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우 근 추천: 13, 조회: 6484, 줄수: 130, 2000/07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이민수기
성 명 : 김 우 근
이 민 수 기 공 모
이른 새벽 한국의 대학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그 친구는 이 민을 고려하고 있었다. IMF의 영향으로 휴일도 없이 하루 열두시간 이상 일하고 있으며, 월급도 50퍼센트나 삭감 되었다고 전하 였다. 그 친구는 먼저 이민 온 나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시간은 새벽 6시 30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하 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토론토의 동쪽 끝에 위치한 직장에 닿은 시간은 7시 25분. 내 데스크에서 일을 시작한 시간은 정확히 7시 30분. 이제 10분 후면 캐롤이 빨간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들를 것이다. 어느새 일과가 되어버린 그녀와의 아침 만남은 늘 하루를 밝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커피를 사기위해 카페테리아로 가는 동안 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 단을 이용한다. 운동의 의미도 있겠지만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주로 일과후에 있었던 일이나 개인의 신상 에 관한 일들을 주고받고, 영어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내 개인 영어교수라고 자청하는 그녀는 아는 범위내에서 성 의껏 답변해 준다.
그녀를 상대로 방금 배운 표현을 연습하는 동안 카페에 도착한다. 커피를 들고 데스크에 돌아와 일을 시작 하기 전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과이다. 12시의 점심시간까지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휴식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한다. 일을 하다보면 쉬는 것을 잊어버랠 때도 있다.
Year 2000 project에 매달려 있던 내게 새로 맡겨진 일은 BESS 9.8 Release implementation. 주니어 프로그래머로써 시니어인 로렌스와 같이 팀을 이뤄 일을 하 게 되었다. 성격이 유순한 차이니즈인 로렌스는 17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오즘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배가 슬슬 고파오기 시작해서 시계를 보면 언제나 11시 40분쯤. 모처럼 기지개를 펴며 간단한 운동을 시작한다. 말수가 없고 조용한 옆자리의 로렌스가 빙그레 웃으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나를 쳐다본다. 그런 그에게 몇마디 농담을 던지거나 기겁하 는 그에게 맛사지를 해 주겠다고 장난을 치는 동안 점심시간이 된다.
밤늦게 돌아와서도 꼭 점심을 싸놓고 잠드는 아내 덕분에 나는 으스대며 도시락통을 풀을 수 있다. 점심 멤버인 캐롤과 피터, 죠 그리고 실비아가 다 모일 때 까지는 약 5분정도 시간이 걸린다. 혼자사는 죠의 점심은 늘 똑같은 샌드위치, 채식주의자인 캐롤도 샌드위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먹는 것이 낙 인 피터의 점심은 푸짐하다. 나 못지 않게 정성이 가득 담긴 점심을 가져오는 피터에겐 아주 부지런한 유러피안 아내가 있다. 한동안 점심을 싸오던 실비아가 오늘부터 카페에서 사 먹겠다고 선언한 뒤 가버렸다. 대수럽지 않은 일에도 소리지르기 일쑤이 고 항상 툴툴대는 중년의 독신주의자 실비아는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상대이다.
늘 기분이 변하는 타입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 부서에서 핵심인물 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두 그 녀가 은퇴하는 날만을 기다린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나의 숙제일 것이다.
열띤 토론과 함께 식사를 끝낸 우리는 직장 주변의 주택가를 약 30분동안 산책하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오늘의 주제는 모니카 루윈스키와 클 린턴 대통령. 나를 제외한 이들 모두가 클린텬에게는 호감을, 특별검사에게는 적의를 드러낸다. 반론을 펴는 나는 짧은 영어 때문에 의도한 바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영어공부로는 최고의 기회이다. 늘 주제가 바뀌는 점심토론으로 내 영어는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점심식사후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1시 10분 정도. 오후의 일과는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한 덕분에 별로 길지 않다. 데스크를 떠나는 시간은 일정하다. 3시 50분. 4시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퇴근하기 전에 끝내 야 하는 전화통화 때문에 약간 긴장 되어 있다.
오전부터 꺼려지던 전화로 그 때문에 점심시간도 별로 즐겁지 않았었다. 용기 를 내서 뉴욕 오피스로 전화를 한다. 이민생활이 3년째 접어들지만 여전히 영어로 전화하는 일은 긴장을 요한다. 특히 이번처 럼 액센트가 강한 사람과 잡음까지 끼어드는 전화로 경력도 많지 않은 내가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통화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수화기를 넘기고 싶은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도와주지도 않으며, 나 자신 도움을 요청하지 도 않는다. 내가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다. 영어라는 벽, 간신히 통화를 끝내고 나니 등과 겨드랑이가 식 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로렌스에게 통화결과를 보고하고 데스크를 떠난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퇴근할 수 있는 이곳의 직장 문화는 합리적이다.
9시부터 5시 반까지 일하는 로렌스는 내 의자에 다음날 아침 내가 해야 할 일을 남겨놓고 퇴근 할 것이다. 보통 퇴근후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운타운에 있는 ESL 스쿨에 들려 5시부터 8시 반까지 영어 공부를 하지만 지금은 방학중이다. 집에 닿으면 5시. 출근길의 버스에서는 책읽는 일에 집중하고, 퇴근길의 버스에서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리스닝 훈련을 한다.
