 확대하는 데 이른다. 다음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삶의 무늬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는 아침마다 뒷산에 올라 산책을 하다가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아예 도외시해왔던 예외적 풍경을 통해 새로운 통찰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에게 ‘아침’은 저절로 밝아오는 것이 아니라 ‘발견’에 눈을 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밝아오는 어떤 것이 된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쫙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
불꽃 같은 혓바닥이 쬐끔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 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신(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 〈꽃뱀 화석〉 전문
아침 산책길에서 문득 발견하게 된, 풍화되어가는 ‘뱀’의 시신이라는 모티프는 두 가지 점에서 ‘생명’과 거리가 있다. 하나는 이미 죽어 화석처럼 굳어져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는 점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상상력에서 ‘뱀’이라는 상징이 악(惡)의 화신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같은 두 가지 편견을 극복하고 거기에서조차 우리가 잃어버린 ‘신성’의 흔적을 들추어낸다.
시인은 자신의 산책길을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일종의 언어 유희(pun)에서 발상을 빌려온 것이지만, 자연에 미만해 있는 뭇 존재 형식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불러오는 언어 감각이다. 이 “색다른 독서 경험”에서 시인은 뱀의 등과 꼬리에 있는 “타이어의 문양”을 보게 되는데, 이때 ‘문양(文樣)’이라는 말은 ‘무늬’의 뜻도 되지만, “산이라는 책”에 담겨 있는 ‘문양(文樣, 文體 또는 文彩)’이기도 하다. 시인은 잔혹하게 밟고 간 타이어 자국을 통해 “산이라는 책”에 담겨 있는 문명의 날카로운 틈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뱀의 시신은 “눈먼/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사신(蛇神)”으로 시인에게 읽혀지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뱀에 대한 시선은 창세기의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성서적 상상력과 뱀을 시원(始原)의 생명의 한 사례로 보는 문명 비판적 시각의 통합성에서 나온다. 문명의 바퀴에 희생당한 뱀의 시신을 두고 그는 “사신이여,/이제 그대가 갈 곳은/그대의 어미 대지밖에 없겠다./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여한도 없겠다.”고 노래하는 대목은, 시인이 보기에 “어미 대지”만이 생명과 신성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모태(‘무덤’이기도 하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서서히 화석이 되어가는 뱀의 시신을 두고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의 원형이 된다. 이처럼 “산이라는 책”에서 고진하가 읽어내는 감각과 통찰은 너무도 섬세하여 우리에게 신선한 미적, 반성적 시선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남다른 신성 발견과 형상화 능력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진흙 가면(假面). 그걸 볼 수 있는 눈을/지니고 있다는 것”(〈월식〉)에 대한 오연(傲然)한 자각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기쁘다. 내가/읽을 새 경전(經典)은 바로 나”(〈범종소리〉)라는 새삼스런 자기 성찰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제 시인은 세계에 편재해 있는 신성들을 찾아 “이름 짓는 자가 아니던가?”(〈신성한 숲〉). 고진하는 그 점에서 사물에 신성을 덧입히며 명명하는 “이름 짓는” 시인이다. “미래의 불꽃만 간직한 채 숯으로 변한/순교자”(〈숯의 미사〉)로 ‘숯’을 비유하는 것이나 “성스러움의 성(聖) 자도 모르는 놈이지만/인간이 먹다 버린 뼈다귀조차/저렇게 성화(聖化)하고 있”(〈누렁이〉)는 미물에게서조차 신성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은 모두 이 시인의 그러한 일관된 ‘눈’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시인의 가장 독자적인 매력 중의 하나는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는 ‘신성’의 움직임과 힘이다. 그 대표적 형상을 그는 자신의 어머니 속에서 찾고 있다.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
팔순의 어머니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
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
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
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무슨 노여움도 없이
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이젠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
팔순 어머니의 총기(聰氣)!