대개는 뉴스를 들으며 졸게 되지만, 저녁에 출근하는 아내가 섬머 ESL 스쿨에 다녀와서 차 려놓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면 7시가 된다. 지난 여름내내 매일 롤러 블레이드를 한시간씩 타는 바람에 피부가 까 맣게 탔지만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스케이팅으로 땀을 빼고 콘도 지하의 운동실에서 근육운동과 샤워까지 마 치고 나면 대개 9시 전후. 그때부터 집사람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텔레비젼 시청이나 영어공부, 독서등을 하지만, 오늘은 아침에 통화한 후배에게 이민에 관한 편지를 보내기로 작정 하였다. 어느새 기억은 이곳에 닿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밤중에 떨어진 토론토의 피어슨 공항은 약간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감상에 잠길 틈 도 없이, 우리는 두사람에게 벅찬 이민 보따리 여섯 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빨간 나일론 줄로 묶어주신 덕분에 이민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신접살림은 전세를 끝내며 모두 이웃에게 팔거나 나눠준 덕분에 가져온 짐은 별로 없었지만 카트없이 옮기긴 불가능 하였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카트대신 포터들이 다가와 20달러를 외친다. 짐을 차타 는 데까지 옮기는 값이 20불. 환율 600원으로 계산하고 12,000원. 너무 비싸다! 20분을 헤맨 끝에 겨우 카트 하나를 구하였다 . 한 번도 와본적이 없는 이곳 토론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의 첫 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6년 3월 30일 이곳에 닿은 후 같은해 8월까지 우리 부부에게는 한푼의 수입도 없었다. 약 반년 동안을 센트단위까지 수첩 에 적으며 절약하고 살았지만 매달 지출하는 돈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과 비교해 차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차가 없는 우리는 웬 만한 거리는 걸어다녔다.
한국신문의 구인란을 보면 당장 돈을 벌 일들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만났던 오스틴의 충고를 되새기며 영어실력을 늘리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차이니즈 캐내디언인 오스틴은 내가 근무하던 컴퓨터 회사에 출장차 들렸던 참에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직장 경력 2년의 신출내기로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던 나는 마침 이민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떠듬거리 는 나의 영어로 캐나다의 인력시장 특히 프로그래머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는 나에게 그는 정색을 하며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첫째 냉정히 말해서 내 영어실력으로는 캐나다에서 영어로 일하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과 처음에 시작하는 직업 이 평생을 가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캐내디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진 영어공부에 전념하 라는 것이었다. 이후 캐내디언들과 영어로 일하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현실은 만 만치 않았다. 잡 에이전시를 통해 가까스로 두 번의 인터뷰 기회를 얻었지만 한번은 아예 인터뷰 전에 취소되었고, 한번은 경력 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다. 내가 만든 이력서가 불충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금 100불을 들여 이력 서를 만들어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만난 이민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 던 나를 한동안 절망하게 만들었다. 말의 요지는 나보다 갑절이나 잘난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육체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 는데 괜한 헛수고 하지말고 아무 직장이나 찾아 보라는 것이었다. 이민생활의 첫걸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굉장히 중요하 다.
비관주의로 일관하는 냉소적인 사람을 만날 경우 이민 신참내기는 그 사람의 절망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패배주의로 좌절하던 나를 지켜보던 아내는 아무말 없이 한국식당의 웨이트레스 일을 시작하였다. 아침 10시부터 밤 12시 까지 일을 하며 아내는 결코 적지않은 돈을 벌어왔고, 그녀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행동으로 나약한 나를 꾸짖었다.
1996년 9월 20일, 새로 오픈하는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로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외모 덕분에 손님의 대부분이 십대 후반이거나 이십대 초반인 그곳의 웨이터로 뽑힐 수 있었다. 열살은 어린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 어야 했지만 나름대로 최고의 웨이터가 되기로 작정 하였다.
주인은 이탈리아계 캐내디언으로 토론토에 약 대여섯군데의 레스토 랑이나 바를 소유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세명으로 이탈리아계, 한국계, 중국계 등 이었다. 손님이나 직원들과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았다. 영어실력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클럽이 철저히 캐내디언식으로 운영 되었으므로 캐나다의 문화 를 접할 기회도 되었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밤에만 일할 수 있었으므로 낮 동안에는 학교와 프로그래머 일자리 찾기를 병행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귀중한 일자리였다. 그곳에서 나는 서비스의 귀중함과 그 대가에 대해서 배웠다. 대체로 한국계 손님 들은 팁의 의미와 귀중함을 모른다. 물론 한국에는 팁이라는 제도가 없어서이겠지만 이곳에서 나서 자란 이민 2세들도 팁에는 여간 인색한 것이 아니었다.
뜨내기 손님이 아닐 경우 팁에 인색하다면 단골이라도 훌륭한 서비스를 받기는 힘든 것이다. 우리 부부는 둘다 팁을 받아 생활해 본 경험 때문인지 팁을 넉넉하게 주지못할 경우에는 아예 팁을 주는 레스토랑에는 가지 않는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웨이터일을 도와주던 버스보이들이 인색한 코리안이라고 한국 손님들을 헐뜯 을 때 였다. 그런때면 팁을 못받아 손해를 보는 당사자는 나였지만 마치 내가 그 손님이라도 된 듯 낯이 뜨거워졌다.
이민생활 을 하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접촉하기를 꺼리는 민족이 한민족이라면 그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나는 그 사실을 종업원들이 한국계 매니저로부터 받아야 할 임금을 떼인 순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민 1.5세였던 그 친구는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기 이 전에 이미 그만 두었지만, 내게 불신이라는 나쁜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많은 한인업주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주지 않 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를 이 캐나다에서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하는 것은 바보들이라는 생각도 한인 사이에서는 상식이다. 하지만 자기가 받은 팁까지 인컴보고를 하는 캐내디언 웨이터를 비웃어야 하는가. 이 땅에 사는 한 그 것은 한인으로써 나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웨이터 생활이 몸에 익어가던 96년의 겨울, 주말밤이면 콘도와 나이트 클럽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다녔었다. 눈이 내린 밤엔 걷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동안 우리는 토큰 두 개와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저축을 했고, 전세돈을 포 함해서 약간의 돈을 이곳에 가져올 수 있었다.
매달 내야하는 아파트 월세 액수에 놀랐던 우리는 도착한지 한달 만에 몰기지를 얻어 이곳 노스욕에 1베드룸 콘도를 장만할 수 있었다. 얼마남지 않은 돈은 미래를 위해 뮤추얼 펀드에 넣어두고 나니 자동차를 구입할 여유는 없었다. 서울에서 멋모르고 자동차를 구입했다가 주차비며, 기름값, 세금, 할부금, 벌금 때문에 6개월 만에 처 분한 경험이 있었던 우리는 이민 처음부터 대중교통 수단이 잘 되어있으며, 가장 일자리가 많은 토론토를 대상지로 삼았었고, 콘 도로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선택하였다.
집에 들어가는 돈은 전기세를 포함해서 아파트 월세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곳은 광 역 토론토와 그 주변지역의 정 중앙에 해당하는 곳으로 어느 곳에 직장이 있든지 거의 일정한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지역으로 투자가치 또한 있었다. 이 콘도에는 평일 낮이면 캐빈이라는 차이니즈 캐내디언이, 주말 밤이면 나산이라는 아프리카 캐내디언이 시큐리티 가드로 근무하고 있었다. 캐빈이 무례한 행동으로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반 면 나산은 친절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모두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나산의 근무시간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 자정부터 다음날 정 오까지였다. 내가 대개 주말밤 콘도에 새벽 4시쯤 도착하면 나산은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졸음을 이기고 비즈니스 플랜을 짜 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출신인 그기 캐나다에 정착한 거슨 10여년 전. 이민후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는 반면 주말밤 에는 콘도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한 번 사기를 당해 비즈니스 자금을 모두 날린 후에도 두가지 일을 병행하며 열심히 돈을 모 아 미시사가에 동업자들과 생수공장을 막 시작한 그는 근면한 사업가 이기도 하였다. 군대에서 얻은 척추염으로 오랜시간 서있 는 경우 상당한 피로감과 고통을 느끼던 나는 일이 끝난 후 바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런 밤에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 작하였다. 그의 나라에서 화학자였던 나산은 굉장한 지성인 이었다. 점차 시간이 가며 우리의 대화는 주제에 제한없이 모든 영 역으로 넓혀져 갔다. 하루는 추수 감사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던중 칠면조 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맞는 토론토의 길고 추운 겨울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 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누군가 현관문을 누크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문을 연 나는 활짝 웃으며 훈제 칠면조를 한 마리 들고있는 나산을 발견하였다.
내 말을 잊지않고 칠면조를 선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더구나 그 날은 그의 근무일 도 아니었다. 놀란 나는 값을 치르려 지갑을 찾았지만 그의 손을 내저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돌아섰다. 그 칠면조는 그 다음해에도 계속 되었으며, 아마 올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내가 웨이터로 일하며 아무리 나이 어린 손님에게 F로 시작되는 상소리를 들어도 그 겨울 꿎꿎히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나산이 내게 건네준 그 칠면조에 있었을 것이다. 살만한 곳이라는 믿음 과 함께.
1997년 4월 14일, 토론토의 한국계 은행에 프로그래머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간 웨이터로 일하며, 여행사 가이드, 컴 퓨터 교사등을 병행하던 나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면 그간 익혔던 프로그래밍 지식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초조함에 꼭 캐내디언 직장만을 고집할 순 없었다.
프로그래머를 뽑는다는 신문광고를 접하고 응모한 결과 면접을 거쳐, 출근 통보를 받았다. 처음 목표와는 달랐지만 한국에서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께 취직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인사부장은 프로그래머 는 은행업무에 대한 지식이 필수이기 때문에 약 2개월 정도 텔러일을 하며 은행업무를 익힐 것을 명하였다.
납득할 만한 조치였 다. 실무를 모르는 프로그래머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점으로 발령받은 나는 또 한명의 신입 여행원과 함께 그 곳으로 향하였다. 마치 훈련에 임하는 군인처럼 각오가 새로웠다. 어깨너머로 텔러의 일을 배우고 손로 기입한 매뉴얼을 건네 받은 후 출근 이틀만에 우리 두명은 시재통을 받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다행히 기존 행원들이 친절히 대해주기는 하였지만, 실 수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결국 같이 일을 시작하였던 여행원은 한달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행원의 실수로 인한 사직 이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일처리는 나를 더욱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처음의 긴장은 차츰 사라져 갔고, 어느 정도 텔러일에 적응해가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주말밤의 웨이터 일은 계속되었다.
결국 손님감소로 나이트클럽이 5월에 문을 닫을 때 까지 나는 주중에는 텔러, 주말밤에는 웨이터였다. 두 직업 모두 고객과 바로 접촉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었기 때문에 언제나 친절함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웨이터들이 새로 오고 금방 그만 두었지만, 나는 어느새 웨이터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았을때는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텔러일에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있던 무렵 회계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지점내 부서이동 이었다. 전임자가 본점으로 발령을 받아 공석이 된 자리였다. 회계부서의 일은 그 전날 처리된 모든 전표를 결산하는 일이었다. 컴퓨터상의 합계와 전표의 합계를 대조하여 실수를 찾아내고, 결산과 함께 전표를 철하는 작업이었다.
9시부터 3시까지는 전날 전표의 결산, 그 이후에는 하루동 안 받은 체크를 합계내서 캐내디언 뱅크로 돌리고 그날 텔러의 업무를 마감하여야 했다. 텔러들은 회계부서에서 하루 업무가 완 전히 종결되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처리가 더디면 여러사람의 발을 잡아놓는 결과가 되 었다. 신참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자리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회계부서로 가서 일을 배우고 시작해야 할 내가 2주동안 오전근무는 텔러로, 오후근무는 회계부서원으로 일하도록 결정된데 있었다. 그것은 새직원이 올때까지 사람을 뺏기게 된 예금부서의 업무를 덜어주고자 하는 생각이었지만 회계부서원으로써의 내 업무는 그날그날 처리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었다.
회계업무의 자체감사를 하던 동료행원은 친절한 성격으로 나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본 업무가 서무인지라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전임자가 휴가후 발령을 받은 때문에 휴가기간 열흘 동안의 일이 고스란히 밀려 있었다. 그일의 대부 분은 옆자리의 동료직원이 처리해 주었지만 심적부담은 보통이 아니었다. 처리되지 않은 전표더미가 결국 20여개 가까이 되어 있을 때 비로서 회계부서의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 첫날 나는 내 실력으로는 하루의 전표를 하루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하였다. 이 업무의 기본일은 전표의 합계와 컴퓨터에 입력한 데이터의 합 계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전표를 일일이 계산기로 두드려 더해보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더 구나 그 와중에 전표상의 실수 또한 찾아내어 정정하도록 하여야 했다.