-- 〈어머니의 총기〉 전문
“영혼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센 듯 싶은/팔순의 어머니는” 시인에게 “예수”이자 “밥”(〈밥〉)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속성(‘밥’)과 신성성(‘예수’)을 통합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어머니가 보이시는 “뜰의 잡풀을 뽑으시다가/마루의 먼지를 훔치시다가/손주와 함께 찬밥을 물에 말아 잡수시다가/먼산을 넋놓고 바라보시다가” 하는 일련의 행동적 연쇄는 사실 의미없는 반복적 습관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무슨 노여움도 없이/고만 죽어야지, 죽어야지/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은 그분의 살아계심의 확연한 증거이어서 “섭섭지 않”다. “치매에 걸린 세상”과는 달리 “마른 풀처럼 시들며 기어이 돌아갈 때를 기억하시는/팔순 어머니”야말로 참으로 “총기(聰氣)”로 가득한, 말하자면 신성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제3시집 《우주배꼽》에 나오는 〈어머니의 聖所〉와 견주어 읽을 만한 시편이다.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어머니는 오늘도/닦고 또 닦으신다/지상의 어느 성소인들/저보다 깨끗할까/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주름투성이 손을/항아리에 얹고/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어머니의 聖所〉)라는 표현에서 보듯, 시인에게 어머니의 장독대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즈므마을 1〉, 《우주배꼽》)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사라진(또는 은폐된) 신성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의 “주름투성이 손”의 놀림에서 찾는 것도 〈어머니의 총기〉와 유사한 안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의 오래된 습관적 노동을 신성의 발현으로 보고, 그 현장을 신성의 거소(居所)로 파악하는 이 시인의 눈은 생태적인 것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인생론의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하이데거(M. Heidegger)가 재차 인용한 횔덜린(Ho촥erlin)의 물음 곧 “신이 부재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회의에 대한 형이상적 응답의 가능성으로 읽힐 만한 것들이다. 이 시인이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내 목숨이 그곳의 나무들과/구름과 바위와 물소리에 이어져 있음을/섬뜩하니 깨닫곤 한다”(〈대관령 수도원〉)는 만물 상응(相應)의 고백이나, “그분의 밝은 눈/그분의 시퍼런 눈길”(〈예수〉)을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음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나, “고통은 저의 다정한 벗”(〈하늘빛 고요〉) 혹은 “경건에 이르는 고통”(〈대관령 수도원〉)이라는 구도자적 고백이야말로, 신성 발견과 그에 따르는 고통이 결국 우리가 감당해내면서 동시에 누려야 할 몫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눈에, 신성은 어디든 존재하고(은폐되어 있고), 그것은 눈 밝은 자의 ‘발견’을 통해서만 살아나고 발현되고 완성된다.
이처럼 고진하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일락)의 모습, 죽은 생명의 흔적(꽃뱀 화석), 사람(어머니)의 구체적 삶 속에서 흩어져 있는 신성을 고루고루 채집하고 묶고 육화시킨다. 시인은 이미 첫 시집에서부터, 폐허가 된 농촌 풍경에서조차 충만한 신성을 노래한 바 있다. 그러한 역설적 투시(透視)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바로 그 신으로부터 일정한 소명을 부여받은 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을 일정한 교의나 의식(儀式)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신성한 뭇 존재들로 그 시각과 관심을 점점 확대하려 하고 있고, 그 범주는 이제 모든 피조물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고진하 시인은 “돌아서면/이윽고 내 순한 욕망은 접히고/맑고 깊은 시심(詩心)이 불러주는 고마운 말씀들을/영혼의 수첩에 적”(〈이렇게 깊습니다〉)는 이른바 신성의 ‘대언자(代言者)’로서의 매개적 직능을 감당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3.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러나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왔던, 새로운 ‘신성’들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고귀한 영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끔 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고진하만의 독자성이 있다. 산불이 나서 까맣게 타들어간 산을 보고 쓴 〈소나무들을 추모함 1·2〉 같은 ‘자연’에의 조시(弔詩)에서조차 그는 섣부른 환경론적 담론을 제출하지 않고, “푸른 수도승들의 다비식”이라는 비유를 통해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무슨 경전이라곤 씌어진 적이 없는 곳,/죄도 은총도 서식할 수 없는 곳,/신의 지문(指紋)이라면/얼음계곡에 묻힌 물고기의 뼈다귀들뿐”(〈얼음수도원 2〉)인 ‘얼음수도원’을 상상적으로 구축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그는 “이름 지을 수 없는, 그윽한”(〈신성한 숲〉) 것들과 “저 바다에 떠 있는 하늘빛 고요”(〈하늘빛 고요〉)로 충만한 이 세상을 따뜻하게 긍정하고 그것들과 화해하려는 의지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발견과 긍정과 화해, 이는 고진하 시에 가득한 동사(動詞)들이다.
이 모두가 “책, ‘황혼의 지식’에 집착하지 말라는”(〈단상〉, 《문학사상》 2001. 3.) 신의 음성을 옮겨 적는 시인의 태도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마음의 눈과 귀가 늘 깨어 있는 (목사)시인의 고요하면서도 힘이 있는 삶의 노래들”에서 청정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고 있는 이해인(李海仁) 수녀의 말에 수긍이 안 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구체적인 결실이 바로 《얼음수도원》이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 지은 책으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