첫날 깨달은 사실에서의 해결책은 두가지, 한가지는 계 산기를 보지않고 전표만 보면서 귀신같이 계산기를 두드리도록 연습하는 일이었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거시었다. 하지만 당 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의 시큐어리티상 은행내에 혼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은행에 남아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며칠후 허가가 내려졌고, 이후 나는 전표와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 지점은 손님이 많은 곳으로 연 휴 전날이나 다음날 같은 경우에는 전표가 천장을 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텔러도 죽을 맛이었지만 어쨋거나 전표를 처리해야 하는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의 일을 하루에 처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전표는 계속 쌓여갔고, 가까스로 업 무시간내에 하루량을 처리하게 되었어도 쌓인 전표의 개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아침 7시 어떤 날은 아침 6시에 출근 하여 저녁 10시, 11시까지 남아 일을 처리하였다. 파트타이머였던 내가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을 밀리게 놔둘 수 없었 던 내 성격때문 이기도 하였지만, 어쨋든 내게는 소중한 직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업의 고통을 충분히 절감한 나로써는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비록 시간외 수당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언젠가는 프로그래머로 일할 그날을 기약하며 업무를 열심히 익힌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삼개월, 결국 밀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었고, 일찍 처리 한 날은 마감업무에 들어갈 때 까지 어느정도 여유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캐나다로 이민온 프로그래머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지금은 친한 친구가 된 젊은 여성을 만나 게 되었다. 그 만남은 나에게는 충격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일종의 이유가 되어 은행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이탤리어를 전공하고 컴퓨터와는 관계가 없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이곳에 와서 사설 컴퓨터 학원을 다니후 캐내디언 직장에 프로 그래머로 다니고 있었다. 300여통의 이력서와 전화를 통해서, 4번의 인터뷰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기어이 취직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과연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한일은 무엇이었던가. 경력이 전무한 사람 도 일자리를 잡는데, 대학에서 전산을 전공하고 직장경력도 있는 내가 2년의 경력이 짧아서 일자리 잡기가 어렵다는 자기 합리화 와 내가 익힌 전산기술이 범용적이 아니라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었다니!
그 자괴감은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였다. 6개월째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거리가 먼 부서에서 허송세월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아본 결과로는 컴퓨터 부서의 정수가 두명에 불과하였고, 그 수도 다 찼으며, 진정한 프로그래머로써의 일도 아니었다. 직장에 최선을 다했던 자신에 대해서 어리석 음을 느낌과 동시에 실망과 허탈함으로 며칠을 고민하여야 했다.
1997년 10월, 마침내 사직서를 내고 은행을 나오게 되었다. 아내의 따뜻한 격려가 이번에도 힘이 되어 주었다. 아내는 건강 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웨이트레스 일을 계속하며 집안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후 두달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스코샤 뱅크에 주니어 프로그래머로 취 직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8일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긴장과 기쁨이 뒤섞여 나의 데스크에 앉던 그 순간을. 이후 9개월, 나는 잘 적응해 나가고 있으며, 새로운 직장으로의 제의를 받고 행복한 고민에 젖어있다.
아마 후배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될 것 같다. 이민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어찌보면 또 다른 문제의 시 작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리 잘못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캐나다는 원칙대로 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한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으며, 자녀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는데 장애가 없는 땅. 한국에서 삼십년을 산 나에게 한국은 잊을 수 없는 모국이지만, 불과 3년째 살고 있는 캐나다 또한 나의 조국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포용을 배웠고, 관대와 인간애를 접하였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과 어울려 우리 2세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 들어 보고 싶다. 경제적인 면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 으로써의 역할도 한 번쯤 생각해 본다면 이 곳에서의 삶이 그리 각박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코리언 캐내디언으로 이곳에 잠들고 싶다. 끝.
김성국
김성국 (momo64@hananet.net) 조회: 992, 줄수: 13, 분류: Etc.
용기와 희망의 말씀들 감사합니다.
정말 인간승리를 본 느낌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글을 읽고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을거 같군요.
우근씨 같은 한국사람이 아직은 많은가 봐요.
그래서 한국의 미래는 아직 밝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이런저런 삶의 파도가 다가와도 잘 이겨나가세요.
멋진 아니 이미 멋진 삶의 경험이 부럽네요.
저도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족들 모두 행복하시길 바래요.
올해 크리스마스고 따뜻한 이웃이 있어 어떤 칠면조 요리라도
맛이 그만일거 같네요.
그럼 계속 건투하시길 제가 믿는 신께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003-04-17
del
너무나잘
너무나잘 (bluemin2@freechal.com) 수정: 1, 조회: 1319, 줄수: 16, 분류: Etc. 안녕하십니까?
이 글을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하구요... 대단하시네요....
저는 막연하게 캐나다의 이민을 결심하고 있는 백일된 딸아이의 엄마입니다.
직장에도 다니고있구요...나이는 한국나이로 29이지요...
6년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bc카드회사에서 OracleDB 관리도 해보았구요...
지금 oracle에 vb를 연동해서 병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병원실장을 맡아보고 있지요...
저녁에는 웹쪽의 공부를 하고 있고 아침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있지요....
한 3~5년후에 캐나다이민을 갈까합니다. 아이를 위해서요....
여쭤보고싶은 것이 있네요...
그곳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려면은
어떤 전산기술을 가지고 있어야좋을할까요....
프로그래머로서의 캐나다생활과 직장을 얻는것이 궁금합니다. 2003-04-17
del
richard
작성자 : Richard Jung (rootjung@samsung.co.kr) 조회: 853, 줄수: 21, 분류: Etc.
Re: 나야, 형!
형, 저 기억하세요?
Richard Jung 입니다.
정말 반갑습네다.
여의도에서 같이 근무했었죠.
건강하시죠? (물론 형수님도...)
2000년 6월에 Toronto에
집사람하고 갔다왔어요.
(가기전에 형 찾는다고
여러 사이트에 Wanted 올렸었는데...)
하고픈 말은 많지만
사적인 것이므로
일단 저에게 reply 주세요.
--형과의 추억이 새록새록한 머슴아가... 2003-04-17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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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이민수기
성 명 : 김 우 근
이 민 수 기 공 모
이른 새벽 한국의 대학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그 친구는 이 민을 고려하고 있었다. IMF의 영향으로 휴일도 없이 하루 열두시간 이상 일하고 있으며, 월급도 50퍼센트나 삭감 되었다고 전하 였다. 그 친구는 먼저 이민 온 나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시간은 새벽 6시 30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하 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토론토의 동쪽 끝에 위치한 직장에 닿은 시간은 7시 25분. 내 데스크에서 일을 시작한 시간은 정확히 7시 30분. 이제 10분 후면 캐롤이 빨간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들를 것이다. 어느새 일과가 되어버린 그녀와의 아침 만남은 늘 하루를 밝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커피를 사기위해 카페테리아로 가는 동안 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 단을 이용한다. 운동의 의미도 있겠지만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주로 일과후에 있었던 일이나 개인의 신상 에 관한 일들을 주고받고, 영어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 내 개인 영어교수라고 자청하는 그녀는 아는 범위내에서 성 의껏 답변해 준다.
그녀를 상대로 방금 배운 표현을 연습하는 동안 카페에 도착한다. 커피를 들고 데스크에 돌아와 일을 시작 하기 전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과이다. 12시의 점심시간까지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휴식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한다. 일을 하다보면 쉬는 것을 잊어버랠 때도 있다.
Year 2000 project에 매달려 있던 내게 새로 맡겨진 일은 BESS 9.8 Release implementation. 주니어 프로그래머로써 시니어인 로렌스와 같이 팀을 이뤄 일을 하 게 되었다. 성격이 유순한 차이니즈인 로렌스는 17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오즘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배가 슬슬 고파오기 시작해서 시계를 보면 언제나 11시 40분쯤. 모처럼 기지개를 펴며 간단한 운동을 시작한다. 말수가 없고 조용한 옆자리의 로렌스가 빙그레 웃으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나를 쳐다본다. 그런 그에게 몇마디 농담을 던지거나 기겁하 는 그에게 맛사지를 해 주겠다고 장난을 치는 동안 점심시간이 된다.
밤늦게 돌아와서도 꼭 점심을 싸놓고 잠드는 아내 덕분에 나는 으스대며 도시락통을 풀을 수 있다. 점심 멤버인 캐롤과 피터, 죠 그리고 실비아가 다 모일 때 까지는 약 5분정도 시간이 걸린다. 혼자사는 죠의 점심은 늘 똑같은 샌드위치, 채식주의자인 캐롤도 샌드위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먹는 것이 낙 인 피터의 점심은 푸짐하다. 나 못지 않게 정성이 가득 담긴 점심을 가져오는 피터에겐 아주 부지런한 유러피안 아내가 있다. 한동안 점심을 싸오던 실비아가 오늘부터 카페에서 사 먹겠다고 선언한 뒤 가버렸다. 대수럽지 않은 일에도 소리지르기 일쑤이 고 항상 툴툴대는 중년의 독신주의자 실비아는 가까이 하기가 어려운 상대이다.
늘 기분이 변하는 타입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 부서에서 핵심인물 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두 그 녀가 은퇴하는 날만을 기다린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나의 숙제일 것이다.
열띤 토론과 함께 식사를 끝낸 우리는 직장 주변의 주택가를 약 30분동안 산책하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오늘의 주제는 모니카 루윈스키와 클 린턴 대통령. 나를 제외한 이들 모두가 클린텬에게는 호감을, 특별검사에게는 적의를 드러낸다. 반론을 펴는 나는 짧은 영어 때문에 의도한 바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영어공부로는 최고의 기회이다. 늘 주제가 바뀌는 점심토론으로 내 영어는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점심식사후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1시 10분 정도. 오후의 일과는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한 덕분에 별로 길지 않다. 데스크를 떠나는 시간은 일정하다. 3시 50분. 4시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퇴근하기 전에 끝내 야 하는 전화통화 때문에 약간 긴장 되어 있다.
오전부터 꺼려지던 전화로 그 때문에 점심시간도 별로 즐겁지 않았었다. 용기 를 내서 뉴욕 오피스로 전화를 한다. 이민생활이 3년째 접어들지만 여전히 영어로 전화하는 일은 긴장을 요한다. 특히 이번처 럼 액센트가 강한 사람과 잡음까지 끼어드는 전화로 경력도 많지 않은 내가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통화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수화기를 넘기고 싶은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도와주지도 않으며, 나 자신 도움을 요청하지 도 않는다. 내가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다. 영어라는 벽, 간신히 통화를 끝내고 나니 등과 겨드랑이가 식 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로렌스에게 통화결과를 보고하고 데스크를 떠난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퇴근할 수 있는 이곳의 직장 문화는 합리적이다.
9시부터 5시 반까지 일하는 로렌스는 내 의자에 다음날 아침 내가 해야 할 일을 남겨놓고 퇴근 할 것이다. 보통 퇴근후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운타운에 있는 ESL 스쿨에 들려 5시부터 8시 반까지 영어 공부를 하지만 지금은 방학중이다. 집에 닿으면 5시. 출근길의 버스에서는 책읽는 일에 집중하고, 퇴근길의 버스에서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리스닝 훈련을 한다.
대개는 뉴스를 들으며 졸게 되지만, 저녁에 출근하는 아내가 섬머 ESL 스쿨에 다녀와서 차 려놓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면 7시가 된다. 지난 여름내내 매일 롤러 블레이드를 한시간씩 타는 바람에 피부가 까 맣게 탔지만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스케이팅으로 땀을 빼고 콘도 지하의 운동실에서 근육운동과 샤워까지 마 치고 나면 대개 9시 전후. 그때부터 집사람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텔레비젼 시청이나 영어공부, 독서등을 하지만, 오늘은 아침에 통화한 후배에게 이민에 관한 편지를 보내기로 작정 하였다. 어느새 기억은 이곳에 닿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밤중에 떨어진 토론토의 피어슨 공항은 약간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감상에 잠길 틈 도 없이, 우리는 두사람에게 벅찬 이민 보따리 여섯 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빨간 나일론 줄로 묶어주신 덕분에 이민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신접살림은 전세를 끝내며 모두 이웃에게 팔거나 나눠준 덕분에 가져온 짐은 별로 없었지만 카트없이 옮기긴 불가능 하였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카트대신 포터들이 다가와 20달러를 외친다. 짐을 차타 는 데까지 옮기는 값이 20불. 환율 600원으로 계산하고 12,000원. 너무 비싸다! 20분을 헤맨 끝에 겨우 카트 하나를 구하였다 . 한 번도 와본적이 없는 이곳 토론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의 첫 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6년 3월 30일 이곳에 닿은 후 같은해 8월까지 우리 부부에게는 한푼의 수입도 없었다. 약 반년 동안을 센트단위까지 수첩 에 적으며 절약하고 살았지만 매달 지출하는 돈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과 비교해 차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차가 없는 우리는 웬 만한 거리는 걸어다녔다.
한국신문의 구인란을 보면 당장 돈을 벌 일들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만났던 오스틴의 충고를 되새기며 영어실력을 늘리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차이니즈 캐내디언인 오스틴은 내가 근무하던 컴퓨터 회사에 출장차 들렸던 참에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직장 경력 2년의 신출내기로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던 나는 마침 이민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떠듬거리 는 나의 영어로 캐나다의 인력시장 특히 프로그래머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는 나에게 그는 정색을 하며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첫째 냉정히 말해서 내 영어실력으로는 캐나다에서 영어로 일하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과 처음에 시작하는 직업 이 평생을 가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캐내디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진 영어공부에 전념하 라는 것이었다. 이후 캐내디언들과 영어로 일하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현실은 만 만치 않았다. 잡 에이전시를 통해 가까스로 두 번의 인터뷰 기회를 얻었지만 한번은 아예 인터뷰 전에 취소되었고, 한번은 경력 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다. 내가 만든 이력서가 불충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금 100불을 들여 이력 서를 만들어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만난 이민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 던 나를 한동안 절망하게 만들었다. 말의 요지는 나보다 갑절이나 잘난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육체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 는데 괜한 헛수고 하지말고 아무 직장이나 찾아 보라는 것이었다. 이민생활의 첫걸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굉장히 중요하 다.
비관주의로 일관하는 냉소적인 사람을 만날 경우 이민 신참내기는 그 사람의 절망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패배주의로 좌절하던 나를 지켜보던 아내는 아무말 없이 한국식당의 웨이트레스 일을 시작하였다. 아침 10시부터 밤 12시 까지 일을 하며 아내는 결코 적지않은 돈을 벌어왔고, 그녀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행동으로 나약한 나를 꾸짖었다.
1996년 9월 20일, 새로 오픈하는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로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외모 덕분에 손님의 대부분이 십대 후반이거나 이십대 초반인 그곳의 웨이터로 뽑힐 수 있었다. 열살은 어린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 어야 했지만 나름대로 최고의 웨이터가 되기로 작정 하였다.
주인은 이탈리아계 캐내디언으로 토론토에 약 대여섯군데의 레스토 랑이나 바를 소유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세명으로 이탈리아계, 한국계, 중국계 등 이었다. 손님이나 직원들과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았다. 영어실력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클럽이 철저히 캐내디언식으로 운영 되었으므로 캐나다의 문화 를 접할 기회도 되었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밤에만 일할 수 있었으므로 낮 동안에는 학교와 프로그래머 일자리 찾기를 병행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귀중한 일자리였다. 그곳에서 나는 서비스의 귀중함과 그 대가에 대해서 배웠다. 대체로 한국계 손님 들은 팁의 의미와 귀중함을 모른다. 물론 한국에는 팁이라는 제도가 없어서이겠지만 이곳에서 나서 자란 이민 2세들도 팁에는 여간 인색한 것이 아니었다.
뜨내기 손님이 아닐 경우 팁에 인색하다면 단골이라도 훌륭한 서비스를 받기는 힘든 것이다. 우리 부부는 둘다 팁을 받아 생활해 본 경험 때문인지 팁을 넉넉하게 주지못할 경우에는 아예 팁을 주는 레스토랑에는 가지 않는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웨이터일을 도와주던 버스보이들이 인색한 코리안이라고 한국 손님들을 헐뜯 을 때 였다. 그런때면 팁을 못받아 손해를 보는 당사자는 나였지만 마치 내가 그 손님이라도 된 듯 낯이 뜨거워졌다.
이민생활 을 하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접촉하기를 꺼리는 민족이 한민족이라면 그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나는 그 사실을 종업원들이 한국계 매니저로부터 받아야 할 임금을 떼인 순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민 1.5세였던 그 친구는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기 이 전에 이미 그만 두었지만, 내게 불신이라는 나쁜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많은 한인업주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주지 않 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를 이 캐나다에서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하는 것은 바보들이라는 생각도 한인 사이에서는 상식이다. 하지만 자기가 받은 팁까지 인컴보고를 하는 캐내디언 웨이터를 비웃어야 하는가. 이 땅에 사는 한 그 것은 한인으로써 나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웨이터 생활이 몸에 익어가던 96년의 겨울, 주말밤이면 콘도와 나이트 클럽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다녔었다. 눈이 내린 밤엔 걷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동안 우리는 토큰 두 개와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저축을 했고, 전세돈을 포 함해서 약간의 돈을 이곳에 가져올 수 있었다.
매달 내야하는 아파트 월세 액수에 놀랐던 우리는 도착한지 한달 만에 몰기지를 얻어 이곳 노스욕에 1베드룸 콘도를 장만할 수 있었다. 얼마남지 않은 돈은 미래를 위해 뮤추얼 펀드에 넣어두고 나니 자동차를 구입할 여유는 없었다. 서울에서 멋모르고 자동차를 구입했다가 주차비며, 기름값, 세금, 할부금, 벌금 때문에 6개월 만에 처 분한 경험이 있었던 우리는 이민 처음부터 대중교통 수단이 잘 되어있으며, 가장 일자리가 많은 토론토를 대상지로 삼았었고, 콘 도로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선택하였다.
집에 들어가는 돈은 전기세를 포함해서 아파트 월세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곳은 광 역 토론토와 그 주변지역의 정 중앙에 해당하는 곳으로 어느 곳에 직장이 있든지 거의 일정한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지역으로 투자가치 또한 있었다. 이 콘도에는 평일 낮이면 캐빈이라는 차이니즈 캐내디언이, 주말 밤이면 나산이라는 아프리카 캐내디언이 시큐리티 가드로 근무하고 있었다. 캐빈이 무례한 행동으로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반 면 나산은 친절하고 온화한 인품으로 모두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나산의 근무시간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 자정부터 다음날 정 오까지였다. 내가 대개 주말밤 콘도에 새벽 4시쯤 도착하면 나산은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졸음을 이기고 비즈니스 플랜을 짜 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출신인 그기 캐나다에 정착한 거슨 10여년 전. 이민후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는 반면 주말밤 에는 콘도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한 번 사기를 당해 비즈니스 자금을 모두 날린 후에도 두가지 일을 병행하며 열심히 돈을 모 아 미시사가에 동업자들과 생수공장을 막 시작한 그는 근면한 사업가 이기도 하였다. 군대에서 얻은 척추염으로 오랜시간 서있 는 경우 상당한 피로감과 고통을 느끼던 나는 일이 끝난 후 바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런 밤에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 작하였다. 그의 나라에서 화학자였던 나산은 굉장한 지성인 이었다. 점차 시간이 가며 우리의 대화는 주제에 제한없이 모든 영 역으로 넓혀져 갔다. 하루는 추수 감사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던중 칠면조 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맞는 토론토의 길고 추운 겨울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 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누군가 현관문을 누크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문을 연 나는 활짝 웃으며 훈제 칠면조를 한 마리 들고있는 나산을 발견하였다.
내 말을 잊지않고 칠면조를 선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더구나 그 날은 그의 근무일 도 아니었다. 놀란 나는 값을 치르려 지갑을 찾았지만 그의 손을 내저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돌아섰다. 그 칠면조는 그 다음해에도 계속 되었으며, 아마 올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내가 웨이터로 일하며 아무리 나이 어린 손님에게 F로 시작되는 상소리를 들어도 그 겨울 꿎꿎히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나산이 내게 건네준 그 칠면조에 있었을 것이다. 살만한 곳이라는 믿음 과 함께.
1997년 4월 14일, 토론토의 한국계 은행에 프로그래머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간 웨이터로 일하며, 여행사 가이드, 컴 퓨터 교사등을 병행하던 나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면 그간 익혔던 프로그래밍 지식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초조함에 꼭 캐내디언 직장만을 고집할 순 없었다.
프로그래머를 뽑는다는 신문광고를 접하고 응모한 결과 면접을 거쳐, 출근 통보를 받았다. 처음 목표와는 달랐지만 한국에서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께 취직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인사부장은 프로그래머 는 은행업무에 대한 지식이 필수이기 때문에 약 2개월 정도 텔러일을 하며 은행업무를 익힐 것을 명하였다.
납득할 만한 조치였 다. 실무를 모르는 프로그래머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점으로 발령받은 나는 또 한명의 신입 여행원과 함께 그 곳으로 향하였다. 마치 훈련에 임하는 군인처럼 각오가 새로웠다. 어깨너머로 텔러의 일을 배우고 손로 기입한 매뉴얼을 건네 받은 후 출근 이틀만에 우리 두명은 시재통을 받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다행히 기존 행원들이 친절히 대해주기는 하였지만, 실 수에 대한 두려움은 컸다.
결국 같이 일을 시작하였던 여행원은 한달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행원의 실수로 인한 사직 이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일처리는 나를 더욱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처음의 긴장은 차츰 사라져 갔고, 어느 정도 텔러일에 적응해가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주말밤의 웨이터 일은 계속되었다.
결국 손님감소로 나이트클럽이 5월에 문을 닫을 때 까지 나는 주중에는 텔러, 주말밤에는 웨이터였다. 두 직업 모두 고객과 바로 접촉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었기 때문에 언제나 친절함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웨이터들이 새로 오고 금방 그만 두었지만, 나는 어느새 웨이터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았을때는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텔러일에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있던 무렵 회계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지점내 부서이동 이었다. 전임자가 본점으로 발령을 받아 공석이 된 자리였다. 회계부서의 일은 그 전날 처리된 모든 전표를 결산하는 일이었다. 컴퓨터상의 합계와 전표의 합계를 대조하여 실수를 찾아내고, 결산과 함께 전표를 철하는 작업이었다.
9시부터 3시까지는 전날 전표의 결산, 그 이후에는 하루동 안 받은 체크를 합계내서 캐내디언 뱅크로 돌리고 그날 텔러의 업무를 마감하여야 했다. 텔러들은 회계부서에서 하루 업무가 완 전히 종결되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처리가 더디면 여러사람의 발을 잡아놓는 결과가 되 었다. 신참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자리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회계부서로 가서 일을 배우고 시작해야 할 내가 2주동안 오전근무는 텔러로, 오후근무는 회계부서원으로 일하도록 결정된데 있었다. 그것은 새직원이 올때까지 사람을 뺏기게 된 예금부서의 업무를 덜어주고자 하는 생각이었지만 회계부서원으로써의 내 업무는 그날그날 처리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었다.
회계업무의 자체감사를 하던 동료행원은 친절한 성격으로 나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본 업무가 서무인지라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전임자가 휴가후 발령을 받은 때문에 휴가기간 열흘 동안의 일이 고스란히 밀려 있었다. 그일의 대부 분은 옆자리의 동료직원이 처리해 주었지만 심적부담은 보통이 아니었다. 처리되지 않은 전표더미가 결국 20여개 가까이 되어 있을 때 비로서 회계부서의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 첫날 나는 내 실력으로는 하루의 전표를 하루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하였다. 이 업무의 기본일은 전표의 합계와 컴퓨터에 입력한 데이터의 합 계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전표를 일일이 계산기로 두드려 더해보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더 구나 그 와중에 전표상의 실수 또한 찾아내어 정정하도록 하여야 했다.
첫날 깨달은 사실에서의 해결책은 두가지, 한가지는 계 산기를 보지않고 전표만 보면서 귀신같이 계산기를 두드리도록 연습하는 일이었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거시었다. 하지만 당 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의 시큐어리티상 은행내에 혼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은행에 남아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며칠후 허가가 내려졌고, 이후 나는 전표와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 지점은 손님이 많은 곳으로 연 휴 전날이나 다음날 같은 경우에는 전표가 천장을 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텔러도 죽을 맛이었지만 어쨋거나 전표를 처리해야 하는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의 일을 하루에 처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전표는 계속 쌓여갔고, 가까스로 업 무시간내에 하루량을 처리하게 되었어도 쌓인 전표의 개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아침 7시 어떤 날은 아침 6시에 출근 하여 저녁 10시, 11시까지 남아 일을 처리하였다. 파트타이머였던 내가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을 밀리게 놔둘 수 없었 던 내 성격때문 이기도 하였지만, 어쨋든 내게는 소중한 직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업의 고통을 충분히 절감한 나로써는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비록 시간외 수당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언젠가는 프로그래머로 일할 그날을 기약하며 업무를 열심히 익힌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삼개월, 결국 밀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었고, 일찍 처리 한 날은 마감업무에 들어갈 때 까지 어느정도 여유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캐나다로 이민온 프로그래머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지금은 친한 친구가 된 젊은 여성을 만나 게 되었다. 그 만남은 나에게는 충격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일종의 이유가 되어 은행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이탤리어를 전공하고 컴퓨터와는 관계가 없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이곳에 와서 사설 컴퓨터 학원을 다니후 캐내디언 직장에 프로 그래머로 다니고 있었다. 300여통의 이력서와 전화를 통해서, 4번의 인터뷰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기어이 취직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과연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한일은 무엇이었던가. 경력이 전무한 사람 도 일자리를 잡는데, 대학에서 전산을 전공하고 직장경력도 있는 내가 2년의 경력이 짧아서 일자리 잡기가 어렵다는 자기 합리화 와 내가 익힌 전산기술이 범용적이 아니라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었다니!
그 자괴감은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였다. 6개월째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거리가 먼 부서에서 허송세월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알아본 결과로는 컴퓨터 부서의 정수가 두명에 불과하였고, 그 수도 다 찼으며, 진정한 프로그래머로써의 일도 아니었다. 직장에 최선을 다했던 자신에 대해서 어리석 음을 느낌과 동시에 실망과 허탈함으로 며칠을 고민하여야 했다.
1997년 10월, 마침내 사직서를 내고 은행을 나오게 되었다. 아내의 따뜻한 격려가 이번에도 힘이 되어 주었다. 아내는 건강 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웨이트레스 일을 계속하며 집안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후 두달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스코샤 뱅크에 주니어 프로그래머로 취 직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8일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긴장과 기쁨이 뒤섞여 나의 데스크에 앉던 그 순간을. 이후 9개월, 나는 잘 적응해 나가고 있으며, 새로운 직장으로의 제의를 받고 행복한 고민에 젖어있다.
아마 후배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될 것 같다. 이민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어찌보면 또 다른 문제의 시 작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리 잘못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캐나다는 원칙대로 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한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으며, 자녀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는데 장애가 없는 땅. 한국에서 삼십년을 산 나에게 한국은 잊을 수 없는 모국이지만, 불과 3년째 살고 있는 캐나다 또한 나의 조국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포용을 배웠고, 관대와 인간애를 접하였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과 어울려 우리 2세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 들어 보고 싶다. 경제적인 면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 으로써의 역할도 한 번쯤 생각해 본다면 이 곳에서의 삶이 그리 각박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코리언 캐내디언으로 이곳에 잠들고 싶다. 끝.
김성국
김성국 (momo64@hananet.net) 조회: 992, 줄수: 13, 분류: Etc.
용기와 희망의 말씀들 감사합니다.
정말 인간승리를 본 느낌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글을 읽고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을거 같군요.
우근씨 같은 한국사람이 아직은 많은가 봐요.
그래서 한국의 미래는 아직 밝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이런저런 삶의 파도가 다가와도 잘 이겨나가세요.
멋진 아니 이미 멋진 삶의 경험이 부럽네요.
저도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족들 모두 행복하시길 바래요.
올해 크리스마스고 따뜻한 이웃이 있어 어떤 칠면조 요리라도
맛이 그만일거 같네요.
그럼 계속 건투하시길 제가 믿는 신께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003-04-17
del
너무나잘
너무나잘 (bluemin2@freechal.com) 수정: 1, 조회: 1319, 줄수: 16, 분류: Etc. 안녕하십니까?
이 글을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하구요... 대단하시네요....
저는 막연하게 캐나다의 이민을 결심하고 있는 백일된 딸아이의 엄마입니다.
직장에도 다니고있구요...나이는 한국나이로 29이지요...
6년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bc카드회사에서 OracleDB 관리도 해보았구요...
지금 oracle에 vb를 연동해서 병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병원실장을 맡아보고 있지요...
저녁에는 웹쪽의 공부를 하고 있고 아침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있지요....
한 3~5년후에 캐나다이민을 갈까합니다. 아이를 위해서요....
여쭤보고싶은 것이 있네요...
그곳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려면은
어떤 전산기술을 가지고 있어야좋을할까요....
프로그래머로서의 캐나다생활과 직장을 얻는것이 궁금합니다. 2003-04-17
del
richard
작성자 : Richard Jung (rootjung@samsung.co.kr) 조회: 853, 줄수: 21, 분류: Etc.
Re: 나야, 형!
형, 저 기억하세요?
Richard Jung 입니다.
정말 반갑습네다.
여의도에서 같이 근무했었죠.
건강하시죠? (물론 형수님도...)
2000년 6월에 Toronto에
집사람하고 갔다왔어요.
(가기전에 형 찾는다고
여러 사이트에 Wanted 올렸었는데...)
하고픈 말은 많지만
사적인 것이므로
일단 저에게 reply 주세요.
--형과의 추억이 새록새록한 머슴아가... 2003-04-17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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